7화
2. 사랑에 빠지기는 했는데
밤이 왔다.
어슴푸레 어두워지는 창밖을 흘긋거리며 루크는 초조하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커다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가만히 두지를 못하고, 바지에 축축한 손바닥을 닦기도 했다. 그의 행태는 극심한 불안증 환자와도 같았다.
어둠에 저 거대한 몸을 숨기고 자비 없이 적을 도륙하던 용맹한 전사의 기상은 온데간데없고 밤이 오기를 두려워하는 고개 숙인 남자 마냥 초조해하는 꼴이라니. 루크는 자신이 한심했다. 스스로마저 이런 제 모습이 한심할진대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부하는 오죽하랴? 그는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제이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처음 말 꺼내기가 어렵지, 이후로는 쉬운 법이었다. 제이에게는 이미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한 루크는 어젯밤의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제이는 긴 침묵 후에 홀로 눈물을 훔쳤다.
제이가 고생하여 데리고 온 이발사는 결국 연무장에서 기절해 귀가 조치를 시켰다. 무엇보다 아무리 실력이 좋은 이발사라고 하여도 수전증 걸린 듯 떠는 손에 면도칼을 쥐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력 발휘는커녕 앞으로 이발사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는 있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제이는 그에게 두둑한 보상금을 챙겨 주었다.
수백 번 생사의 경계를 넘어온 기사마저 이겨내기 힘든 고난이었다. 맹수처럼 포효하는 루크를 보고서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 이발사는 제 용기를 증명해낸 셈이었다.
‘저대로 둘까?’
공작 부인이 루크를 받아들였다면 굳이 수염을 깎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또 실력 좋은 이발사를 수배하려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할 것이다. 제이는 쓸데없이 이발사에게 보상금이나 쥐여주는 낭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덜컹덜컹덜컹!
루크가 다리로 책상을 부술 듯 쳐대기 시작했다.
‘차라리 고개 숙인 남자가 낫지, 힘이 저렇게 넘쳐나는데…….’
쓰지를 못하니……. 쓰지 못할 뿐이면 다행이겠다. 편히 쉬며 피로를 풀어야 할 밤 시간에 루크는 제 인내심을 시험하며 부드러운 고문을 견뎌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루크의 책상이 단단하기로 소문이 난 참나무로 만들어진 명작이라는 것이었다. 쉽게 부서질 일은 없을 것이다.
덜컹덜컹덜컹!
…오늘은 안 부서질 것이다. 제이는 생각을 정정했다.
‘안나에게 도움을 청해봐야겠군.’
내버려 두었다가는 백 년이 지나도 후계자를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충정을 다하여 루크를 섬기기로 결심한 이래, 제이는 그를 이토록 한심하고 불쌍하게 여길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루크는 여전히 존경하는 주군이었지만, 인간적인 방향의 동정심이었다.
제이는 루크를 위한 일말의 배려로서, 말없이 자리를 떴다. 말해봐야 들리지도 않을 상태 같기도 했다.
제이가 사라지자 루크는 더욱 초조해졌다. 이제 막 해가 진 참인데 왜 벌써 퇴근을 한단 말인가!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 부지런히 업무를 처리해 온 덕분에 그의 손에는 밤을 새며 처리해야 할 안건이 단 하나도 없었다.
보좌관 제이뿐만 아니라 집사도, 관리도 영주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지 않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어디에 굶어죽는 영지민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 시간에도 영주의 도움을 바라는 영지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감히 잠을 자게 내버려 두겠단다.
‘내가 잠을 잘 시간 따위 없게 굴리고 굴려야지, 이 게으른 것들!’
루크는 텅 빈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제 초저녁인데, 밤이 아닌데 왜 자신은 할 일이 없단 말인가? 새벽부터 연무장으로 달려가 기사단을 훈련시켰고, 곧 닥칠 밤이 두려워 무섭게 집중하여 일을 처리한 탓이건만 루크는 괜히 영지의 관리들을 원망했다.
본인도 트집이라는 건 안다. 알지만, 그는 침실로 돌아가기가 너무 무서웠다.
동이 트기 전까지 루크는 태어나 처음으로 울 뻔했다.
나디아는 완전히 경계를 풀어버린 듯 그에게 몸을 기대어 안겨 왔다. 처음에는 낯선 듯 뻣뻣하게 누워있었지만 몇 번인가 눈을 마주치고,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녀가 먼저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루크는 차라리 나디아가 자신을 겁내서 멀리 떨어져 주기를 바랐다.
거리를 두고 있을 때에는 느껴지지 않던 향긋한 살 냄새와 윤기 흐르는 금발의 차갑고 매끄러운 촉감, 무엇보다 그녀의 작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숨이?.
벌떡!
루크는 의자를 부술 듯 거칠게 일어났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랫도리에 피가 몰렸다. 다른 생각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불쑥 나디아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달리 집중할 일이 있던 낮과 달리 지금은 그를 방해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디아는 얼마나 따뜻하고 부드러운가? 그녀는 자신과는 다른 생물처럼, 어디 하나 딱딱하고 차가운 부분이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크림처럼 하얀 피부는 그의 상상보다 더 말랑거리고 부드러웠다. 그는 차마 손을 뻗어 그녀를 만져보지도 못했다. 한 번 만지면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이성이 끊어져 버릴까 겁이 났다.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가까이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디아의 눈동자였다.
초록색 눈동자에는 어렴풋한 경계가 조금 남아있었다. 괜찮을까, 이래도 괜찮을까? 머뭇거리면서도 그녀는 용기를 내어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 결혼하여 의지해야 할 남편이라고, 그녀에게는 무섭게 생긴 남자인데도 그렇게 생각해준 것이다.
그러나 희미하게 남은 경계심 너머에는 호의와 기대가 있었다. 그녀는 사람의 친절을 의심하지 않으며 쉽게 믿었다. 나디아가 자신에게 보여주기 시작한 호의가 좋아서, 루크는 고목나무처럼 굳은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잠이 들어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잠결에 더욱 밀착해오는 부드러운 몸보다도 루크는 그녀와 몇 번인가 주고받았던 눈맞춤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 보드랍고 따뜻한 눈이야말로 루크가 나디아에게 반하고 말았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 안에 담긴 신뢰를 배신할 수 없어 괴로워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루크는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를 회상했다.
*
시간은 석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크는 머리가 지끈거려 무척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는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 말술이었는데도 사흘을 쉬지 않고 퍼부어대는 데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만취해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았다는 점만이 위안이었다.
내뱉는 숨에도 채 가시지 않은 술이 묻어나는 듯했다. 속이 뒤집어질 듯한 숙취는 스스로 물러갈 때까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루크는 잇새로 욕설을 뱉었다.
“성질은. 꿀물 한 잔 챙겨 줄까?”
“괴물입니까, 당신은…….”
“무례하군. 술이 좀 셀 뿐이야.”
태자 레너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루크의 비아냥거림을 흘려 넘겼다. 분명 루크의 언행은 태자를 향한 것이라기에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너드에게는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레너드는 눈조차 뜨지 않는 루크를 보다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자네는 날이 갈수록…….”
“뭐요.”
“아닐세. 야성미가 넘친다고.”
루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레너드를 흘긋 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레너드의 말이 결코 칭찬이 아니라는 건 그도 알았지만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 수염을 길렀나? 전에 보았을 때에는 그래도 사람 같았는데.”
“내버려 두십쇼.”
“그냥 이유를 알고 싶었던 거라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해서. 알다시피 내가 자네에게 관심이 좀 많잖아.”
“이제 거둬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루크가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겉모습만 보면 사나운 곰이 따로 없었다.
“무엇을? 관심을?”
“…….”
“자네가 포기하게. 이건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거라서.”
레너드는 킥킥거리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디선가 현악기 음악이 흘러나올 듯이 우아한 몸짓이었다. 루크는 몸서리를 치며 혀를 찼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수도와 맞지 않았다.
이 달짝지근하고 얌전한 거리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다. 그야 수도는 여러모로 살기 좋은 도시였다. 도로가 잘 정비되어 마차가 다니기에 편하고, 오래된 건축물에는 역사가 묻어났다. 오랫동안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이 부유한 도시는 마치 꽃향기가 나는 것 같은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꽃같이 화려하고 연약한 도시, 라 먼스트로드.
루크도 어린 시절에는 라 먼스트로드에 살았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무렵에는, 그 역시 이 도시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사치와 번영의 정점에 선 대귀족의 자제로서,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태자 레너드와의 인연도 그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오르면 그는 마치 구름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꺼운 막을 뒤집어쓴 양 감각이 둔해지고 멍청해졌다. 이 도시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이 도시의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입으로는 도덕과 윤리를 외면서 뒤돌아서면 짐승과도 같이 돌변했다. 루크 역시 그다지 윤리적인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마치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할 능력을 상실한 것만 같았다.
루크는 콧잔등을 꾹 눌렀다. 머리가 아픈 건 비단 숙취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가는 그 역시 이 끈적하고 달큰한 공기에 취해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루크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돌아가게 해주십쇼. 어차피 볼 일도 없지 않았습니까.”
“싫은데. 돌아가면 또 부르기 전까지 안 올 거잖나.”
“……볼 일이 없으면 애초에 부르질 마십쇼. 어차피 건국기념일에는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생일에도 오지 않았고 말이지. 하나뿐인 친구인데도.”
“…….”
네 생일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고 버럭 소리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사람을 오라 가라 부를 정도로 대단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