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7화 (7/150)

6화

나디아가 상쾌하게 아침 식사를 비우고 있을 시각이었다.

제이는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이리 급하게 달려본 적이 없었다. 평소 단련한 근육이 뜨겁게 성을 내며 달아올랐다. 절박함만큼은 그 어떤 위기와 비교해도 지지 않았다.

온 성을 다 뒤질 기세로 뛰어다니는 제이의 뒤를 비쩍 마른 남자가 힘겹게 따라 달렸다. 그는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곧 죽을 듯이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뒤쳐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단련은커녕 숨쉬기 운동도 버거운 마른 남자에게 아침 달리기는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프고 목구멍이 따가웠다.

제이의 기세가 워낙 험악해 죽을 것 같아도 참으려고 했던 남자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달렸다가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가 걸음을 멈추며 애원조로 말했다.

“겨, 경, 헉, 조금만, 헉, 천천히, 허억.”

“쯧.”

그나마 애원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었다.

제이는 그제야 달음박질을 멈췄다. 평소 부지런히 체력을 단련한 자신과 달리 제 뒤를 쫓아오는 남자는 일반인이라는 걸 겨우 상기한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일반인이 자신과 같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남자는 힉, 힉 소리를 내며 무릎을 굽힌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새벽부터 달려야 했던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제이의 마음은 여전히 급했다.

한시가 급했다. 제이는 남자가 숨을 고르기를 기다려주며 연신 앞을 흘긋거렸다. 마른 남자는 제이의 눈치를 보다 기어코 켁켁 마른기침을 했다.

“기다려줄 테니 숨을 크게 쉬어 보시오.”

“네, 네. 조, 히엑, 조금만.”

“후.”

정말 이 사람이 최고인 건가. 제이는 영 미심쩍은 눈길로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스테이턴 성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고 손꼽히는 이발사였다. 외모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는 기사들의 의견과 평판, 성과에 대한 소문 등을 근거한 결과였다.

제이는 유능한 보좌관이었으므로 상관의 명령을 최대한 빨리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을 떠나 개인적으로도 상사의 불행이 얼른 끝나기를, 조그만 희망이라도 잡기를 바랐다.

눈앞의 남자- 이발사에게는 다소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에 이발사는 아주 약간의 억지와 강압, 그리고 높은 보수를 약속받고 제이를 따라나섰다. 이발사는 제가 감히 공작의 수염을 깎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지 처음에는 기함하며 거절했지만, 높은 보수를 듣고는 금세 의견을 뒤집었다.

최고의 이발사라 인정을 받아 공작의 수염을 깎게 되었으니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일만 하면 될 줄 알았지, 고객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다 폐가 찢어져 죽을 위기에 처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발사를 데리고 출근하자마자, 제이는 매우 희망적이고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공작 각하께서 부인과 동침에 성공하셨다는 소식이었다.

루크는 자신이 부인을 소박맞혔다는 소문이 돌까 걱정했지만, 사실 그 걱정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험악하지만 훌륭한 영주인 공작이 수도에 일을 보러 갔다가 날치기 같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성 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부인을 걱정하고 있었다. 날치기 같은 결혼,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됐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은 훌륭한 귀족이자 영주였다.

그의 지배를 받는 영지민들은 그의 훌륭한 성품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 없이 칭송했다. 과도한 세금을 걷지도 않았고, 상벌에 엄격해 치안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죄인에게는 자비 없는 엄벌을 내리지만, 그 죄의 여부와 무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하고 따졌다.

그리고 벌이 엄격한 만큼 포상에는 후하다. 그 어떤 재해가 닥쳐도 영주민이 배를 곪지 않도록 보살피고 보호했다. 죄인에게는 무서운 영주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주인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그의 무수한 장점을 알아보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영지민들은 영주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 공작을 존경하지만, 그가 쉽게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 역시 인정했다.

아직 20대임에도 그는 중후하고 매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큰 키와 단단하게 단련된 몸,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빛, 이 모든 것에 정점을 찍는 덥수룩한 수염….

수도 근처에는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의 눈에도 차이가 명확한데 아가씨 눈에야 어떻겠는가? 수도에서 나고 자란 세련된 아가씨 눈에 매력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오히려 기피할 만한 요소만 가득했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장점을 어필한 게 아니라면 이야기는 뻔했다.

공작이 일방적으로 한눈에 반해 납치하듯 결혼한 것이었다.

루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제이는 오히려 지나친 충성심과 존경심으로 이 같은 사정을 한 번에 파악하지 못한 케이스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제이는 루크에게 불가능한 일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맹목적인 충성은 비뚤어진 성격과 솔직한 입 덕분에 평소에는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충신으로 보였다.

겉보기에는 멀쩡하고 꽤 지적이기까지 했으므로 위험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제이는 정상인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파악하고 있는 진실(아마도)을 얘기해주지 못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이와 루크만 모를 뿐, 영주의 결혼 소식을 들은 영지민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공작 부인을 동정하고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작은 결혼을 한 후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부인과는 얼굴 한 번 마주치지 못했다. 성 내 사람들은 공작이 마주치지 않은 게 아니라 마주치지 못한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마주치지 못하니 당연히 동침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 먼 지방까지 시집을 와 준 부인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괜히 우리 영주님의 눈에 드는 바람에, 가엾은 분….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공작 부인이 공작의 침실에서 잠들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사람들은 무척 기뻐하고 놀라워했다. 공작에게는 후계자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곧 이 삭막한 성에도 귀여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날이 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각하!’

아직 수염도 깎지 않으셨는데!

제이는 억울한 마음을 눌러 삼키며 눈에 핏발을 세우고 루크를 찾았다. 겁먹을까 봐 얼굴도 못 보겠다고 우는소리를 하더니, 고작 반나절 만에 어떻게 상황을 뒤집은 것인가?

제 주인을 향한 존경심 반,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닌 고생에 억울함이 반이었다.

제이는 이발사가 어느 정도 진정한 듯 하자 다시 재촉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겨우 살 것 같았던 이발사는 거의 울면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행히 두 번째 달리기는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허억, 저기, 경, 가, 각하께서는, 컥….”

“집무실에 안 계셨으니 여기가 틀림없다.”

“허억, 헉, 허어억….”

이발사는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이발 도구를 챙겨 뛰려니 더욱 죽을 맛이었다.

집무실, 식당. 루크가 아침에 갈 법한 장소를 모두 뒤져 보았으나 허탕이었다. 남은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제이는 힘차게 연무장에 들어섰다. 이발사는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식히며 숨을 돌렸다.

살벌한 기합이 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각!”

퍽! 쿠당탕!

“하….”

제이와 이발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쓰러진 기사가 넘어지고도 한참을 미끄러졌다. 가죽 갑옷이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끔찍하게 귓가에 남았다. 얼마나 세게 쳤으면 사람이 날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이발사는 제 이발 도구를 끌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차마 기사가 날아온 방향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이는 제 옆에 쓰러진 기사를 눈으로만 보았다. 그는 기사단 내에서 맷집이 좋기로 소문이 난, 꽤 실력이 뛰어난 자였다. 이런 자를 날려 보낼 실력자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밖에 없다.

제이가 다시 앞을 보았다. 목검을 쥔 루크 리처드 스테이턴이 쯧 혀를 찼다.

“아직 몸이 안 풀렸다. 더 덤빌 자는 없나?”

“……각하, 아침부터 이 무슨…….”

난동이십니까. 제이는 뒷말을 잘라 삼켰다. 루크가 살벌하게 자신을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절대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루크는 목검 끝을 제이에게 향하며 말했다.

“왔느냐, 제이. 너라도 좋다. 덤벼.”

“아시다시피 전…….”

“뭐.”

“……이발사를 데려왔습니다.”

훌륭한 핑곗거리였다. 그러나 제이 대신 루크의 살벌한 눈빛을 받게 생긴 이발사는 꼴딱거리며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스스로 보지 않으면 무얼 하나, 저쪽에서 자신을 보는데. 이발사는 이 자리에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

루크가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을 집어 던졌다. 제이는 덤빌 생각이 없어 보였고, 새벽부터 날뛴 탓에 그를 상대해 줄 기사도 남지 않았다.

겨우 루크가 진정한 것 같아 제이가 달래듯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듣자 하니 좋은 일도…….”

헉. 제이는 숨을 삼켰다. 날카로운 살기가 목을 죄었다.

좋은 일도 있으시다던데, 라는 그 말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제이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가, 각하?!”

“으아아!”

“각하, 진정, 진정해주십시오! 왜 이러십니까!”

“으아아아!”

짐승이 포효하듯 루크가 울부짖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