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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라는 공작에게 시집왔는데-6화 (6/150)

5화

나디아가 조금 진정한 것 같자 루크가 부드럽게 말했다.

루크는 나디아를 겁먹게 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아예 얼굴을 가려 버릴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랬다가는 다른 의미로 겁을 먹을 테니 태도나 말투, 목소리라도 부드럽고 상냥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당신이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진정할 시간을 주고 싶었던 거였소.”

“…….”

“겁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혼은 당연히 고려해보지도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소. ……사과라면 내가 해야지.”

“……겁, 겁먹지 않았어요….”

나디아도 제 변명이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았다. 누가 봐도 그녀는 겁에 질려 졸도한 꼴이 아니었나. 그러나 그날 밤에는 이 남자가 이토록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힘들었던 결혼식, 생전 처음 보는 남편, 피로한 데다 늦은 밤이었고 천둥 번개까지 내려치지 않았나. 나디아는 슬쩍 눈물 젖은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날의 기억은 확실히 과장된 부분이 있었다. 번쩍거리는 천둥 번개에 거대한 윤곽이 드러나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야수처럼 보여서 겁을 먹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다시 본 남자는 그날의 기억처럼 사람 같지 않은 야수가 아니었다.

‘수염은 확실히 많지만….’

얼굴의 반을 덮은 수염 때문에 험악한 인상은 여전했지만 지금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다정한 눈동자가 보였다. 날이 선 눈매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녀는 커다란 남자가 자신을 달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나를 해치지 않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확신은 안도를 불렀다. 나디아의 몸에서 긴장이 쭉 빠져나갔다. 그는 여전히 나디아가 어렸을 때 보았던 조부의 곰 박제처럼 크고 험상궂었지만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서 자신의 뺨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커다란 남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디아.”

“예, 각하.”

“……루크라고 부르시오. 그대의 말처럼 우린 이제 부부이니까.”

루크는 자신의 손에 얹힌 나디아의 손을 빼내지도 못하고 이름을 말했다. 나디아는 한결 진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루크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다행히 울음은 그친 것 같으니 그녀를 잘 달래서 돌려보내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나디아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그의 손을 놔주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디아의 뺨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루크가 아주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녀의 연약한 피부에는 쉽게 상처가 남을 것이다. 루크의 심장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뛰었다. 거친 숨소리를 들켰다가는 나디아가 또 겁을 먹을지 모르니 아주 가늘게 숨을 뱉어야만 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남자의 본능으로 당연히 하체에도 피가 몰렸지만 그는 모르는 척했다.

“진정하였다면 이제 돌아가는 것이 어떻소. 밤이 늦었소.”

“네?”

“…무슨 문제라도 있소?”

“저…… 돌아가야 하나요?”

“나디아?”

겨우 눈물을 그쳤던 나디아의 눈이 촉촉해졌다. 루크는 마치 자신이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울지 마시오!”

“…부부라면, 같은 침실을 써야 한다고 알고 있어요….”

“모두가 꼭 그런 건 아닐 거요.”

“저희 부모님은 그러셨어요. 그리고 저, 여기는 너무 낯설어서, 혼자 자는 거 무서워요….”

“…….”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머릿속뿐만 아니라 혀도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디아가 말하는 동침이 제가 아는 그것이 맞는지, 루크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하얗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크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약 이 자리에 나디아가 없었다면 그는 이미 수백 번 벽을 깨부수었을 것이다.

루크는 만약을 위해 물었다.

“……나디아. 혹시 동침하는 부부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소?”

“예? 무얼 하다니요…?”

“…….”

“어, 저기, 그러니까….”

나디아의 뺨이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루크의 희망과 아랫도리가 함께 부풀었다. 나디아가 수줍게 대답했다.

“꼭, 끌어안고 자요…….”

“…….”

“……루, 루크…?”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는 저 순진한 얼굴에 대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루크는 눈물을 삼켰다.

*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날 이후 처음으로 나디아는 무척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얼마나 푹 잤는지 그 흔한 꿈도 한 번 꾸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반짝 떴다. 머리가 개운하고 맑았다.

햇살이 기분 좋게 얼굴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이불을 당겨 몸을 말고 베개에 뺨을 부비던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앗!”

왜 혼자 누워있지? 나디아는 침대에 주저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옆자리는 물론,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주 약간 구겨진 베개를 제외하면 그녀 외에 사람이 있던 흔적조차 없었다. 나디아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썼던 베개 위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녀의 것보다 두 배 가까이 큰 베개는 그녀의 남편의 것이었다.

‘남편….’

혼자 생각해놓고 그녀는 괜히 부끄러워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고작 단어 하나로 이토록 부끄럽고, 동시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용기를 내길 잘했어.’

사람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라고 했다. 겉모습에 현혹되면 안 된다는 어른들 말씀이 하나 틀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디아의 남편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너그럽게 무례를 용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겁먹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주기도 했다. 지나치게 걱정을 하고 있었던 만큼 나디아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나디아가 안심하고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밤새 끌어안아 주기도 했다. 자신을 감싼 따뜻하고 단단한 몸은, 나디아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지만 무척 안심이 되는 품이었다.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그곳은 그녀가 온전히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장소가 된 것이다.

‘목소리도 너무…… 좋았고…….’

나디아는 배시시 웃으며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쑥스러워서 머뭇거리는 나디아를 먼저 끌어안아 주고, 울어 빨개진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잘 자라고 속삭여주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같은 사람을 떠올리는 감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디아는 진작 용기를 내어 그를 찾아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동시에 그의 얼굴만 보고 기절하고 말았던 첫날밤이 너무나 미안해졌다. 이리도 다정한 사람을 두고, 큰 무례를 저질렀다.

‘꼭 다시 사과해야지.’

낮에는 공작, 아니 남자, 아니 남편, 아니…… 루크가 바빠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오늘 밤에도 그녀와 함께 잠들 테니까 말이다. 나디아는 행복감에 젖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제 나디아는 루크의 덥수룩한 수염도 그리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인상이 험해도, 눈매가 무서워도 그의 눈동자는 다정하니까. 물론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이제 나디아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어른이니까 괜찮았다.

‘그래! 나는 어른이니까! 결혼도 한 유부녀야!’

성숙한 어른! 진정한 어른이 됐어! 이상한 자부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나디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이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씻을 준비를 할까요?”

“헉! 아, 네! 네에!”

한 달 동안 나디아를 돌봐주었던 시녀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졌지만 나디아는 굳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녀는 무척 행복한 상태였으므로 사소한 의문 정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문이 열리고 시녀가 간단한 조식을 챙겨 작은 테이블에 놓아 주었다. 시녀의 눈이 기민하게 나디아와, 지나치게 깨끗한 침대를 훑었다. 시녀의 얼굴에 약한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손을 씻은 나디아가 자박자박 걸어 의자에 앉았다. 어젯밤 그녀가 앉았던 그 의자였다. 시녀가 물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부인.”

“네? 예! 푹 자서 너무 개운하고 가뿐해요!”

“……그렇습니까. 혹시 아프거나 불편하신 곳은…….”

“없는데요?”

나디아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녀가 무언가 다른 대답을 바라는 듯하자 나디아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각하, 아니, 루크가 꼭 끌어안아 주었거든요. 따뜻하고 편안해서 푹 잘 수 있었어요. 사실 여긴 너무 낯설어서 아주 조금…… 조금 무서웠거든요.”

“……그러셨군요.”

“아니, 불편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낯설었다는 것뿐이에요!”

“……그러셨을 겁니다. 부인께서는 스테이턴 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셨으니까요. 자, 식사가 식을 거예요. 어서 드셔야지요.”

시녀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동안 좋게 말해 예의 바른, 나쁘게 말하면 차가운 태도를 고수하던 시녀의 따뜻한 미소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져서 그런 것일까? 원래 좋은 사람이었는데 여유가 없어 오해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디아는 시녀에게 미안해졌다.

“잘 먹을게요……. 저, 이름이 뭐예요?”

“…안나라고 합니다. 부인, 말씀 편히 하셔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전 이게 편해요…. 잘 챙겨 주셔서 계속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나디아는 맑게 웃었다. 시녀, 안나는 그런 그녀에게 더욱 자애롭게 웃어 주었다. 마치 어린 동생을 어르듯 부드러워진 태도였지만 나디아는 그저 자신에게 상냥한 태도에 만족스러웠다. 지나치게 극진해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태도가 훨씬 좋았다.

나디아는 그동안 위장이 따끔거려 제대로 먹지 못했던 시간을 만회하기라도 할 듯 안나가 가져다준 식사를 깨끗하게 다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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