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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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한숨처럼 짧고 달콤하게 들렸다. 나디아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조금 안도하고서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우선, 들어오시겠소?”
“예!”
예절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듯 나디아가 냉큼 대답했다. 루크는 문간에서 비켜서며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나디아는 마치 전투에 임하는 전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온몸의 피가 말라버릴 것만 같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지만 겉으로나마 정상적으로 걸어 들어갈 수는 있었다.
생각 외로 평범한 방이었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고급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남자가 거구를 뉘일 수 있는 침대는 나디아가 보았던 어떤 침대보다 컸지만 그 외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오히려 나디아가 쓰고 있는 방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이었다.
“앉으시오.”
“아뇨, 네, 아뇨…. 앉을게요.”
남자, 아니, 남편이 내어주는 의자에 살짝 걸터앉았다. 앉기 무섭게 다리가 녹아내릴 것처럼 힘이 풀렸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나디아는 각오를 다졌다. 눈물로 자신을 전송한 부모님과 언니, 오빠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녀는 짧게 심호흡을 세 번 이어서 했다. 루크가 그녀의 앞에 주황색 액체가 담긴 잔을 내밀어주었다.
“부인께서 마시기에는 강할 것 같지만, 이런 것밖에 없어서.”
“감사합니다!”
사막에서 감로수를 얻은 사람처럼 나디아는 앞뒤 잴 것 없이 잔을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타는 듯이 말랐던 참이었다. 평소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와인 정도로 취한 적은 없어서 그녀는 제가 술이 약하다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루크가 내밀어준 술은 그녀가 알던 술이 아니었다. 화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뱃속에 확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입을 틀어막았다.
“나디아!”
“괘, 괜찮, 괜찮습니다! 놀, 놀라서…….”
차마 뱉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삼킨 나디아가 눈가를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루크는 그녀에게 술을 권한 자신을 죽도록 욕했다. 물론 그건 그가 가진 술 중에 가장 약한 것이다. 애써 찾아와 준 나디아에게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을 수는 없어 내어준 것이다. 그녀가 한 번에 들이켤 줄도 몰랐지만, 그 이전에 침실에 술밖에 두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나디아는 사람들이 어째서 용기를 내고 싶을 때 술의 힘을 빌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뱃속을 뜨겁게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강렬함이 사라지자 손끝의 힘이 풀리며 조금은 유연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도 조금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안 되겠어. 사람을 불러 물이라도 가져오게 하겠소.”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나디아가 고개를 퍼뜩 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정말이오?”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배 속이 뜨겁기는 했지만 오히려 긴장을 풀어주어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해가 지는 동안 내내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말을 용기 내어 뱉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어요. 그, 그, 그날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었는데……. 미루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그랬어요.”
“……부인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소.”
“하지만…… 화나신 거 아니에요? 아니다, 화가 나는 게 당연하죠! 그러니까 그동안 절 보려고도 하지 않으시고……. 제가, 제가 사과드릴게요. 화내지 마세요……. 제가 정말 그러려던 게 아니고, 저는, 너무 긴장하면 기, 기절하는 습관이 있어서?.”
사실 그런 습관은 없었지만 나디아가 최선을 다해 생각해낸 변명이었다.
“그날도 새벽부터 결혼식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러니까, 결혼하느라 너무 긴장했던 거예요. 진짜, 각하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요….”
준비해 온 대사를 모두 쏟아냈다. 나디아는 눈을 꾹 감았다. 상상 속에서는 몇 번이나 혀를 씹거나 굳어서 말을 채 다하지 못하고 기절을 했었는데 술 덕분인지 생각해두었던 변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 변명거리를 생각해 늘어놨으니 이제는 남편 차례였다. 나디아는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봤다. 최악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코웃음을 치고 그녀를 내쫓아버리는 것이었다. 귀찮아서 그냥 뒀더니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이참에 내쫓아버리고 자신을 모욕한 랭커스터 가문도 응징하겠다면서….
안 돼,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디아는 울음을 꾹 참았다. 그러나 지금 울어서는 안 됐다. 그녀는 붉어진 눈가를 숨기려 고개를 더 아래로 떨어뜨렸다.
“……정말 화난 게 아니었소만.”
“그러시면…… 왜 그동안…….”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 삼킨 눈물 때문에 그녀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루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경종이 울었다. 그들은 고작 손바닥만 한(정말 손바닥만 한 크기는 아니었지만 루크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나디아가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울먹거리는 그녀를 달래주고 싶지만 멋대로 손을 뻗으면 겁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 두어서는 참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루크는 겁을 먹고 물러난 것이지만 나디아가 느끼기에는 달랐다.
‘어떻게 해, 각하께서는 정말 내게 완전히 질려서 싫어지신 건가 봐.’
왜 자신에게 청혼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루크는 그녀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아무나 고른 것일 수도 있었다. 결혼을 해야 할 사정이 생겼거나 적당한 나이가 되었으므로 아무나 골라 혼담을 넣었던 것이 아닐까? 스테이턴 공작 가문 정도 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디아의 상상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마구 내달렸다.
“그게 아니오! …혹시 우는 거요?”
“흐, 흑, 아니, 아니요…. 안 울어요…….”
나디아는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러나 부정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소,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돼요. 제가 싫어서 얼굴도 보기 싫었다고, 흑, 그랬는데, 제가, 주제도 모르고 각하의 침실에나 찾아와서….”
“나디아.”
“이, 이제라도 부인의 의무를 다하려고, 그래서, 찾아온 거고, 절대로 여기서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었고요. 흐, 흐윽, 아무도, 아무도 나한테는 말도 걸어주지 않는데, 아무도 없고, 누구하고 말도, 못, 못하겠고.”
이제 나디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오는 대로 마구 말을 하고 있었다. 한 번에 들이켠 술기운이 올라와서 정신이 흐려진 탓이었다. 결국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나디아의 흰 뺨에 굵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한 번 털어놓기 시작하니 그간 억눌러왔던 설움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 나는, 나는 결혼하라고 해서 결혼한 것뿐인데, 그런 건데…….”
“나디아, 제발 진정해주오. 아, 제길, 아니, 밖에 누구?.”
루크가 벌떡 일어나 나디아의 곁으로 갔다. 왜 자신의 침실에는 그 흔한 물 한 잔도 없는 건지, 나디아의 눈물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가냘프게 떨리는 어깨를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면서 가만히 있지도 못해 근처를 서성거렸다. 사람을 부르자니 그녀가 울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여자를 달래는 재주 같은 건 더 없었다.
그때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나디아가 루크의 옷소매를 당겼다. 루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굳었다.
“남, 남편이신데, 이제 제 남편이시잖아요…. 근데 왜 저 혼자 두시는 거예요. 화 안 나셨다면서, 사과할 것 없다고 하시면, 저는, 사과도 못 하고, 어헝,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흐엉, 이혼, 이혼을, 당하고, 돌아가면, 부모님이, 어허엉, 그건 싫은데….”
“이혼은 절대 안 돼.”
“저도 싫어요!”
이혼을 당하고 돌아가면 부모님이 얼마나 실망을 하실까. 가문에 끼칠 피해도 피해였지만 그보다는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는 것이 나디아는 가장 무섭고 싫었다. 눈물과 흥분과 억울함과 술기운으로 범벅이 된 나디아가 말했다.
“이제 부부인데, 우리 엄마랑 아빠는 맨날 같이 자던데, 저는 결혼했는데 계속 혼자고…. 제가, 사과드리는데 받아주지도 않으시고….”
“……제발 진정하시오, 나디아. 제발….”
“흑, 훌쩍, 흐윽….”
루크는 용기를 쥐어짜내서 울고 있는 나디아의 뺨을 슬며시 감쌌다. 커다란 손바닥에 비해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나디아는 울음을 그치고 루크의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자신을 달래어주려는 의도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