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바깥바람을 쐬니 답답한 속이 조금 내려가는 것도 같았다. 나디아는 자박자박 땅 밟는 소리에 집중을 하려고 노력했다. 제 뒤를 따라오는 시녀 셋의 발소리는 안 들린다, 들리지 않는다….
‘안 들릴 리가 있냐구…….’
선명하게 들린다. 무시하려고 할수록 더 선명하게 들려서 나디아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차분하고 얌전한 얼굴로 발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사뿐사뿐 걷는 모양이 자신보다 훨씬 숙녀다웠다. 나디아는 그들을 흉내 내어 걸으려고 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지만 누가 봐도 그들이 자신보다 더욱 어른스러워 보였으므로.
나디아는 어른스러운 사람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랭커스터 가문의 막내딸로, 바로 위 자매? 언니 일리야와도 9살이나 차이가 나서 늘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다. 그녀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언니와 오빠도 모두 그녀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애지중지 귀히 여겼는데, 그 탓에 나디아는 자신이 다 자란 어른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나디아 마샤 랭커스터-이제는 스테이턴 공작 부인이 된 그녀는 그리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하니 길었다. 작은 얼굴을 채운 이목구비도 반듯하다. 그러나 사람의 분위기라는 것이 어디 외모만의 문제이던가? 크고 동그란 눈매와 사랑스러운 녹색 눈동자, 그리고 배시시 웃는 얼굴은 그녀를 유독 소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나디아도 그런 자신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밝은 금발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녹색 눈동자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정반대의 사람을 향한 동경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언니나 오빠도 없으니까…….’
의지할 사람이 없는 낯선 환경에서 나디아는 얕잡혀 보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지금이야 지나칠 정도로 정중한 태도라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시녀들이 자신에게 깍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스테이턴 공작의 영향이 틀림없었다. 공작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면 자신을 이렇듯 극진하게 모시겠는가? 멀리 수도에서 온, 물정도 모르는, 고작 남작 가문 출신에 불과한 아가씨를 말이다. 공작 가문 입장에서는 한참 기우는 결혼이었는데도 흠을 잡기는커녕….
이건 다 나디아가 제대로 된 공작 부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디아는 스테이턴 공작령에 온 이래 공작 부인다운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이 다 무엇인가, 결혼을 했는데도 부인의 의무를 단 한 번도 이행한 적이 없었다.
나디아는 사교계에서 주워들었던 부인들의 수다를 떠올렸다. 결혼을 하면, 결혼한 뒤에 이루어지는 ‘대업’에 대해서 말이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이토록 대단한 것이란다’는 듯이 은근하게 웃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였다.
일찍 결혼을 했던 나디아의 친구는 그녀들의 수다에 잘도 맞장구를 쳤지만 나디아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던 ‘대업’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잠자리를 거부하면 쫓겨나게 된다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내가 쫓겨나면 부모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디아의 머릿속에 무서운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공작 가문의 후계를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감히 걷어차고, 부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감히 이런 모자란 여자를 신부로 보내다니! 이건 나를 무시하는 행위다!
상상 속 ‘남편’이 랭커스터 남작 부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는 장면에 이르자 나디아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첫날밤에 기절해버린 것도 남편을 거부한 게 되나?’
그럴 지도 모른다. 나디아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면 딸꾹질에 이은 기절이라는, 어이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결혼하고 한 달 반이나 흐르는 동안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는 처지가 아닐지도 몰랐다. 나디아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졌다.
나디아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은 것이 공작의 자비가 아니라, 그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질렸을 뿐일지 모르지 않은가? 이런 신부는 필요없다며, 돌려보내고, 딸을 형편없이 키운 부모님을 탓하려고…….
나디아는 결혼식 전날 밤, 자신을 끌어안고 울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들은 하염없이 울며 막내딸을 안고서 미안하다고, 그저 미안하다고 빌었다. 대귀족의 청혼을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나디아는 우는 부모님을 앞에 두고 괜찮다고도 하지 못하고 함께 울었다.
사실 나디아는 지금이라도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익숙한 수도, 그 거리, 친구들이 있는 도시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낯설고 커다란 성이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종일 달고 살았던 달콤한 간식거리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가 쫓겨나게 되고, 그 탓에 부모님에게 그 어떤 해라도 끼치게 되는 것은 절대로 싫었다.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창피한 딸이 되어서는 안 됐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나디아는 결심했다.
“저기….”
“네, 부인.”
나디아는 시녀와 눈을 마주치며 우선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언니 일리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을 향해 늘 말했다. 네 웃는 얼굴을 보고도 널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나디아. 나디아는 오늘만큼은 언니의 말이 사실이길 빌었다.
사실 시녀들이 나디아에게 지나치게 극진했던 이유는 그녀가 도시에서 온 귀족 영애이기 때문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골 생활이 불편할까 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아랫것들과 함부로 대화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먼저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실제로 나디아는 낯을 가리느라 그들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아 서로의 오해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꼴이 되었다.
과연 철벽처럼 딱딱했던 시녀의 얼굴에도 희미한 틈이 생겼다. 나디아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얕은 호감을 눈치 채고 용기를 얻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
저녁 식사 계획은 무산되었다.
애초에 지나치게 성급한 계획이었다고, 루크는 생각했다. 제이는 무작정 부딪쳐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지도 못하는 개소리를 지껄였지만 루크의 생각은 달랐다. 이것이 전쟁이라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돌진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다소의 위험이라면 감수할 수 있겠으나 승패가 달린 중요한 전투에서는 무엇보다 정보가 중요했다. 정확한 정보와 아군의 전력 파악과 그에 따른 전략….
‘싸움 따위가 아니잖아, 제기랄!’
루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실제로 태연한 낯짝으로 걸어가다 복도의 석벽에 머리를 갖다 박는 짓을 종종 했다. 사정을 아는 제이는 이제, 짜증나게도, 위로하듯 애잔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루크가 드디어 미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게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 후로 루크는 제 머리를 벽에 갖다 박는 대신 바윗돌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죄가 없는 석벽은 답답한 상황과 달리 쩍쩍 잘도 금이 갔다.
“돌보다 단단한 주먹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이참에 권사로 이직해보시는 건.”
“닥쳐, 이발사나 빨리 수배해라.”
“아무나 불러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걸리는 건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제기랄, 자기 입으로 유능하다 떠들 때는 언제고…!”
“제가 유능한 분야는 미용이 아닌데요….”
제이는 지지 않고 항변했다.
원숭이, 아니, 고릴라도 사람으로 빚어낼 이발사를 찾기가 어디 쉽겠는가. 게다가 제이는 이발사만이 아니라 예절 선생도 비밀리에 수배를 시작했다. 스테이턴 공작의 살기와 기세에도 눌리지 않고 수업을 할 수 있을 강심장이어야 했다. 이발사보다 예절 선생 쪽이 더 구하기 힘들 것 같았다.
스테이턴 공작가문을 오래 모신 기사 중에서도 루크에게 기가 눌리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에 눌리지 않더라도 지나친 충성심 탓에 제 주군이 하는 행동이라면 무조건 좋게만 보는 멍청이들도 많았다. 제이는 두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멍청이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늘 주장을 하지만, 사실 그 역시 충성심으로는 못지않아 직접 주군을 교육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무나 데려 와.”
“각하, 죄송하지만 각하의 상태는 아무나 손을 대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닥쳐. 이깟 털들이 문제라면 다 밀어버리면 그만이다. 내일 아침까지 이발사를 대령하지 않으면 직접 칼로 다 밀어버리는 수가 있어, 알겠나?”
“…….”
평생 투핸드소드밖에 들어본 적 없는 손으로 직접 면도날을 잡겠다고. 제이는 꿀꺽 침을 삼켰다. 수염을 깎으려다 목까지 자를 기세였다. 심심찮게 자해를 했던 근래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사정을 안 오늘에서야 루크의 수상쩍은 행동을 이해하게 됐지만, 저 불안정한 짐승에게 칼을 쥐어줘서는 안 됐다.
“수배를 못하면 제가 직접 밀어 드리지요.”
“……알았다. 이만 물러가.”
루크는 거칠게 외투를 벗어 책상에 던졌다. 제이가 물었다.
“벌써 주무시려는 겁니까?”
“……피곤하다.”
이미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벌써 자려는 것이냐고 물을 시간은 아니었지만 평소 새벽 2시가 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었다. 루크는 피곤한 듯 콧잔등을 문질렀다.
익숙하지 않은 고민으로 정신력을 소모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루크는 손을 휘휘 저었다.
“한 번만 더 그딴 눈으로 쳐다보면 직접 그 눈깔을 뽑아버리겠다.”
“……물러가겠습니다. 쉬십시오.”
제이에게 동정을 사는 신세라니, 루크는 쓰게 중얼거렸다. 제 신세가 너무 한심하고도 멍청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도저히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두고, 혼자 해결하지도 못해서 부하에게 도움을 구해놓고도…….
루크는 시종에게 씻을 물을 준비시켰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잘 준비를 했다.
‘레너드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이제 와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의 조언대로 수염을 깎고, 곰이 아니라 사람처럼 보이는 차림으로 나디아 앞에 나서면, 그녀는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루크는 나디아와의 첫날밤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고, 하얗게 질려서, 파들파들 떨던 나디아. 가엾게도 겁을 먹고 놀라서 어쩔 줄 모르던 그녀는,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또 다시 나디아가 자신에게 겁을 먹고 졸도한다면…….
루크는 그것이 가장 겁이 났다. 또 다시 정신을 잃는 나디아를 보게 될까 봐,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툭 쓰러지던 몸을…….
‘아니, 아니야. 적어도 수염을 깎으면.’
이젠 수염을 깎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루크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취침 준비를 하고 있는 공작의 침실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루크는 신경질적으로 잇새로 욕설을 뇌까리며 문을 벌컥 열었다.
“제기랄, 제이! 이제 잘 거라고 아까….”
“헉!”
“…….”
“…저, 저기, 각하, 저기….”
“…….”
“저, 전, 각하하고, 결혼, 결혼한, 나디아라고…….”
“……나디아.”
얼어붙은 루크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듯 이름이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