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5화 > 엘레나와 집 데이트 (1)
내가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니기는 하지만, 의외로 외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매일 오전에 에스테틱에 가서 받는 힐링이야 한두 시간 정도로 끝내는 편이고, 주에 두 번 성감 마사지사로 활동하며 사모님들을 따먹는 것 역시 시간을 그리 길게 쓰지 않는다.
그렇게 에스테틱에서 나온 뒤에는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때우고, 그날그날 만날 여자를 찾아간다.
주기적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내주는 이은설과 최설아.
최근에는 점점 노출이 심한 옷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거나, 자위 영상을 보내며 쌓였으면 자기가 풀어주겠다며 유혹하는 유혜연.
모유가 땡길 때는 딸을 초등학교에 보내 놓고 집에 혼자 있는 성은영을 찾아가고.
가끔은 월차를 냈다는 식으로 갑작스레 정혜수를 찾아가 데이트와 섹스를 즐기기도 한다.
스토커 사건 때, 대학에서 만났던 여교수와도 연락처를 교환한 덕분에 달에 한두 번은 찾아가서 따먹고 있었다.
카페에도 종종 찾아가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아직은 알바생을 뽑지 않은 탓에 일하는 도중에 찾아가기가 애매했다.
어쨌든, 대부분이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 만나는 만큼 잔뜩 섹스를 즐기면서도 상대의 체력이 다하면 적당히 마무리하고, 내일도 일이 있다는 핑계로 집에 돌아와 유서연과 임예진. 둘과 함께 저녁을 먹고, 씻고, 쉬다가 자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김민아와 엘레나. 이 두 몽마가 날 외박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아는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방송을 시작해서 늦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끝내는 만큼 만나려면 시간이 저녁때밖에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잠까지 같이 자게 되는 경우였다.
그리고 엘레나는, 몽마가 되기 전부터 그랬듯이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되면 내가 직접 마중을 나가 함께 밤을 보낸다.
규칙성이 있는 듯하면서도 내키는 대로 지내는 생활 속에서 그나마 엘레나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일정을 가지고 만나는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언제나처럼 엘레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학원 앞에 차를 대고 엘레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수업이 끝났는지, 한 번에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스치듯이 내 차를 힐끔거리며 지나간다.
차가 눈에 띄는 것도 있겠지만, 매주 학원 앞에 이렇게 차를 세워놓는 사람이 학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금발 외국인 강사의 애인이라는 게 알려진 탓이었다.
선뜻 다가가기 힘든, 금발에 파란 눈동자라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밝은 웃음과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성격 덕분에 많은 이들의 도전이 있었지만, 도전에 성공한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덕분에 차를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시선 중에는 부러움 섞인 눈빛도 제법 섞여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얼마 뒤. 언제나처럼 검은색과 흰색의 오피스 정장 차림의 엘레나가 정문으로 나와 내 차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차에 올랐다.
"이번 주도 수고했어."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뭘."
엘레나는 수고했다는 말에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한다.
실제로, 엘레나는 내 노예가 된 시점에서 유서연의 지원을 받아 사업이든 뭐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본인은 지금 일하는 학원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학원 강사라는 일 자체도 자기 성향에 딱 맞다며 일을 계속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나로서는 노예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줄 생각이었으니, 본인이 원한다면 말릴 이유도 없었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거지?"
"아니, 마트부터 들르자."
네비를 켜면서 묻는 말에 엘레나가 짧게 대답했다.
평소 엘레나와의 데이트는 식사와 영화로 시작해 모텔에서 마무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엘레나의 가장 큰 취미가 영화 감상이었고, 실제로도 나와 만나기 전에는 혼자 종종 극장에 찾아가거나,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는 모양이니까.
나 역시 영화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금요일 데이트 때는 엘레나의 취향에 맞춰 영화관에서 엘레나가 원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감상을 나누곤 했었지만 오늘은 일정이 달랐다.
식당이 아닌 엘레나의 집에서, 엘레나가 해준 요리를 먹고,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볼 예정이었다.
영화는 사실 영화관에서 봐도 상관없겠지만, 엘레나 본인이 내게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어 하는 모양이라 아예 집에서 영화까지 보기로 결정했다.
유서연과 임예진은 요리에 관심 자체가 없었고, 그나마 할 줄 아는 민아도 방송 일을 시작한 뒤로는 배달이나 외식으로만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가 '직접' 밥을 차려준다는 건 꽤나 신선한 경험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지금 같은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도 남이 차려준 밥을 먹은 적이 있나 싶다.
학교나 군대에서 먹었던 급식, 방학 때 찾아갔던 무료 급식소의 배식, 배달이나 외식, 그런 것들은 제외하고, 가정식만 친다면 중고등학생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저녁을 얻어먹었던 것들이 그런 경험의 전부였다.
순수한 의미로 내게 먹여주기 위해 만드는 요리는 정말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기분이 조금 묘했다.
그나마 유혜연이 해줬던 파스타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내게 먹이기 위해서라기보단 본인이 날 잡아먹기 위한 요리였던지라 의도가 불순했었다.
엘레나가 불러주는 주소를 찍고, 곧장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인근에 있는 대형 마트.
마트에서 같이 장을 본다니. 연인을 넘어서 부부 사이에서나 할 법한 일이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데이트 컨셉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카트를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엘레나의 미모 탓인지, 그냥 카트를 끌고 같이 돌아다닐 뿐인데도 중간중간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나."
"응? 왜?"
식료품 코너 쪽으로 카트를 끌고 가면서,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걷는 엘레나에게 말을 걸자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이러는 걸 보면, 이렇게 같이 장을 보러 왔다는 상황이 즐거운 것 같았다.
"지금 우리, 남들이 보면 부부처럼 보이려나?"
"어, 어..!?"
기분 좋게 흘러나오던 콧노래가 멈추고, 엘레나의 우윳빛 뺨이 확 딸기 우유처럼 확 붉게 물들었다.
"뭐야,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거야? 민망하게."
"아, 아니이.. 나도.. 생각하기는.. 했는데에.."
내가 이렇게 직구를 확 던져버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빨갛게 물든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민망한 듯 웅얼웅얼 대답하는 모습은 연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엽다.
물론 섹스 중이라면 연상이고 뭐고 다 귀엽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렇게 기분 좋았던 거야? 막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으.. 진짜.. 다 알면서.."
"그냥 혹시나 하고 있었지."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확 빨개지는 걸 보고 확신하기는 했지만.
"누나 얼굴 엄청 빨개진 거, 알아?"
"너 때문이잖아!"
내가 실실 웃으며 한 번 더 놀리자, 이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빽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금방 아차 하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고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몰라! 빨리 따라오기나 해!"
그리고는 다시 빽 소리 지르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엘레나를 놀리면서 장을 보고, 엘레나의 집으로 향했다.
신축처럼 보이는 깔끔한 4층짜리 빌라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4층에서 내렸다.
엘레나는 비밀번호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삑삑 소리를 내며 버튼을 누른다. 전혀 나를 경계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들어와."
나름대로 오래 만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집까지 와본 건 처음이다.
엘레나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탁 트인 거실과 벽 한쪽 면을 통째로 차지한 넓은 창문이 보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 분리형 주방이 보였다.
"생각보다 넓은데?"
"안 그래도 혼자 사는데, 집까지 좁으니까 너무 답답하길래 재작년에 이사 왔거든."
신발을 벗어 똑바로 정리해놓은 엘레나가 거실로 걸어 들어가 불을 켜며 대답했다.
"월세는 좀 비싸긴 해도, 괜찮지?"
"그러게. 좋네."
나 역시, 엘레나를 따라 신발을 정리하고, 거실로 들어와 내부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제법 넓은 거실에 분리형 주방. 안쪽에 방이 하나 더 있고, 욕실 겸 화장실도 따로 있다.
서울에서 이 정도 집에서 살려면 월세가 만만치 않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주거에 쓰는 돈이었으니 과소비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검소할 것 같은 엘레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의외라는 느낌이었다.
"일단,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다녀와."
옷부터 갈아입겠다며 방에 들어가는 엘레나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고는 주방 쪽 싱크대 옆에 장본 비닐 봉투를 내려놨다.
돼지고기와 각종 야채, 버섯.. 솔직히 내용물만 봐서는 메뉴를 짐작하기가 애매했다.
호기심에 냉장고를 열어 보니, 몇몇 과일과 야채, 김치와 양념 같은 것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데, 냉장고의 내용물을 봐도 봐도 역시 메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뭐가 됐든, 고기가 들어간다는 시점에서 맛있게 먹어줄 자신이 있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아, 마실 거라도 줄까?"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엘레나가 냉장고를 열어보고 있는 날 발견하고는 살짝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살짝 헐렁한 루즈핏 긴팔 티셔츠에, 마찬가지로 헐렁한 반바지 차림이었지만 원판이 워낙 사기적인 탓에 저렇게 대충 입은 옷차림도 예뻐 보였다.
가슴이 너무 큰 탓에 조금 뚱뚱해 보이기는 했지만, 벗은 몸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냥 귀엽게 보일 뿐이었고.
"괜찮아."
"그래? 그럼 뭐.. 금방 만들어줄 테니까, TV라도 보면서 쉬고 있어."
"뭐 도와줄 건 없고?"
"괜찮으니까 쉬고 있어. 내가 해주고 싶은 거니까."
"그럼 뭐.. 아, 뭐 만들 건데?"
"비밀이야. 금방 끝나니까, 다 되고 직접 확인해 봐."
평소에도 은근히 장난기가 있는 성격이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트에서 잔뜩 놀림을 당하기는 했어도, 기분은 여전히 좋은 모양이었다.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워낙 맛없는 걸 많이 먹고 자라서 그런지, 못 먹는 것도 없고, 모처럼 남이 해주는 밥을 먹어볼 기회였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
엘레나는 자취하면서도 평소에는 거의 배달을 시키지 않고 직접 밥을 차려 먹는다고 했으니 맛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틀어놓고, 몇 번 채널을 돌려 보다가 리모컨을 내려놨다.
볼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 엘레나의 집에 처음 놀러 온 건데. TV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방을 먼저 구경해보고 싶었다.
"방에 들어가 봐도 돼?"
"들어가는 건 괜찮은데. 뭐, 이상한 거 하려는 건 아니지?"
어느새 앞치마까지 매고, 쌀을 씻고 있던 엘레나 쪽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가서 할 게 뭐 있겠어. 그냥 구경이나 해보려고 하는 거지."
"마음대로 해~"
내가 자기 방에 들어가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경계심 없는 가벼운 대답에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딱히 '여자스러운' 느낌이 드는 방은 아니지만, 침대와 함께 컴퓨터 책상과 의자, 스탠드, 창문, 수납장과 옷장.. 있을 건 다 있다는 느낌이다.
방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잠깐 컴퓨터 쪽으로 향했지만, 역시 말도 없이 컴퓨터를 뒤지는 건 조금 아니다 싶어 보류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헐렁한 옷 위로 앞치마 끈을 꽉 둘러매고, 금발의 긴 생머리를 살랑거리며 요리하고 있는 엘레나의 뒷모습이 이상하리만치 꼴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