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4화 > 다 쟤가 쓰레기라 그런 거잖아요 (5)
주말이라고는 해도 막 오픈한 시간부터 붐비는 건 아닌 모양인지, 아쿠아리움 입구는 의외로 한산해서 줄을 설 필요도 없이 곧장 입장할 수 있었다.
"언니는 수족관 와본 적 있어요?"
"중학생 때 한 번? 너무 예전이라 기억은 잘 안 나."
아쿠아리움 입구를 지나치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주변이 한적한 탓에 더 시선을 끄는 모양인지 걷는 중간중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둘 다 연예인급 외모는 기본으로 가지고 있고, 장소에 맞지 않는 오피스 정장과 폭력적인 몸매, 몽마 특유의 은근한 풍기는 색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차라리 사람이 많으면 이렇게 인파에 섞여 이렇게 시선을 받을 일이 없었지만 아직 사람이 몰리지 않은 이른 시간인 탓에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게 귀찮단 말이지.'
이렇게 눈에 확 띌 정도로 예쁘니까 좋은 거지만, 가볍게 데이트만 하려고 해도 이렇게 곳곳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야 마냥 편하게 즐길 수도 없다.
둘이라면 대충 커플이겠거니 잠시 보고 말겠지만,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쁜 여자를 둘, 셋씩 데리고 다니면 더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이런 시선은 일본에서 셋과 함께 돌아다니며 질릴 정도로 겪었지만, 거슬리는 느낌은 여전했다.
다행히도, 밝은 홀을 지나 일자의 어둑어둑한 통로로 들어오니 모여들던 시선이 금세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물고기를 신경 써서인지 조금 어두워진 조명 덕분이기도 했고, 넓은 홀 곳곳에 기둥처럼 둥그렇게 세워진 수조 안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시선을 강탈해간 덕분이기도 했다.
"와아.."
민아 역시 일본에서 돌아다닐 때는 계속 느껴지는 시선에 나보다 더한 수준으로 짜증을 냈었는데.
지금은 수조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는지 어린애처럼 감동한 표정으로 감탄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별다른 불편함 없이 자란 유서연, 임예진과는 다르게 자신처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민아는 놀이공원이나 동물원, 수족관 같은 유원지에 내심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동물원과 놀이공원에 갔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진작 데려올 걸 그랬네.'
굉장히 들떠있을 정도로 신이 나 있던 동물원, 놀이공원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살짝 감동한 듯한 표정이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양심을 쿡쿡 찔러댔다.
엘레나 역시, 중학생 때 가보고 처음이라고 말했던 만큼 민아 정도는 아니었지만 느릿하게 걸으며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것 좀 봐. 귀엽다."
"그러게요. 꼭 장난감처럼 생겼네. 그러니까.. 크라운 피쉬? 열대어의 일종이고.. 니모를 찾아서에 나왔던.. 아, 예전에 봤던 건데. 지금 보니까 똑같이 생겼네. 재밌었는데. 언니도 봤어요?"
"나도 봤지. 유명했잖아. 영화 채널에서 가끔 틀어주기도 했었고."
나로서는 별 관심도 없는 물고기에 대한 해설까지 열심히 읽어보면서, 엘레나와 감상을 주고받는다.
개나 고양이라면 모를까, 손바닥만 한 물고기가 그렇게 귀여운가 싶은 생각도 든다.
"너는? 너도 봤었지?"
"봤지. 유명했잖아."
살짝 거리를 두고 뒤에 서 있던 내 쪽을 홱 돌아보며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묻는 민아의 질문에 적당히 맞장구쳤다.
집에 TV는 있었지만 부모님 눈치를 보느라 틀어본 적도 없고, 아버지라는 작자는 뉴스나 격투기 채널 외에는 관심도 없었기에 만화나 영화, 예능 같은 건 전혀 몰라 친구들이 하는 얘기에도 거의 끼지도 못했다.
그런 말로 분위기를 깰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에 그나마 아는 척이라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저 영화가 개봉했을 때는 여기저기서 광고도 틀어주고 역이나 거리 곳곳에 포스터도 붙어있었기에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수조에 화려하게 산호를 꾸며놓은 곳에서는 한참을 멈춰서 감상하거나 사진도 찍고, 자기들 기준에서 귀엽지 않은 물고기가 나오면 '얘들은 별로 안 귀엽네.'라는 솔직한 평가와 함께 설명도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음 테마로 넘어가기도 했다.
중간에는 아예 수조 안에서 인어 코스프레를 한 직원이 수중 쇼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직원이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몸매도 별로라 물고기를 보는 것보다 지루하게 느껴져 엘레나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볍게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읏..!? 미, 민석아..?"
순간 흠칫하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놀라면서도 주변을 신경 쓰는 듯 작게 항의하는 엘레나에게 살짝 웃어주고,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조 쪽을 향하면서 아래로는 손을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읏.. 정말.. 누가 보면 어쩌려고.."
"어차피 다들 수조만 보고 있어서 눈치 못 채. 봐, 바로 옆에 있는 민아도 모르고 있잖아."
"그래도.."
사실 민아는 주변에 있는 어린애들만큼이나 수중 쇼에 빠져있었기에 모르는 게 당연한 상태였지만, 조금만 떨어져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수조 안은 더욱 밝게 조명을 틀어놓은 상태였기에 들키지 않을 거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들켜도 뭐, 적당히 사귀는 사이라 장난 좀 쳤다거나 최면으로 얼버무리면 그만이었지만.
엘레나는 불안하고 부끄러운 듯 작게 얼굴을 붉히며 작게 항의하기는 했지만, 옷 위로 가볍게 주무르는 정도였기에 경직된 자세 그대로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수중 쇼는 관심도 없었지만, 부끄럽고 불안해하는 엘레나의 표정을 구경하는 게 꽤나 즐거웠기에 아쿠아리움에 들어온 뒤로 가장 빠르게 시간이 지나간 테마였다.
"쇼는 별로 재미없었는데, 물에서 움직이는 건 재밌어 보이더라. 나중에 수영장이나 한번.."
수중 쇼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며 기분 좋게 감상을 늘어놓던 김민아는 표정이 엘레나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자마자 말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하.. 진짜.. 그새를 못 참고.. 밖에서는 좀 참으라니까.."
"그냥 가볍게 장난만 쳤어. 아무한테도 안 들켰고."
"그게 아니라.. 하.. 언니, 언니도 당하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이라도 해요."
"그게.. 나도 안 된다고는 했는데.. 안 들킬 거라고 하니까.."
대놓고 짜증을 내는 김민아에 비해 엘레나는 자기 일인데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태도다.
일단은 남들한테 안 들킬 상황에서 가볍게 만지기만 했다는 점에서 정색하고 화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안 들켰으니 그냥 넘어가 주자는 생각일 것이다.
애초에 최면에 대한 사실을 밝혔을 때를 제외하면 엘레나는 제대로 짜증조차 냈던 적이 없었기에 대충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다.
"으.. 진짜.. 자꾸 그렇게 봐주면 신나서 더 그런다니까요?"
김민아는 엘레나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충고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더 세게 나가지는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하아.. 아무튼, 또 그러면 제대로 안 된다고 거절하던가 혼이라도 좀 내요. 안 그러면 진짜 밖에서.. 끝까지 할 수도 있어요."
평소처럼 노골적으로 한마디 하려다가 주변에서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대고 있는 걸 의식했는지 목소리를 줄이고는 살짝 돌려 말하며 충고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경험담이에요."
"그, 그래..?"
엘레나가 자기 충고를 농담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자 살짝 뺨을 붉히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미 서로 알 건 다 아는 사이였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대놓고 야외 플레이까지 해버렸다고 고백하는 상황이었으니 부끄러울 만도 했다.
엘레나 역시 정말로 밖에서 끝까지 해버렸을 줄은 몰랐는지 나와 김민아의 얼굴을 번갈아 힐끔거리다가 창피해졌는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래도 아무 데서나 막 그러는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 혼자 보는 거면 몰라도, 남들한테 보여줄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하는 건 조금.."
"누나가 싫다고 하면 안 할게."
"그래..?"
"웃기고 있네. 말만 그렇게 하고 억지로 밀어붙일 거면서."
김민아의 말대로,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엘레나 쪽에서 날 혼내려는 듯 말을 꺼내길래 적당히 안심시켜 주려고 했지만 김민아가 불쑥 끼어들어 잘 끝나려던 분위기를 깨버렸다.
이렇게 되면 나도 조금은 뻔뻔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한 적은 없는데? 밖에서 할 땐 허락은 확실하게 받았잖아. 네 쪽에서 먼저 넣어달라고 할 때도 있었고."
"그건..!! 아, 아니.. 나중에 얘기해. 아무튼, 이젠 이상한 짓 하지 마. 진짜 화낼 거야."
"알았어."
김민아는 내가 뻔뻔하게 내뱉는 말에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다시 주변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낮추고는 짤막한 경고와 함께 대화를 끊어버렸다.
실제로 밖에서 할 때는 확실하게 동의를 구하거나 민아가 스스로 요구해올 때만 섹스까지 진도를 나갔지만 실상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애태우고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어 반강제로 허락을 받아냈을 뿐이었기에 당한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확실하게 허락받았을 때만 한 건 진짜야."
"으, 씨..!"
몸을 홱 돌려 다음 테마로 넘어가려는 김민아를 뒤따라가며 들으라는 듯이 엘레나에게 속삭이자 김민아는 꽉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리고, 아쿠아리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해저 터널 테마에 들어와서는 본인이 화난 상태였던 것도 잊어버린 듯 흥분을 넘어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휙휙 돌려대며 정신을 못 차리고 풍경에 빠져들었다.
수족관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로서도 부산 아쿠아리움에서 해저 터널을 처음 봤을 때는 풍경을 구경하는 데 집중했었으니 처음부터 기대하고 찾아온 김민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해저 터널을 빠져나온 뒤에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쪽을 힐끗 노려보긴 했지만, 이미 감정이 상당히 누그러졌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장 장난치기 좋은 심해어 테마에서도 아무런 장난도 치지 않고 넘어가자 한층 더 경계를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펭귄 테마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뒤뚱거리며 걷고 폴짝대며 간식을 받아먹는 펭귄들의 모습을 찍고 동영상으로 넘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민아, 귀엽지?"
"..그렇네."
김민아가 펭귄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엘레나에 귓가에 대고 몰래 속삭이자, 엘레나는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게 민아의 어린애 같은 면에 복잡한 심경이 든 건지, 내가 민아를 귀여워한다는 사실에 질투심을 느끼면서 나오는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겠다 싶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저런 어린애 같은 면은 의외로 나와 있을 때만 나오고, 평소에는 똑 부러지게 행동하는 성격이었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쿠아리움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시간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지나 점심때가 됐지만, 우리는 식사를 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곧장 다음 코스인 영화관으로 향했다.
'누나는 영화관 데이트가 해보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이번에는 엘레나의 로망을 깨지 않기 위해 민아 쪽에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영화관이 있는 층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