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3화 > 본격적인 설득은 몸으로 (5)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다."
"옛날 일이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연락 안 하고 산 지도 몇 년은 됐고. 지금은 그 인간들, 뭐 하고 사는지도 모르니까."
"잘됐네. 그런 인간들, 앞으로도 관심도 주지 말고 잊어버리고 살아."
내 말을 무조건 믿도록 최면을 걸어놓은 탓인지, 적당히 괜찮다고 둘러댄 대답에도 확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고는 드물게도 살짝 거친 말투까지 쓰며 위로를 건네줬다.
내가 괜찮다는 사실에 안심한 것과는 별개로, 내 부모들에게는 제법 화가 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평범하게 연애같은 건 못 할 것 같아. 모처럼 용기내서 고백해줬는데. 미안해."
"..아니야. 이유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괜찮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역시 용기 내서 한 고백이 거절당한 만큼 힘없이 웃는 표정에서 착잡하고 우울한 기색이 알기 쉽게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원래 안 하려던 얘기인데. 누나가 날 정말 좋아한다고 하니까, 말해야 할 것 같아."
"응? 뭔데..?"
사실 원래부터 하려고 생각해둔 내용이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적당히 고민하는 척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최면으로 내 얘기를 믿게 만들 수는 있어도,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거나 배신감을 느끼고, 겁먹는 등 감정 자체를 억누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랬다가 몽마가 돼서 최면이 풀리게 되면,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올라올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는데. 사실.. 난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내뱉은 이상한 이야기에 엘레나에게 걸어놓은 최면이 가볍게 흔들린다.
내 말을 믿는다고는 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무작정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재차 정기를 흘려보내 흔들리는 최면을 보강하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는 엘레나의 눈을 마주보며 설명을 이어 나간다.
"최면술 같은 거. 알지?"
"최면술..?"
"그런 거 있잖아.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과를 싫어하는 음식이라고, 질색이라고 믿게 한다던가. 얼음이 차가운 게 아니라 뜨거운 거라고 믿게 만든다거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말에 적당히 떠오르는대로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실제로는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쓸데없는 짓거리였지만 괜히 복잡하게 설명할 바엔 이렇게 알기 쉽게 예시를 들어주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뭔지는 알겠는데.."
이쯤 되니 엘레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지, 말끝을 흐리며 '설마..'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나도 그런 식으로 최면을 쓸 수 있거든."
"......"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굉장히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가 떨려오고, 보강해놓은 최면 역시 같이 흔들린다.
대놓고 [내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최면을 걸어놓고 대놓고 최면을 깨려는 것처럼 믿을 수 없는 얘기를 휙휙 던져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한번 흔들리는 최면을 보강했지만 내 이야기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최면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지 당황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학원에서 누나랑 만났을 때. 누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해서 최면을 걸었었어."
"그게.. 무슨.."
"화내지 말고 들어달라고.. 는 못하겠지만 너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들어줘."
물론, 당황하지 않는 것도 무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리 마음의 대비를 할 수 있도록 말 정도는 미리 해뒀다.
그렇게 말하면서,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라고 새롭게 최면을 걸어둔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도망치는 일은 없었지만 제대로 참고할 만한 표본이 민아 한 명밖에 없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미리 대비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도망가려는 걸 내가 직접 붙잡아 막는 것보다는 엘레나 스스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차분하게 생각해봐. 누나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학습 의욕 증진 프로그램을 보고 왔다고, 해달라고 부탁했었잖아."
"응.. 그랬지..?"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 학원에서 공부하려는 의욕을 늘려주려고 모의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펠라를 해주고, 섹스까지도 해준다는 게."
"그게 무슨.. 아니.. 어..?"
내가 직접 설명까지 덧붙여 이야기를 꺼내주고 나서야 위화감을 눈치챈 듯, 혼란스러운 표정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눈동자가 크게 떨려온다.
상황이 이쯤 되면, 나라도 심장이 거칠게 쿵쿵 뛰어댈 정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다.
김민아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당장 여기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거나 아예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절해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엘레나는 민아 때와는 달리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흔들리는 멘탈을 진정시키려는 듯 눈을 감고 가쁘게 올라오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하기 시작했다.
'민아 떄보다 더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민아는 평범하게 기가 센 편이었고, 엘레나는 조금 부드럽고 유약한 인상이 있었으니까.
그런 내 예상을 뒤집고, 오히려 꽉 주먹 쥔 손을 가늘게 떨면서도 조금씩 감정을 가라앉히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심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혼란스러워서 날뛰었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탓이었다.
'안 되겠다.'
원래는 이렇게까지는 최면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최민석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본래라면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그동안 최면을 사용해 남의 생각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최면에 성욕을 더해 상대의 심리를 손에 잡힐 듯 읽어왔던 탓인지 그 당연한 일이 굉장히 불안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1분 정도가 더 지나고 나서야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떨림이 가라앉고, 꾹 감겨있던 엘레나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믿기 힘들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했어. 당황스럽고 화는 나지만.."
스스로 말하면서도 아직 제대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는지, 잠시 말을 흐리며 다시 한번 꽉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려오는 게 보인다.
우리 애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한 성격 하는 편이다 보니 몰랐는데, 평소에 착하고 나긋나긋한 사람이 화가 나면 왜 무서운 건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어쨌든, 먼저 고백해줬으니까."
최면에 걸려있는 동안 나와의 관계에서 쌓인 호감과 애정이 분노에 브레이크를 걸어주고, 스스로 진실을 고백했다는 사실이 엘레나의 기준에서는 나름대로 참작해줄 만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후우, 하고 짧게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감정을 가라앉힌 엘레나는 여태 보지 못했던 착 가라앉은, 그러면서도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눈빛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하고싶은 말은 이것저것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 물어볼게. 그냥 숨기고 있어도 괜찮았을 텐데. 왜 밝힌 거야?"
말투 역시, 평소와는 달리 굉장히 차분하면서도 단호하다.
민아에게도 사실을 밝힌 직후에 들었던 질문.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제대로 진심을 부딪힐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게 더럽게 이기적이고 상식에서 어긋난 진심일지라도 말이다.
"누나가 갖고 싶어서."
"뭐..?"
"최면으로 어중간하게 만들어놓은 관계 말고, 진심으로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평생 나만 바라보게, 완전히 내 걸로 만들어놓고 싶어."
민아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지만 좀 더 노골적인 말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자 엘레나는 순간 움찔하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최면으로 수많은 여자를 가지고 놀아놓고 진심을 원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가볍게 즐기는 관계가 아닌 진짜 내 여자라고 할 만한 여자들은 순수하게 날 좋아해 줬으면 하는 삐뚤어진 마음이 있었다.
엘레나는 당황하다가도 금세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뽀얀 우윳빛 피부가 희미하게나마 붉게 물들어있는 게 보였다.
'떡정이라는 것도 무시는 못 하니까.'
애초에 엘레나가 내게 품은 호감과 애정 자체가 꾸준히 몸을 섞고, 친밀감을 쌓아가며 만들어진 감정이었기에 마음보다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그렇게 몸을 섞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점점 더 잘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생긴 감정이기도 했으니 어느 쪽이라고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엘레나는 희미하게 뺨을 붉히면서도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려는 듯 다시 한번 짧게 후우, 한숨을 쉬고는 눈을 똑바로 마주쳐온다.
"진심이라는 건 잘 알겠지만..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야. 최면.. 으로 사람을 속여서 몸을 뺐었으면서 이제와서 진심으로 좋아해 달라고 하는 건.."
"뻔뻔하다는 건 알아."
본인은 나름대로 단호하게 대답하려고 했겠지만, 표정이나 말투, 목소리에서 감정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게 느껴진다.
지금은 더 제대로 밀어붙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에 엘레나의 말을 끊고 한층 더 뻔뻔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이해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난 평범하게 누구랑 사귀고, 결혼하는 것 같은 건 못 하겠으니까."
순간. 엘레나의 눈빛에 희미하게 동정심이 스쳐지나갔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미리 밑밥을 뿌려놓은 것이 조금이나마 효과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억지로 강요하는 게 아니야. 누나가 싫다고 하면 바로 포기할 거고, 나랑 완전히 관계를 끊고 싶다고 말하면 그렇게 해줄 거야.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아쉽긴 하겠지만, 누나한테 진심을 보여줄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으...."
결국, 차분함을 유지하려던 엘레나의 표정이 흐트러지며 고민스러운 기색이 드러난다.
내 말들이 전부 진심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만큼 같은 말을 들어도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구나' 같은 식으로 더 깊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에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누나."
"으, 응..!?"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고 있던 엘레나는 내가 대뜸 자신을 부르자 흠칫하고 크게 몸을 떨며 놀란 목소리로 대답한다.
당황해서 그런 거겠지만, 지금만큼은 평소와 별다를 게 없는 자연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표정을 관리할 여유조차도 없을 정도로 당황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정말 본격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생각에 아예 손을 뻗어 엘레나의 양쪽 어깨를 살짝 아플 정도로 강하게 붙잡으며 떨리는 두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읏.. 가, 갑자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하다는 건 알아. 그래도 누나를 좋아하고, 내 걸로 만들고 싶다는 건 정말 진심이야. 화난 것도, 배신감 느끼는 것도 알고 있어. 그래도 이거 하나만 솔직하게 대답해줘. 정말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싫어졌어?"
"그, 그런 건.. 아닌.. 데.."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감정을 숨기는 것도 안 된다는 최면 덕분에 엘레나는 희미하게 붉어져 있던 두 뺨을 한층 더 붉게 물들이며 어쩔 수 없이 대답해 버린다.
그 대답에 한층 더 기세를 얻어, 그대로 엘레나의 어깨를 붙잡은 채로 밀어 침대 위로 가볍게 자빠뜨렸다.
"꺗..! 자, 잠깐..!"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 누나. 앞으로는 절대 속이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부탁할게."
"으읏.."
엘레나의 양쪽 어깨를 억누르고 내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두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하자 엘레나의 표정과 눈빛이 한층 더 곤란하고 고민스러운 기색을 띤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민아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득을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