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8화 > 건방진 여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4)
이은설의 높은 자존심의 원인은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주변 환경 탓이다.
집은 부자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은설을 부족함 없이 키울 정도는 됐고, 이은설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부터 귀여웠던, 하나뿐인 딸을 사랑과 함께 오냐오냐하며 키웠다.
귀여운 외모 탓에 부모님만이 아닌 친척이나 주변 어른들에게도 귀여움받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중학생이 됐을 때쯤에는 같은 여자들 사이에서 적이 조금 늘었지만, 이은설이 보기에는 자신보다 한참 딸리는 것들이 한심하게 질투나 한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다.
어차피 자신과 급이 맞는 예쁜 친구들은 쉽게 사귈 수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공학에 다니며 한창때의 남자애들에게 거의 여왕님처럼 떠받들어지며 지낼 수 있었으니까.
스스로가 보기에도 자신의 외모는 연예인을 해도 될 정도로 예뻤고, 한국인답지 않은 섹시한 몸매에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놀기만 하느라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지만, 요즘 세상에 자신 정도의 외모라면 먹고사는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외모를 살려 먹고 살 수 있는 길.
인터넷 방송이나 연예인, 배우, 모델 같은 직업은 그녀의 높은 자존감을 채우기에도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듣기 좋은 직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 방송은 너무 싸 보이고, 시청자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연예인이나 배우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아예 어릴 때부터, 혹은 중고등학생 때부터 열심히 노력해온 이들과 경쟁하는 건 힘들 것 같아 선택한 게 모델이었다.
결국 가장 편하고 쉬울 것 같은 길을 골랐을 뿐이지만,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어쨌든, 이은설은 자신이 모델로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모델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나 몸매 덕분에 아무 경력도 없는 신입 때부터 나름대로 대우를 받으며 돈을 벌었고, 부모님의 품을 떠난 뒤에도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모델 업계에 들어가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27살이 된 지금도 이은설은 모델로서 '성공했다'라고 할 만한 위치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20대 초반부터 어지간한 직장인보다 많은 돈을 벌게 되면서 씀씀이만큼은 비교도 못 할 정도로 커졌다.
자취라고는 해도 허름한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기에 월세만 100이 넘는 고급 오피스텔에서 생활했고, 옷이나 화장품도 어느 정도 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만 소비했다.
거기에 숍에 다니며 관리를 받고, 이런저런 생활비를 더하니 저축은 거의 되지도 않고 아슬아슬하게 생활만 유지하며 나이를 먹어갔다.
그렇게 27살이 됐고, 내년이면 28이라는 나이가 된다는 현실을 마주하니 슬슬 위기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위기감 자체는 몇 년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높은 자존심이 그걸 인정하지 못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초조함을 느끼면서 페이가 높지만 자존심이 상해 하지 않았던 속옷 모델 쪽으로도 발을 들여 돈을 더 벌기는 했지만 상황이 딱히 나아진 건 아니었다.
그렇게 초조함을 느끼면서도 변화 없이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제안을 받게 됐다.
"언니, 스폰 받아볼 생각 없어요?"
스폰 제안 자체는 많이 받아봤다.
광고나 협찬을 노리고 만든 인스타로도 스폰을 받지 않겠느냐는 DM이 심심찮게 날아오고, 일하는 와중에도 몇몇 관계자들에게 그런 제안을 받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제안들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에 고민조차 하지 않고 전부 거절했다.
고작해야 달에 300, 500밖에 되지 않는 액수에 자신의 몸을 판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돈을 받게 되면 생활에 상당히 도움이 될 테고, 나름대로 저축도 할 수 있겠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리고 성인이 된 뒤에는 반쯤 고집처럼 지켜온 자존심은 돈 몇 푼에 몸을 판다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제안은 달랐다.
우선, 제안을 건넨 상대가 여자라는 것부터 달랐다.
임예진. 나이는 스물다섯으로 자신보다 한 살 어리고, 모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이었다.
하지만 경력이 없고, 나이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해서 다른 모델들처럼 그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임예진은 신인이었지만 미모와 몸매에서 오는 존재감부터가 달랐고, 같은 여자마저도 얼굴이 화끈거리게 할 정도로 알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질투를 떠올리기도 전에 감탄부터 나왔고, '정말로 성공하는 건 이런 애들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였다.
그런 임예진이 자신을 불러 스폰을 제안했을 때는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하는 스폰 제안이라니.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진정하고 임예진의 설명을 들어보니 금방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동생이 있는데. 걔가 스폰 상대를 구한다고 학원 쪽에 괜찮은 사람 없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조건이 좋아서 제가 해도 좋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너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걔도 딱히 절 여자로 보는 느낌은 아니라서요. 그래서 언니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원래라면 이런 얘기는 고민할 틈도 없이 바로 거절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건네는 상대가 임예진이라는 것과 그녀가 말하는 '좋은 조건'이 신경 쓰여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걔가 집이 잘살아서 여기저기 연줄이 있는데. 여기 학원 쪽에도 연줄이 있다고, 스폰받는 상대한테는 학원 쪽으로 들어오는 일거리를 넘겨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좋은 것들 위주로요."
돈이라면 모를까, 좋은 일거리를 꾸준히 넘겨준다고 하니 조금은 혹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이런 제안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마지막 기회라는 것처럼 느껴졌고, 이걸 받아들이면 지금 생활에서 벗어나 모델로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임예진이 아는 동생이라면 20대 초반일 텐데. 못생기고 배 불룩 나온 기분 나쁜 아저씨들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모델들 사이에서는 스폰이라는 게 대놓고 드러낼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공공연한 비밀 같은 일이었기에 어떤 식으로 스폰이 이뤄지는지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가벼운 데이트와 섹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해진 스폰 금액만이 아닌 값나가는 선물도 받을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해 거절하고 있었을 뿐이지, 스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 자체에는 건너 건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욕심이 생겼었다.
그러는 와중에 돈이 아닌 '성공'이라는 보상이 따라오니 자존심 높은 이은설로서도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협한 뒤에도, 자신이 아닌 적당히 반반하기만 하지 별것 없다고 생각했던 최설아가 선택받았다는 어이없는 결과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평소처럼 그냥 보는 눈 없이 한두 살이라도 어린 여자를 골랐다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스스로의 자존심과 타협까지 했을 정도로 탐나는 보상이 눈앞에서 멀어진 탓에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최설아가 점점 일거리를 늘려가다 전속 계약까지 마쳤을 때. 초조감이 극에 달해 결국은 자신 쪽에서 스폰을 원한다고 재차 자존심을 접고 손을 뻗어버렸다.
그렇게 자존심을 접고 스폰을 선택했으니, 첫 만남에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닌 최설아를 선택한 남자에게 달라붙어 스폰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이 불쾌하고 거슬릴 수밖에.
'..못생겼을 줄 알았는데. 잘생기긴 했네.'
그게 최민석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임예진도 최설아도, 최민석에 대해 말해주는 게 꺼려졌는지 못생기지는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잘생겼다고 했던 탓에 겨우 평균이나 되나 싶었는데.
자기가 직접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가 카페에 앉아있었기에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최민석이 잘생겼다면 자신은 예쁘다.
자신이 스폰받을 상대가 못생긴 남자가 아닌 잘생기고 젊은 남자라는 사실에서는 약간 안심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스폰이라고는 해도 결국 서로 원하는 걸 주고받는 거래 관계일 뿐이었으니,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바램과는 달리, 최민석과의 만남은 인생에 이런 경험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남겨버렸다.
본인도 실수한 건 알았는지 제대로 사과하고 비위를 맞춰주려는 게 보였지만 이미 자존심이 상한 와중에 그게 쉽게 풀릴 리도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최민석은 자신을 배려해준답시고 계속해서 자존심을 툭툭 건드리며 자극해댔고, 이러저리 휘둘리듯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쏴아아-.
어느새 화려한 호텔 욕실에서 멍하니 샤워기를 맞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캉스랍시고 호텔에 몇 번 와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남자와 함께 온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
높은 자존심 탓에 자신과 급이 맞는다고 생각될 정도의 남자를 만나지 못한 최설아는 섹스는커녕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대뜸 스폰 관계가 되고,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호텔까지 와버렸으니 겁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그냥 집에 간다고 했으면.. 아니, 아니야.'
머리에는 물이 묻지 않도록 수건으로 머리를 묶은 채로 물을 맞으면서, 쿵쿵 울려대는 심장 소리와 함께 자꾸만 떠오르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텔까지 와서, 샤워까지 다 하고 나와서 못 하겠다고 도망쳐버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스폰만 받으면.. 성공할 수 있으니까.'
불안감에서 도망치듯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손잡이를 돌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을 끊었다.
샤워는 진작에 끝냈지만 마지막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기에 더는 시간 끌지 않기로 확실하게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욕실 벽에 걸린 커다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탈의실에 걸린 새하얀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 씻었어요."
"아, 네. 그럼 저도 씻고 오겠습니다."
욕실에서 나와 침대가 아닌 야경이 보이는 창가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던 최민석에게 보고하듯 짧게 말하자 최민석은 데이트할 때와 마찬가지로 태연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자신을 지나쳐 간다.
'....그게 다야?'
순간. 그의 시선이 가운을 걸치고 있는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긴 했지만,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의 노골적이고 기분 나쁜 시선에 비하면 정말 가볍게 보기만 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성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봤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빴겠지만, 이렇게 막 씻고 나와 준비를 마친 자신을 보고도 별다른 성욕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은근히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덜컥.
이은설은 최민석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천천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몰카 같은 건 없겠지..?"
그런 데는 관심 없다고. 확실하게 대답을 듣긴 했지만 그런 말 한마디로 믿어줄 수는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방 곳곳을 돌아보며 몰카를 찾아봤지만,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후우.. 어..?"
몰카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으려던 이은설의 눈에 최민석이 만지고 있던 핸드폰이 창가 앞 탁상에 놓여있는 게 보였다.
"......"
남의 핸드폰을 훔쳐보는 건 매너가 아니다.
그 정도 상식은 당연히 가지고 있었지만, 혹시나 그가 임예진이나 최설아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신경을 끊을 수가 없었다.
볼까, 보지 말까.
그런 고민을 떠올리기를 잠시. 이은설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욕실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핸드폰이 놓여있는 탁상으로 거침없이 다가가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그렇겠지."
핸드폰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잠금이 걸려있었기에 곧장 미련을 접고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거면 보려고 하지 말걸. 괜히 양심에 찔리는 일만 해버렸다는 생각에 스스로 기분이 나빠져서는 말없이 최민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를 마친 최민석이 탈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