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7화 > 건방진 여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3)
예약은 따로 해놓지 않았지만, 예약 없이 가더라도 수준이 괜찮은 가게는 많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은설은 '조금 싸지만 맛있는 가게' 같은 곳에는 관심이 없을 것 같아 최대한 외관부터 비싸 보이는 가게를 골라 들어갔다.
차에서 내려 마치 평가라도 하듯 가게 외관을 둘러본 이은설은 내 사과를 받고 기분이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나쁘지 않네' 같은 표정으로 짧게 감상을 마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예약을 안 해놔서 최대한 괜찮은 데로 오기는 했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괜찮네요."
"따로 좋아하는 메뉴는 있으세요? 다음에는 은설 씨 취향에 맞춰서 고르겠습니다."
"너무 기름진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은설 씨는 취미가.."
"운동이랑 영화 보는 거예요."
"가족 관계는.."
"맞선 보러 온 거 아니잖아요?"
식사 내내 오가는 대화는 다 이런 식이었다.
말없이 먹기만 하는 이미지를 심어주기는 싫은 건지, 아니면 대답 정도는 해줘도 괜찮을 정도로 기분이 풀어진 건지.
말을 걸면 대답 정도는 해주지만 대부분이 성의 없는 대답이었고, 나중에는 기가 살았는지 대답하기 싫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대화가 오가는 식사를 마치고, 마무리로 차를 마시면서 본론에 들어갔다.
"은설 씨."
"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말해보세요."
내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경계하면서도 허락해준다는 듯 새침하게 내뱉는 말에 내심 웃음을 흘리며 생각해뒀던 말을 입 밖에 냈다.
"예진이한테 소개를 듣기로는 은설 씨는 속옷 모델 쪽 일을 많이 받으신다고 들었거든요."
"..그런데요?"
"그쪽은 다른 촬영보다 페이가 센 편이라 생활에 여유가 있을 거라고 들었는데, 굳이 돈을 더 요구하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자기 몸값이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돈이 필요해서 요구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카페 때와는 달리 조용하게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마시며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낸 탓인지 아까처럼 대뜸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벌써부터 미간이 살짝 좁혀지며 기분이 언짢아졌다는 티가 나고 있었다.
"그쪽은 개인 사정이니까 억지로 대답해달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냥, 뭐예요?"
대답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은설을 위해 살짝 말끝을 흘리며 미끼를 뿌리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미끼를 물고 계속 말해보라며 재촉해왔다.
"어쨌든 돈이 필요하시면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하, 아까는 제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제와서.."
"당장은 그렇겠죠. 하지만 은설 씨도 기회만 잡을 수 있다면 설아 씨처럼 충분히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
어이가 없다는 듯 매섭게 따지려던 이은설의 말이 멈추고,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굳어진다.
최설아와 비교당하는 건 여전히 기분 나쁘지만, 나머지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말이었고, 인정해주는 만큼 돈을 주겠다는 말이었기에 고민되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이대로 받게 해줄 생각은 없지만.'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은설이 고민도 하지 않고 대뜸 알겠다며 받아들이기 전에 생각해뒀던 최면을 집어넣는다.
[최민석이 하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지만 아직 날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 건 아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돈이 없어 보이니 안타깝다고 동정하는 쪽에 가깝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가치를 인정받아서 스폰을 받는 게 아닌 동정심을 유발해 적선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고, 스스로를 싸구려로 만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존감도 높은 만큼 그쪽 방면을 자극하는 최면은 막힘없이, 아주 매끄럽게 이은설의 내부로 스며들어 갔다.
최면이 들어간 순간. 이은설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지고, 열 받는다는 듯 눈살이 찌푸려졌다.
"..됐어요.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럼.."
"저, 그렇게 자존심 없는 여자 아니에요. 그쪽.. 민석 씨 말대로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데 돈만 받을 정도로 뻔뻔하지도 않고요."
설마 자기 입으로 직접 자존심 운운하며 거절할 줄은 몰랐지만,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정말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뜻이리라.
물론 뻔뻔하지 않다는 말에는 무심코 웃어버릴 뻔했지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어쨌든, 카페에서 했던 말은 진심이라고 하셨잖아요?"
"..알겠습니다. 제가 또 실례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뒤늦게 이은설의 기분이 언짢아졌다는 걸 눈치채고 사과하는 척까지 아주 매끄럽게 이어졌다.
거기에 다시 한번, 내가 생각하는 이은설의 가치에 대한 말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으니 지금쯤 자존심을 지켰으면서도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상태일 것이다.
물론 이대로 마냥 자존심만 상하게 할 수는 없으니, 동기 부여도 살짝 넣어준다.
[최민석에게 인정받는 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고 싶다. 그가 내 가치를 인정하게 만들고 싶다.]
"..사과는 받아들일게요.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 말은, 아까 했던 사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애초에 이은설이 사과를 받아주는 건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애써 차분하게 대답하면서도 최면에 걸린 줄도 모르고 의욕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이 만족스러운 덕분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갈까요? 먹고 바로 돌아다니는 것도 좀 그러니까, 이번에는 영화라도 보러 갈까요?"
"..상관없어요."
"가죠."
좋다는 말 한마디조차 쉽게 해주지 않는 고집 역시 마음에 들어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지어졌다.
데이트 코스로 영화관은 너무 뻔하다는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영화관만큼 편하고 무난한 곳도 없었으니 성의 없이 고른 코스를 적당히 양보받은 셈이었다.
영화관에서는 적당히 최근에 크게 인기를 타는 영화를 골라 상영관에 들어갔고, 살짝 선을 넘는다는 느낌으로 이은설의 위에서 살짝 잡아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연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들이 보기에나 그렇게 보일 뿐, 서로가 서로에게 별 감정이 없는 상태였지만, 이은설에게는 내가 자신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처럼 느껴진 모양인지 거부하지도 않고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그 뒤에는 카페에 들러 잠시 숨을 돌리고, 우리 애들과 했던 것처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즐겼다.
물론, 아직 이은설에게 무언가를 선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최민석이 선물을 주는 것 역시 가치를 인정받지 않고 돈만 받는 것이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라고 최면을 걸었다.
그 덕분에, 이은설은 이것저것 옷을 입어 보면서도 대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넘겨버리고, 그나마 마음에 든 한두 벌도 내가 사겠다는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직접 결제했다.
최면으로 상대를 가지고 노는 와중에도 여자의 쇼핑에 따라다니는 건 제법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렇게,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무난하게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평범한 데이트라면 슬슬 헤어져야 할, 그녀를 집에 데려줘도 이상할 게 없는 시간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연애가 아닌 스폰 관계다.
서로가 좋아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지원을 받고 남자와 어울려주는 거래 관계였고, 만남의 마무리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는 암묵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이은설도 어린애가 아닌 만큼 그 정도는 알고 있는 모양인지, 레스토랑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사이 조금씩 긴장하고 있다는 게 말없이 앞만 보는 표정에서 전해져왔다.
연애 경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폰이 처음인 건 확실했으니.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몸을 섞는다는 게 긴장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타세요."
"......"
주차장에서 차키 버튼을 눌러 잠금을 풀며 말하자 이은설은 긴장을 풀지 못하고 말없이 문을 열고 운전석 옆자리로 들어간다.
이 자존심 센 여자도 섹스 앞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속으로 웃음을 흘리면서 나 역시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은설 씨."
"..네."
지금까지는 언짢은 티를 내기 위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면, 지금은 긴장해서 대답을 망설였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집까지 태워다 드릴 테니까, 주소 좀 불러주실래요?"
"..네?"
이번에는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투로 되묻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실 때 차 안 끌고 오셨잖아요. 집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아니, 그게...."
이 뒤에 당연히 모텔로 들어가 섹스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은설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며 눈치를 살핀다.
오늘 봤던 모습 중에 가장 여자답고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진짜 의도는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기에 이번에도 이은설이 대답하기 전에 빠르게 최면을 걸었다.
[오늘 최민석은 나와 섹스할 마음이 없다. 오늘 내 기분을 상하게 한 걸 미안하게 생각해서 배려해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스폰 관계에서 섹스를 하지 않고 헤어지는 건 지원 받은 것을 돌려주지 못하는 뻔뻔한 행동이다. 최민석은 나를 배려해주려고 하고 있지만, 이건 또 나를 자존심 없고 뻔뻔한 여자로 만드는 일이다.]
본인이 했던 말 그대로, 자존심 없고, 뻔뻔한 여자라는 키워드를 넣어 최면을 걸자 당황하고 있던 이은설은 작게 흠칫하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민석 씨."
"네?"
오늘 처음으로, 이은설 쪽에서 이름을 불러주고, 대화까지 시작했다.
나름대로 기념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은설의 굳어진 표정을 보면 대놓고 웃을 수도 없어 속으로만 웃으며 갑작스럽게 변한 태도에 당황한 척 짧게 되물었다.
"낮에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그렇게 자존심 없고 뻔뻔한 여자는 아니라고요."
"..그랬었죠."
"그러니까, 이런 쓸데없는 배려는 그만해주세요. 민석 씨는 나쁜 의도가 아닐지 몰라도,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에요. 이런 거."
"음.... 기분 나쁘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오늘은 제가 여러모로 실례도 저질렀으니까...."
"그것도, 제가 사과 받아들인다고 말씀드렸었죠?"
한층 더 당황한 척, 말끝을 길게 늘이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자 이은설은 한층 더 단호하게 말을 내뱉는다.
이제는 자기 쪽에서 날 모텔로 끌고 가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조심한다고 조심한 건데, 제가 또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아시면 됐어요."
흐름이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이렇게 이은설에게 오늘 반드시 나와 섹스하고 말겠다는 의욕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