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6화 > 건방진 여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2)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갈게요."
일단이라. 나중에라도 불만이 생기면 다시 따지겠다는 얘기일까.
최면 자체는 내게 스폰을 받고 싶다는 것 정도밖에 걸려있지 않다 보니 사소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대신, 이 부분은 확실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말씀하세요."
이 뒤에 이어질 내용도 딱히 기분 좋을 만한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어보고 싶어 순순히 말을 받아줬다.
"몰카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촬영은 절대 금지. 혹시라도 이상한 소문 나면 안 되니까 비밀 유지도 확실하게 해주시고, 아무리 스폰 관계라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제안이고 상대 쪽에서 먼저 요구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태도가 마치, 자기가 나보다 윗사람인 것처럼, 하나하나 가르치는 듯한 말투라 나도 모르게 멍하니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렇긴하죠."
내가 자기 말에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있자 기분이 상한 건지, 살짝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하기까지 한다.
자기 말투가 남들한테 어떤 식으로 느껴지는지는 전혀 모르는 걸까.
하기야, 저 정도 얼굴에 몸매면 조금만 정색하고 다녀도 주변에서 알아서 눈치를 보고 떠받들어줬을 것이다.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창 여자에 미쳐있을 10대, 20대 초반의 남자들이라면 그랬을 게 분명했을 테니 저런 태도도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모델이라는 특이한 업계에서만 지냈으니, 얼굴과 몸매만으로도 기본적인 대우는 받았을 테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기본적인 매너는 다 지킬 겁니다. 설아 씨한테 듣지 않으셨나요?"
"..그냥 매너도 좋고 성격도 괜찮은 사람이라고만 들었거든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표정도 말투도 전혀 죄송하다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뭘 이런 걸로 따지냐는 듯 기분이 불편해진 것처럼 보였다.
"저도 몰카 같은 건 관심도 없고, 사진은 설아 씨랑 있을 때는 몇 번 찍긴 했는데. 싫다고 하시면 자중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협조적으로 맞춰 주니 그 이상 까칠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는 말도 짧아졌다.
아직도 요구할 게 남아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게까지 한 태도는 도무지 얘기하는 내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일거리를 따로 준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액수는 지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얼마나요?"
"많이는 안 바래요. 달에 300씩만 주세요."
많이는 안 바란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액수가 크다.
분명 최설아나 임예진의 말에 따르면 기본이 달에 300 정도고, 더 받으면 달에 500씩도 받는다고 했었다.
당장 촬영 한 번으로 들어오는 액수가 꽤 되다 보니 스폰으로 얻은 일거리만 하더라도 300보다는 더 큰 액수일 테고, 그러면서 생기는 시간적 여유나 경력 역시 모델로서는 가치가 클 텐데.
이은설은 도대체 자기 몸값이 얼마라고 생각하길래 일거리를 받으면서 300을 더 받으려고 하는 걸까.
이렇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제안을 듣고 나니 이은설이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임예진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흐음.."
이은설에게 달마다 300씩 추가로 용돈을 주는 것 정도는 부담되는 일이 아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유서연이 주는 거겠지만 어차피 유서연의 것이 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부담되고 아니고를 떠나서 당장 이은설에게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로서는 지금까지처럼 시원시원하게 넘어가 주고 싶지가 않아 일부러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정 힘드시면, 그 정도는 안 해주셔도 괜찮고요."
내가 고민하는 척 대답을 망설이자 이은설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화제를 넘겨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표정과 목소리에서는 '그 정도도 못 해줘?'라고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려는 듯한 분위기가 풍겼다.
"..제 입장에서는 모처럼 연줄도 있겠다, 모델분들을 스폰해드릴 거면 이런 식으로 도와드리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해드린 거지. 딱히 300이 힘든 건 아닙니다."
"그럼.."
"그런데, 그거랑은 별개로. 저로서는 당장 은설 씨가 그 정도까지 해드릴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는 확신 못 하겠네요."
"무...."
무슨, 그 짧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듯, 이은설은 순간 얼굴이 확 붉어지며 자기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린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다면 본인이 그 정도 대우는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제안이었을 테니 당황스러울, 아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그게, 무슨.."
"그러니까."
거의 10초 가까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당황을 수습하고 굳은 표정으로 따지려는 이은설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었다.
"은설 씨가 예쁘다는 건 보면 압니다. 제가 모델분들을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은설 씨 정도 되는 분은 드물죠."
"그런데.."
"근데,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장 설아 씨만 하더라도 인지도만 없었지 은설 씨한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예쁘고."
"......"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말을 끊어먹고, 최설아를 언급하며 이은설의 자존심을 가볍게 긁어주자 겨우 가라앉혔던 열기가 다시 올라오는 듯 재차 얼굴이 붉어졌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은설 씨가 예쁘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모델로는 인지도가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수준이잖아요? 설아 씨는 이제 전속 계약도 했는데."
"그건.. 그쪽이.. 스폰을.. 해줬으니까.."
이제는 민석 씨가 아니라 '그쪽'이 돼버렸다.
지금까지도 딱히 예의를 차렸다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이제는 예의를 차려주기 힘들 정도로 열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제가 보기에 지금 은설 씨는 설아 씨보다 크게 나은 점이 없다는 겁니다."
덜컹!
아예 확실하게 못을 박아버리는 말에 이은설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의자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섰다.
순간 카페 안의 시선이 확 몰려들었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벌게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가늘게 떨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열 받은 모양이었다.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됐어요."
이은설이 카페에 들어온 뒤로 아무런 최면도 걸지 않았으니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은설은 의외로 심호흡까지 하며 화를 삭이고는 다시 의자를 당겨 맞은편에 앉았다.
최설아와 비슷하다고, 더 나은 점이 없다고 말했던 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던 걸까.
다소 취향 차이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돈은, 안 받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스폰은, 일거리는 꼭 받고 싶다는 걸까. 아마도 그게 자존심까지 접으며 분을 삭이고 다시 내 앞에 앉은 이유일 것이다.
애써 화를 삭이며 하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속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정 필요하시면 드릴 수는 있습니다."
"..됐어요."
이번에는 되려 내 쪽에서 돈을 주겠다고 미끼를 들이밀자 아주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이제 와서 받겠다고 하기에는 더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내 단호하게 거절해버렸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확실하게 해둬야 할 것 같았거든요."
"....알았어요."
이은설과 마찬가지로,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사과하고는 말 자체는 진심이었다고 다시 못을 박아버렸다.
그게 어지간히도 열받았는지, 살짝 움츠린 어깨가 가늘게 파르르 떨려올 정도였다.
"주변 시선도 신경 쓰이고, 일단 나갈까요? 점심은 아직이시죠?"
"..네."
"그럼, 나머지는 식사하면서 마저 얘기하죠."
이번에는 이은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은설은 분한 듯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말없이 일어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가서 잠금을 풀고 차에 타려고 하니 순간 화난 것도 잊어버린 듯 빠르게 눈을 굴려 차를 훑어보는 모습이 보였다.
'차도 잘 아나 보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화가 덜 났던 건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계산적인 성격이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순간이나마 차 한 대에 굳어있던 표정이 풀어졌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나도 쥐뿔도 없는 가난한 시절을 겪어왔기에 돈이 얼마나 큰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라면 억은 무슨, 그냥 100만 원에 뺨 한 대 맞으라 그러면 웃으면서 맞아주고 반대쪽 뺨도 때려달라고 내밀었을 테니 이은설의 반응이 한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잠깐이나마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는 게 스스로도 자존심 상한다는 듯 다시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옆좌석에 타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세구나 싶었다.
머릿속에서 아예 돈 생각을 지워버리고 날뛰는 건 돈 걱정이 필요 없는 부자거나 진짜 분노조절 장애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로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럼 초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괜찮게 하는 곳을 알고 있거든요."
"..상관 없어요."
보통 데이트 중에 여자가 '아무거나'를 찾으면 남자로서는 심히 곤란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은 이은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기에 내 쪽에서 멋대로 결정해버렸다.
개인적으로 여자를 만날 때는 초밥이나 파스타가 호불호 없이 잘 먹히는 메뉴였고, 초밥은 나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생각하기 귀찮을 때는 초밥을 고르곤 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침묵 속에서 차를 몰다가, 이은설 쪽을 보지도 않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은설 씨."
"..네."
대화하기 싫다는 듯,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 보통 남자라면 여기서 움찔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됐어요."
하지만 그런 속내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정중하게 사과하며 살짝 저자세로 나가자 이은설도 여전히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과를 받아준 건 아니고, 됐다고 넘겨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앞으로도 자주 볼 사이인데. 이렇게 분위기 안 좋게 시작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조금만 기분 풀어주세요."
"..알겠어요."
이번에도 단답. 사과를 받아줄 생각은 없지만 조금 정도는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는 걸까.
뭐가 기준인지 모를 제멋대로인 대답에 내심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티 내지 않고 넘겼다.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으니, 일단 지금은 다시 자존심을 회복시켜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