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화 > 건방진 여자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1)
최설아와 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임예진을 방으로 불러 이은설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은설이요? 안 그래도 여쭤보려고 했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설아 씨한테 들었어. 자기도 스폰받고 싶은 건지 이것저것 물어봤다던데?"
"아아.. 그 언니 참.. 어지간히도 급했나보네.."
"무슨 일인데?"
내 대답에 다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곧장 되물었다.
"어제가 설아 계약하고 첫 촬영이었잖아요."
"그랬지."
촬영 때 입었던 옷을 받아와 모텔에서 보여주고, 입혀놓은 상태 그대로 즐겼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게 신경 쓰였는지, 어제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주인님이 한 명 더 스폰할 생각은 없냐고."
"한 명 더?"
"돈 많은 사람들이야 애인 여럿 두듯이 여러 명 스폰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으니까요. 아마 먼저 설아한테 주인님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저한테 물어본 거겠죠."
"흐음.. 그래? 여러 명 스폰하는 경우도 많아?"
인과 관계 자체는 얘기를 들으면서 대충 이해가 갔기에 더 신경 쓰이는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많다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한 명 정도 스폰해주는 거야 어느 정도 잘 벌면 할 수 있는 일이어도, 여러 명을 동시에 해주는 건 어지간히 부자가 아닌 이상은 못 하니까요."
"흠.."
어쨌든 그렇게 사는 인간들이 있기는 있다는 뜻이다.
나야 이제 최면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살고 있었으니 억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참 불공평한 세상이다 싶었다.
"아무튼, 어떻게 하실래요? 만나보실래요?"
"안 될 것도 없으니까, 한 번 만나보지 뭐. 그런데, 네가 보기엔 어때?"
"네? 뭐가요?"
"이은설 말이야. 예쁘다는 거야 알겠고, 성격이나 이것저것."
"음...."
내 질문에 임예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가, 이내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와 대답했다.
"좀 짜증 나는 성격이에요."
"어, 그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는 말치고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뒷담을 까는 내용이었기에 살짝 당황하면서 되물었다.
유서연이든 임예진이든. 내숭을 떤다는 건 아니지만, 내 앞에서는 뭐가 됐든 나쁜 말을 하는 경우 자체가 거의 없었기에 놀란 부분이 컸다.
"얼굴이나 몸매야 뭐, 예쁘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해야 하나, 별것도 없으면서 까칠하게 굴고, 자기 자랑 아니면 불평만 하거든요."
"흠.."
"얘기할 때는 거의 자기 얘기만 늘어놓고, 남 좋은 일에는 심드렁하거나 뭘 그런 걸로 오버하냐고 핀잔주고, 말투에서 은근히 사람 깔아보는 게 느껴지거든요."
과연. 듣기만 해도 어울리기 싫은 성격이라는 건 충분히 알겠다.
"근데, 그런 여자를 소개해주려고 했었어?"
"어쨌든 예쁜 건 맞으니까요. 어쨌든 최면만 걸어놓으면 주인님이 갑이기도 하고, 잘 가지고 노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
가지고 논다니. 실제로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남의 입으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이미 내가 쓰레기라는 걸 인정하고 있는 것과 남의 입으로 쓰레기라는 사실을 지적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건방진 성격도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는 임예진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이미 자존심이 세거나 까칠한 여자들도 여럿 가지고 놀았었고, 그 고고한 자존심을 꺾어 얌전하게 만드는 재미 역시 각별했으니까.
"아무튼, 만나고 싶으시면 내일이라도 만날 수 있게 전달해둘게요."
"그렇게 해줘."
"그렇게 하려면 학원 쪽에 또 이것저것 최면도 돌려놔야 하는데...."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임예진은 무언가를 바라는 듯 은근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사실 이미 모델 학원 자체는 이미 임예진의 손에 떨어진 상태고, 이은설에게 일을 넘겨주는 것 정도는 귀찮을 것도 없는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기분 좋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예진이가 이렇게 열심히 해주니까, 미리 상이라도 줘야겠네?"
"헤헤.."
임예진이 원하는 대로, 은근하게 분위기를 잡아주자 기분이 확 좋아진 듯 살짝 헤프게 웃음을 흘린다.
평소라면 이대로 섹스로 돌입했겠지만,
"그럼, 데이트라도 하러 갈까?"
"..네? 데이트요?"
끈적해지려는 분위기를 털어내듯 산책이라도 가자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자 임예진은 순간 무슨 소리냐는 듯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섹스야 어차피 매일 하고 있는 건데, 상이라고 하긴 좀 그렇잖아. 모처럼이니까, 둘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저녁도 같이 먹고, 데이트나 하자는 거지. 별로 안 내켜?"
"아, 안 내키긴요! 좋아요! 가요!"
임예진은 절대 아니라는 듯 순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운차게 대답했다.
"아, 그래도 나가려면 이것저것 준비도 해야하는데.. 30분.. 은 너무 짧고, 한 시간 정도만 기다려 주실 수 있어요?"
"더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천천히 해."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임예진은 전혀 못 알아들은 것 같은 대답과 함께 문을 쾅 닫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이내 문 너머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느긋하게 침대에 몸을 눕혔다.
엘레나를 몽마로 만들기 위해 설득할 때, 제대로 데이트 한 번 안 하고 섹스만 했느냐는 지적을 들었던 게 신경 쓰여서 해본 말이었는데. 이렇게 좋아해 줄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서연이나 민아, 엘레나와도 간간히 데이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점점 시간이 없어지는 것 같은데, 우리 애들이니까 이 정도는 해주는 게 맞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데이트 같은 건 귀찮을 뿐이었지만 우리 애들과 다니는 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으니 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
임예진과의 데이트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걸로 끝났다.
아직 겨울이라 날이 추웠으니 실내 위주로 돌아다닐 생각에 무난하게 영화부터 한 편 보고, 카페에 들렀다가, 백화점에서 쇼핑에 어울려주다가 롯데타워 전망대에서 식사도 하고, 집이 아닌 호텔에 방을 잡아 나름대로 로멘틱하게 밤을 보냈다.
쇼핑에 어울려줄 때는 내심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임예진이 워낙 기쁘고 신나는 표정이라 싫은 내색 없이 어울려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다음날이 아닌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이은설과 약속을 잡았다.
사실, 하루 내내 돌아다니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으니 하루 정도는 푹 쉬고 해도 괜찮다고 했는데, 임예진은 오히려 기력이 넘쳐서는 곧장 일을 처리하겠다고 나가버린 덕분이었다.
[>예진 언니랑 데이트했다면서? 엄청 자랑하더라.]
[>서연 언니도 말은 안 하지만 엄청 부러워하고 있을 걸. 서연 언니랑도 약속 잡아봐.]
[>나? 나야 방송하느라 바쁜데 무슨 데이트야. 저번에 아쿠아리움도 갔고, 됐어.]
[>둘이서만? 맘대로 하든가. 그래도 할 거면 미리 얘기해놓고 해. 당일에 휴방 공지 올리는 건 별로니까.]
임예진이 데이트하는 내내 사진을 찍고 다녔으니 다른 둘에게도 공유가 됐을 거라는 건 예상 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는 유서연에 반해 민아 쪽은 의외로 말이 많았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냐느니, 앞으로도 계속 신경 써주라느니.
자기가 아니라 유서연과 임예진을 생각해서 말하는 것처럼 굴기는 했지만,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도 단답만 하는 평소와는 달리 대화가 끊기지 않는 탓에 메세지로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유서연 같은 경우에는 아마 민아의 말대로 부럽다고는 생각해도 자기 쪽에서 먼저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이제 와서는 그렇게 완전히 노예 같은 마인드로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음에도 참 한결같아서 기특한 동시에 살짝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렇게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핸드폰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약속 시간까지 1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 됐다.
'오고 있는 건 맞겠지?'
분명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 시간까지 도착하지 않으니 뭔가 일이 생겼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핸드폰 시계가 정확히 오후 2시로 넘어간 순간.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날씬하게 잘 빠진 미인 하나가 내 쪽을 발견하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키는 170이 살짝 되지 않을 것 같고, 진한 검은색 스타킹에 타이트한 검정 치마, 슬림한 흰색 스웨터에 얇은 코트.
조금 추울 것 같긴 하지만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에 임예진과 마찬가지로 한쪽 앞머리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나쁘지 않았다.
모델 워킹처럼 당당하게 내 시선을 받으며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이은설은 거침없이 맞은편 의자를 빼며 앉았다.
"음.. 이은설 씨?"
"맞아요. 최민석 씨, 맞으시죠?"
"맞습니다."
"흐음.."
아무런 말도 없이 대뜸 맞은편에 앉고는, 또 아무 말도 없이 있길래 먼저 말을 걸었더니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당당하게 눈동자를 굴려 나를 훑어보기 시작한다.
자기가 내 쪽을 살피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조차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그렇게 잠시 몇 초 정도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야, 이은설의 눈이 짧게 깜빡이며 똑바로 시선을 맞춰왔다.
마치 '이 정도면 괜찮네'라며 합격 도장을 찍어준 듯한, 살짝 부드러워진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당당하고 고압적인 눈빛이었다.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지만 보통은 약속 시간에서 10분이나 5분 정도는 먼저 도착하는 게 매너일 텐데. 아슬아슬한 것도 아니고 정말 딱 맞춰 도착해놓고는 기다렸다는 말 한마디 없이 저러는 게 신선하다 못해 신기하게 느껴졌다.
"예진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스폰할 상대, 구하신다고 하셨었죠?"
"맞습니다."
이미 하겠다고 얘기를 다 끝내놓고 뭘 다시 묻나 싶었지만 당당한 태도가 재밌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도 남들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하는지, 잠시 주위를 살피고는 아주 살짝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것도 재밌었다.
구석진 자리라 근처에 손님도 없고, 잔잔하게 BGM도 깔리고 있으니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이상은 못 들을 텐데.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꽤나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조건은, 학원 쪽으로 들어오는 일감을 넘겨주는 걸로 대신한다고 했었고요."
"맞아요."
"정확히, 얼마나요?"
"네?"
"자세한 건 못 들었거든요. 정확히 얼마나 일을 몰아주실 수 있는 건지."
그건 나도 못 들었다.
최설아는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데이트부터 했으니 생각도 하지 않았던 질문이라 뭐라고 확실하게 대답해주기가 애매했다.
스폰해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입장에 저렇게 당당한 건 어떤가 싶긴 했지만, 액수가 확실하게 정해진 게 아니었으니 저렇게 확실히 해두는 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쪽은 학원 측에 잘 조절해달라고 전달만 해놨습니다. 제가 하나하나 검사하고 간섭하기는 건 서로 번거로우니까요. 그래도 생활하기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겁니다."
"흐음.."
즉석에서 대충 떠올려낸 대답이었지만 이은설은 차분하게 검토해보는 것처럼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짧게 생각에 잠겨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 다시 당당하게 눈을 맞추며 수긍하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평소에 여자를 만날 때와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여자, 재밌다.
예쁘고, 꼴리고, 괴롭혀주고 싶고, 그런 감상이 아닌 순수하게 재밌다는 감상이 떠오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