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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602화 (595/775)

< 602화 > 다 쟤가 쓰레기라 그런 거잖아요 (3)

"언니."

"아, 네."

지금까지는 친절하기는 해도 표정이나 말투가 가볍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차분하고 진지한 느낌이 들어 이쪽까지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응..?"

"일단.. 제 솔직한 심정으로는 언니는 거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걔 주변에 여자가 늘어나는 게 싫어서 하는 생각이고, 언니가 하겠다고 하면 조금 질투하는 건 어쩔 수 없어도 싫어하거나 할 마음은 없어요."

뭐랄까, 감정과 이성을 확실하게 구분 짓는 모습이 굉장히 어른스러운 느낌이다.

실제로는 자신 쪽이 더 연상이었지만 남녀 관계에 관해서는 경험이 전혀 없었으니 나이 같은 건 그다지 의미가 없기도 했다.

"서연 언니랑 예진 언니야 뭐.. 저보다 더 신경 안 쓸 테고. 일단 저희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단 거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말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지 잠시 말을 멈추며 한숨 돌렸다가 말을 이어 나간다.

"일단 거절하면 후회하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왜.."

"지금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보통은 생각도 안 하고 거절하잖아요. 이런 거. 대뜸 최면에 걸려서 몸도 뺏기고, 심지어 좋다고 고백은 하는데 다른 여자가 셋이나 더 있는 데다가 그 외에도 더 만나고 다니겠다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다. 보통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거절할 것이다.

"그런데도 고민하고 있고, 여기까지 와서 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뭐든 거절하지 않을 이유를 찾고 싶어서 온 거라고 생각해요. 이성적으로는 거절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

스스로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속마음을 전부 읽혀버린 기분이다.

분명 듣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번에도 설명을 듣고 나니 곧바로 '그렇구나'하고 납득해버릴 정도로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끄집어낸 듯한 설명이었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데. 당연히 후회하겠죠. 이미 이성으로 결정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니까요."

"음...."

"그렇다고 해서 받아들인다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결정하고 나면 무를 수도 없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김민아가 투덜거리듯 작게 한탄하는 말. 한번 결정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정하고 나서 무를 기회가 있었다면 그냥 한번 경험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네?"

"거절한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후회되고, 그럴까요? 어차피 다신 못 만나는 것도 아니고.. 만나다가 나중에 결정해도 되는데.."

"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처음으로 김민아의 표정이 놀란, 아니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이 날아들었다.

순간 자신이 뭔가 말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 했던 말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가 없어 조금 긴장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그야.. 거절해도 계속 만나고 싶으면 만나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었는데..?

"아...."

순간 김민아의 표정이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 그대로 정지했다가, 이내 눈빛이 싸늘하게 식으며 거실로 향하는 문 너머를 노려본다.

"..언니. 잠깐 할 얘기가 생겨서 그러는데, 5분, 아니 3분 정도만 기다려줄래요?"

"..아, 네. 괜찮아요."

"잠깐 다녀올게요."

표정만큼이나 싸늘하게 식어 높낮이 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흠칫했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김민아는 자신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며 문을 탁 닫아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문 너머로 김민아 쪽에서 일방적으로 항의하는 목소리와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닫아놓은 탓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항의하는 내용이야 뻔했고, 최민석의 대답이 조금 궁금해서 엿들을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얌전히 김민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싸늘한 표정과 목소리에 비해 그렇게 오래 싸울 만한 일은 아니었는지, 금방 항의하는 목소리가 가라앉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갈 때와는 전혀 다른 새침한 표정으로 변한 김민아가 문을 닫고 돌아와 크흠, 짧게 헛기침하며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과연 무슨 대답을 듣고 왔길래 그토록 싸늘했던 표정이 저렇게 변해서 돌아온 걸까. 당장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했지만, 대뜸 물어보기도 멋쩍은 탓에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궁금증을 억눌렀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 아무튼,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어차피 어느 쪽이든 후회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게 낫잖아요."

김민아의 말은 결국 자신을 포함한 여자들 쪽에서는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여전히 어느 쪽이 더 좋겠다는 확신은 가질 수 없었지만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 상태인지도 알게 됐고, 처음에 비하면 부담도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고 언니는 뭐.. 나중에 결정해도 되니까요."

그렇게 작게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며 방에 돌아올 때 지었던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확실히 같은 여자가 봐도 귀엽고 매력적인 표정이었다.

"그보다 언니."

"네?"

"어쨌든 민석이랑 계속 만나기는 할 것 같은데. 불편하게 존댓말 하지 말고 말 편하게 해요."

"그건.."

"제가 언니들이랑만 알고 지내다 보니까 반말 듣는 게 편해서 그래요. 그리고, 방금 만난 사이기는 해도 서로 비밀까지 다 공유한 사이인데. 말 놓는 것 정돈 괜찮잖아요."

"음.. 그럼.. 그럴까..?"

만나고 나서 30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대뜸 말을 놓기는 조금 그랬지만, 김민아의 말마따나 이미 부끄러운 얘기까지 다 털어놓은 사이에 말 놓는 정도로 불편할 게 뭐 있나 싶어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말을 놔 버렸다.

"번호도 교환해요. 언니, 인스타 해요?"

"아니, 인스타는.."

"언니 정도면 인기도 엄청 많을 텐데. 아깝게."

"그런 건 좀 불편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번호 좀 불러줄래요?"

"010-XXXX..."

"제가 언니한테 걸게요. 아, 신호 갔다. 번호 저장 좀 해놓고.. 프사도 셀카는 아니구나."

뭐랄까, 대화의 진행 속도가 장난 아니게 빠르다.

어느새 저장한 번호를 연동까지 시켜서 자신의 카톡 프로필을 살피고 있는 김민아의 행동력은 여러모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여자끼리 모인 톡방도 있는데. 들어올래요?"

"아, 아니. 아직은.."

김민아가 말한 톡방이 김민아처럼 몽마가 되기를 선택한 두 여자가 모인 곳이라는 생각에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언니 정도면 들어와도 괜찮을 텐데. 조금 애매하려나."

"......"

김민아는 별 뜻 없이 중얼거린 말이었겠지만, 조금 애매하다는 말은 확실하게 몽마가 되기를 선택한, 몽마가 된 여자와 아닌 여자의 차이를 확실하게 선 그어놓는 듯한 말이었다.

"그.. 역시 몽마가 되고 안 되고는 차이가 커..?"

"차이? 무슨 차이요?"

"그냥.. 전체적으로. 외모 쪽이나.. 몸도 더 기분 좋은 쪽으로 변한다고 했으니까..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궁금해서.."

"아아.."

분명 일단은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을 텐데.

사소한 말 한마디에 다시 조바심이 나서 이런 걸 묻는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신경이 쓰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김민아는 자신의 말을 듣자마자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솔직히, 외모 쪽은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요. 피부나 머릿결이 좋아지는 것도 크지만 비율이나 이목구비가 은근하게 교정 된다고 해야 하나..? 분위기는 그대로 남으면서도 확 예뻐졌다는 게 체감이 되거든요."

"그래..?"

비율에 관한 얘기까지는 최민석에게 키가 커지면서 비율이 좋아진다는 얘기까지는 들었었지만, 얼굴부터 몸 전체가 교정된다는 식의 내용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신 성형이나 다름없는 효과였다.

"특히 가슴 쪽은.. 언니는 뭐, 필요 없을 것 같긴 한데."

순간 김민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가슴 쪽으로 힐끔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는 모습에 얼굴이 살짝 화끈거렸다.

"걔는 큰 걸 좋아하니까요. 서연 언니 크기 생각하면 언니는 더 커져도 괜찮아요. 저랑 예진 언니 같은 경우에는 B컵이었다가 이제 겨우 인권이나 챙긴 느낌이라 그 부분이 좀 아쉽긴 해요. 지금 상태가 딱 보기 좋다는 건 알아도 큰 거 좋아하는 티를 적당히 내야지.."

매끄럽게 설명을 이어 나가다가 또 은근하게 최민석에 대한 불평이 튀어나왔다.

"언니, 몇 컵이에요?"

"그, 그게.."

"에이, 우리끼리 이 정돈 말해줘도 괜찮잖아요. 어차피 민석이한테 물어보면 다 대답해줄 텐데."

"....F.

"와.. 진짜요? 자연 F컵이 가능하긴 하네.. 이상한 의미로 물어보는 건 절대 아닌데, 수술하고 그런 건 아니죠?"

"응...."

중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일부 시기하는 여자애들에게 벌써부터 가슴을 수술했다느니 하는 뒷담을 들어서 여러모로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질문이었지만 김민아는 정말 신기해서 물어보고 있다는 게 다 느껴지는 탓에 순순히 대답해줬다.

"서연 언니도 몽마 되기 전에는 E컵이었다고 했었는데. 서연 언니보다 더 커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허리도 엄청 가늘고.. 진짜 부럽다.."

날씬하기로는 슬렌더 체형인 김민아 쪽이 더 했고, 저렇게 가는 몸매에 저 정도 가슴이면 거의 반칙 수준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몸매에 관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 할 수밖에 없으니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민석의 취향이 큰 쪽을 더 선호하고 있는 이상 지금 상황에서는 김민아가 자신을 부러워하는 게 맞았다.

"걔가 진짜 가슴 엄청 좋아하잖아요. 하는 도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잠깐 숨 좀 돌리거나 씻으러 갔을 때도 계속 주물러대고 있으니까.."

"그야.... 응...."

이 부분에서는 자신도 경험한 게 있었기에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 그건 해줬어요? 파이즈리. 저랑 예진 언니는 사이즈가 안 돼서 못 하는 게 진짜.. 거기서 빈부격차가 엄청 느껴지거든요."

"해주기는 했는데.."

"와.. 진짜.. 좋겠다.."

여자끼리 어울리면서 가슴 크기가 부럽다는 일이야 항상 들어왔지만 파이즈리를 해줄 수 있어서 좋겠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대화의 전제 자체가 최민석의 취향에 맞냐 아니냐를 깔고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고 있었더라. 아, 맞아. 몽마가 되면서 뭐가 변하냐는 얘기였지. 일단 외모 쪽은 확실하게 티가 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빈둥거리면서도 몸매가 알아서 유지되니까.. 그냥 반칙 수준이죠."

"..그렇긴 하지."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나름대로 식단을 조절하고, 꾸준한 스트레칭과 주기적인 운동으로 꾸준히 몸매를 관리하고 있었으니까.

특히 가슴이 큰 만큼 처지기도 쉬운 탓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꾸준히 신경 쓰고 스트레스도 받고 있었으니 더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분 좋은 거야 뭐, 저희가 아니라 걔가 더 잘 알겠죠. 근데, 체력은 확실하게 좋아져요."

"체력?"

"기분 좋은 건 똑같은데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되거든요. 몽마가 되기 전에는 쉬지 않고 두 번만 해도 정신을 못 차렸었는데. 몽마가 된 뒤에는 그 정도는 나름 여유롭거든요. 지쳤다가 회복되는 것도 빨라지고. 걔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큰 차이 같더라고요."

"그래..?"

"다른 여자들이랑 할 때는 제대로 하면 버티질 못하니까, 자기는 제대로 만족 못 했는데 멈추고 숨 돌릴 시간도 길게 줘야 하다 보니까 애초부터 적당히 힘 빼고 한다고 하더라고요."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중간에 의구심을 품었던 자신과 할 때는 힐링 받는 기분이 든다는 말에 대한 해석 역시 신빙성이 더해지는 기분이다.

몽마가 된 여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쾌감도 덜하고, 자신을 신경 써주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서야 쾌감도 덜 느끼고, 힘도 빼고 즐기고 있으니 힐링 받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최민석은 그저 아쉬운 기분을 힐링이라고 듣기 좋게 속삭여줬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실상은 최면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즐길 수 있어 좋다는 점과 마음 편하게 해주는 성격이 좋다는 뜻이었지만 지금의 엘레나로서는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 최민석에게 진상을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답을 듣는 게 무섭다는 생각에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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