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1화 > 다 쟤가 쓰레기라 그런 거잖아요 (2)
"..차라리 좋아서 하게 만들던가. 겨우 몇만 원에 성욕 처리랍시고 써먹으니까 더 자존심 상하잖아요. 돈 받고 몸 파는 것처럼.."
"..그렇긴 하네요."
당시에는 최면을 얻은 직후라 가진 정기가 적어 돈이라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최면을 걸 수가 없었다는 사정이 깔려있긴 했지만 이렇게 남의 뒷담을 깔 때는 그런 자잘한 사정보다는 공감이 중요하다.
애초에 최민석이 쓰레기같이 행동한 것도, 김민아가 피해자인 것도 부정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으니 더더욱 최민석의 사정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거기에 나중에는 사람을 정액 중독으로 만들어놔서 매일 정액을 안 먹으면 공부에 집중도 못 하게 만들어놓고. 무슨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으.. 지금 생각해도 열 받네, 진짜."
확실히 최민석이 너무하기는 했다. 평생 원망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김민아는 최민석을 용서하고, 아예 연인 같은 관계로 발전해 함께 지내고 있다.
물론 자신도 이미 같은 결정을 내렸으니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아직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탓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언니 얘기도 다 들었어요."
"어, 네..?"
"무슨 학습 의욕을 늘리기 위해서.. 대충 그딴 핑계로 최면 걸었었잖아요. 최면이라도 좀 성의있게 걸던가. 어이가 없어서.."
"민석이한테 들었어요..?"
"걔가 어지간해서는 다른 여자 얘기는 잘 안 하는 편인데. 학원에서 매일 보는 테스트 점수가 도저히 안 나온다고 저한테 도와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언니 얘기는 알고 있어요."
"아..."
최면에 막 걸렸을 때, 자신이 걸었던 조건을 생각해보니 최소한 펠라라도 받기 위한 점수가 80점이었는데. 당시의 최민석의 실력으로는 어려운 점수를 기준으로 잡기는 했었다.
실제로 한동안은 60점과 70점을 왔다 갔다 하며 제대로 펠라조차 받지 못하고 점수를 확인할 때마다 아쉬운 표정을 짓던 게 떠올랐다.
매번 시험이 끝나고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아쉬워하던 표정이 참 귀여웠었는데.
순간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반사적으로 작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가 바로 앞에 김민아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웃음을 참았다.
"아무튼, 어느 정도는 같은 처지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도 괜찮아요."
"음.. 그럼.."
오는 내내 분위기가 험악해지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막상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잠깐 생각 좀.."
"아직 혼란스러울 거 아니까, 천천히 생각해요. 저 시간 많으니까."
그나마 김민아가 친절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재촉하기는커녕 다 이해한다는 투로 이쪽을 배려해주는 덕분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고, 금방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민아 씨는.. 완전히 용서한 거예요..?"
가장 먼저 떠오른,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대충 넘어가기는 했지만, 자신이 아직 최민석을 제대로 용서한 건지 아닌지조차 확신이 없었으니까.
우선은 이 부분부터 해두고 싶었다.
"음.. 조금 애매하긴 한데.."
질문을 들은 김민아는 조금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가, 잠시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고는 짧게 대답했다.
"반 정도는 그런 것 같아요."
"반 정도..?"
"어쨌든 지금은 지난 일이기도 하고, 당시에 사과도 제대로 받았으니까요. 지금도 다시 생각하면 열불 터지기는 해도 처음 충격받았을 때만큼은 아니기도 하고, 그냥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준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도 알 듯하면서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김민아는 잠시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조금 창피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잠자코 욕먹으면서 사과도 제대로 하고, 진지하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어쩌겠어요. 먼저 반한 게 죄죠, 뭐. 그게 양다리도 아니고 세다리, 아니 네다리가 될 줄은 몰랐지만."
사실상 최면에 걸려 당한 일조차도 용서할 정도로 최민석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거나 다름없는 말이다.
멋쩍어하면서도 대놓고 반했다는 말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되려 듣는 쪽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다시 가슴 한 켠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괜히 불편했다.
"세다리.. 다른 사람들도 같이 좋아한다는 건.."
네다리는 아마 자신까지 포함해서 한 말인 것 같아 모르는 척 묻자 이번에는 고민 없이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당연히 기분 나빴죠. 의식만 못 하고 있었지, 그 전부터 내심 좋아하는 마음은 있었으니까요. 막상 사진으로 보니까 다들 저보다 예쁘고 몸매도 좋고.. 질투도 엄청 났었고요."
"질투...."
김민아의 대답을 듣다가 마지막에 들려온 질투라는 단어를 멍하니 따라서 중얼거렸다.
스스로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남의 입으로 질투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왜 다른 여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 들었는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김민아의 설명이 지금의 자신과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탓에 더 깊게 공감되는 걸지도 몰랐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최민석을 내심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도, 김민아를 비롯한 다른 두 명 모두 자신보다 예쁘다는 생각에 주눅 들고 질투심을 느꼈다는 것도 똑같았다.
"그래도 막상 만나보니까 둘 다.. 음.. 나쁜 사람은 아니라.. 아무튼, 지금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
중간에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서로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았다.
"어차피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는 계속 만나고 다닐 텐데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고요.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다른 여자는 계속 만나겠다고 할 때는 진짜 어이없긴 했지만."
그 말은 자신에게도 했었다.
쓰레기 같다는 건 알지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다고.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라는 어이없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언니들 입장에서는 셋이 잘 지내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갑자기 끼어든 상황이었을 텐데. 친절하게 대해줬으니까요."
"그렇구나.."
이렇게 들어보니 다른 두 사람 역시 성격이 좋은 편인 모양이었다.
애초에 어지간히 착하고 무른 성격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최민석이 하는 고백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금도 가끔 언니들이랑 붙어있거나 다른 여자 만나러 갈 때면 조금씩 질투 나기는 해도.. 언니들은 친한 사이니까 괜찮겠다 싶고, 다른 여자들은 다 진심으로 만나는 건 아니니까 괜찮겠다 싶기도 하고요."
"음.."
"저도 언니들이 친절하게 받아준 만큼 참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짜증 나기는 해도 친절하게 얘기하려는 거고요. 아, 짜증은 언니가 아니라 걔한테 난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다른 여자들은 괜찮겠다는 부분은 공감하기가 힘들어 짧게 침음성을 흘리자 김민아는 곧장 설명을 덧붙여줬다.
"그리고, 마냥 걔가 좋아서, 착해서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요."
"뭐가 더 있어요..?"
"언니도 대충 설명은 들었죠? 몽마가 되면 피부나 머릿결도 좋아지고, 몸매도 좋아지고.. 그런 거요."
"아.."
확실히 그건 굉장히 혹하는 얘기긴 했다.
평생 커다란 가슴 때문에 남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고 스트레스 받았으면서도 예뻐질 수 있다는 말에는 혹할 수밖에 없는 게 여자의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는 최민석에게 듣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돈 때문에 넘어온 것도 있었고요."
"돈..?"
"돈 얘기는 아직 못 들었어요?"
"떠오르는 게 없는데.."
잠시 최민석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쭉 떠올려봤지만 유서연이라는 사람이 집이 부자라는 것 외에는 돈 얘기가 나온 적은 없었다.
"음.. 그러니까, 언니들 중에 유서연이라고 집이 엄청 부자인 언니가 있거든요."
"아, 그 얘긴 들었어요."
"아무튼, 그 언니가 돈이 많으니까 몽마가 돼서 자기 게 되면 이렇게 집도 구해주고, 일 안 하거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지낼 수 있게 지원해주기로 했거든요."
"아...."
최민석에게는 못 들은 얘기였다.
"왜 말 안 한 건지는 몰라도 막 차별하고 그런 애는 아니니까 나중에라도 얘기해줬을 거예요."
왜 자신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은 걸까. 머릿속에 짧게 의구심이 떠오르자마자 김민아가 변호하듯 말했다.
짜증 난다고, 열 받는다고, 쓰레기라고 욕하면서도 막상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게 흐르자마자 망설임 없이 변호해주는 걸 보니 말은 거칠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최민석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그때 제가 상태가 좀 안 좋았거든요. 공시에 합격한 건 좋은데 9급이라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근무지도 엄청 빡센 곳에 걸려서 맨날 야근해서 몸도 축나고.. 그러는 와중에 편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하니까 넘어간 것도 있어요."
"음...."
돈 문제에 관해서는 이해는 가도 공감하기는 조금 애매했다.
자신도 사람인 이상 돈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도 있고, 지금 하는 학원 강사 일도 적성에 맞고 오히려 가르치는 게 즐거운 면도 있는 만큼 돈 욕심이 그렇게 크게 나지는 않는 탓이었다.
'이래서 얘기 안 한 건가..?'
최민석에게는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재밌다고 얘기했었으니까. 돈으로 꼬시는 건 오히려 반감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항상 가볍게 행동하는 듯하면서도 항상 이것저것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성격이었으니까.
김민아도 자신이 걸렸던 최면 이야기를 하면서 돈 받고 몸 파는 것 같아서 더 기분 나빴다고 하기도 했고, 자신 역시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지원해줄 테니 자기 게 되라고 했다면 되려 불쾌하게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나중에 물어보자.'
어쨌든, 당장 가장 궁금했던 점에 관해서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문제는, 처음에는 몽마가 될 마음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어느새 몽마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고민만 커진 상황이라 이제는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행복해요..?"
"그럭저럭..? 쓰레기기는 해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지내고 있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편하게 살고 있잖아요. 제가 인방 한다는 건 들었어요?"
"듣기는 했는데.."
"지금은 이걸로 돈 벌어서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있고, 조금씩 저금해서 부모님 좋은 집으로 이사도 보내드릴 생각이거든요. 얼마 벌지도 못하면서 안정적이라는 거 하나만 보고 죽어라 야근하고, 피곤에 쩔어서 일 때려치고 싶다고 징징대고 지내던 때보다는 훨씬 낫죠."
자신과 사정은 다르지만 어쨌든 행복하다는 말만큼은 진심이라는 게 편안한 표정이나 목소리를 통해 확실하게 전해져왔다.
덕분에 이번에도 마음을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만 더 커졌다.
처음 다른 여자들을 만나보겠다고 할 때만 해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기까지 와 보니 고작 질문 3개에 더는 질문할 거리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잠시 말없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자신의 안색을 빤히 살피던 김민아가 작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