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화 > 다 쟤가 쓰레기라 그런 거잖아요 (1)
몽마가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미용에 관한 이야기에는 굉장히 혹했지만, 최면에는 그다지 욕심이 생기지 않는 탓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된다는 일 자체가 실감은 잘 안 가더라도 거부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고.
아무튼, 몽마가 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지금 엘레나는 최민석과 함께 모텔을 나와 이미 몽마가 된 여자. 김민아를 만나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얘기를 듣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최민석에게 몽마가 되면서 생기는 변화에 대해 듣고, 이런저런 주의사항도 들었다.
수십 년 전에 서양 쪽에서 '진짜' 몽마들이 사냥당했다던가 하는 판타지 같은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냥 말도 안 되는 남 일처럼 가볍게 흘려넘겼었는데.
그 뒤에 최민석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엘레나의 심경을 건드렸다.
'아, 또 변하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뭔데?'
'이건 누나한테 좋은 게 아니라 나한테 좋은 거라..'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차라리 자신에게 좋은 일이라고 했으면 대충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최민석에게 좋은 일이라고 하니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자신에게는 없고 그 세 명에게는 있는 것. 그것도 최민석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신경 쓰여 참을 수가 없었다.
'대놓고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명기가 되거든.'
'명기..?'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녀 관계에 대한 얕은 이야기일 뿐이었기에 엘레나의 지식 속에 명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임이 더 좋아진다거나, 더 뜨겁고 미끌거리게 된다거나, 그런식으로..'
'아....'
확실히 대놓고 말하기에는 '좀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의문이 해소됐음에도 불구하고 거슬리는 기분만 더 커졌다.
최민석의 말을 정리해보면, 몽마가 된 세 명의 여자는 결국 자신보다 예쁘고, 관계 중에 느끼는 쾌감 역시 자신보다 더 기분 좋다는 의미가 아닌가.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름 칭찬처럼 들렸던 '누나랑 할 때는 힐링 받는 기분이다'라는 말도 뭔가 거슬리게 느껴졌다.
그 셋과 할 때는 너무 기분 좋고 흥분돼서 진정이 안 되고, 자신은 적당히 기분 좋고 적당히 흥분돼서 편안한 기분이 든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거슬리는 수준을 넘어 울컥울컥 짜증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최민석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결국 내심 그 셋보다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혹시, 그 셋 중에 아무나 괜찮으니까. 얘기 좀 해볼 수 있을까..?'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서. 뭔가 찔리는 기분에 그런 변명까지 덧붙였지만 최민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리고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에는 [김민아]라고 글자가 떠 있는 걸 보니 마지막에 사진을 보여줬던 여자인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자신에게도 들으라는 듯 스피커 모드로 전환한 핸드폰에서는 듣기 좋은 선명하고 깨끗한 미성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도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원래 자신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딱히 목소리가 나쁘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는 것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었다.
엘레나 역시 차분할 때는 차분하고, 기분이 좋을 때도 과하지 않게 적당히 밝으면서도 부드러운 타입의 미성이었기에 학원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았지만,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자고 있었어?'
[일어난 지 좀 됐어. 왜?]
'목소리가 다 쉬어있길래. 자다 깬 줄 알았지.'
[죽을래?]
자신과 이야기 할 때처럼 친근하면서도 더 거리감 없고 장난스러운 대화에 가슴 한 켠이 쿡쿡 찔리는 것처럼 불편해진다.
하지만 최민석은 통화하느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지금 집에 가도 돼?'
[아침부터? 뭔 일 있어?]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엥? 누군데?]
'왜, 가끔 얘기했었잖아. 엘레나라고, 영어 학원에서 만난..'
[..그 사람이 나랑 왜 만나?]
순간.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자신마저도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굳어버릴 정도로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최민석 역시 이번에는 상대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걸 바로 눈치챘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엘레나 누나도 몽마로 만들려고 했거든. 근데 누나가 셋 중 아무나 괜찮으니까 당사자한테도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제대로 얘기해주려면 서연이나 예진이보단 네가 낫잖아.'
[누나는 무슨.. 하.. 지금 옆에 있어?]
잠시 고민한 것 치고는 태연스러운 대답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작게 투덜거리며 짧게 한숨을 쉬고는 짜증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묻는다.
'지금 옆에서 같이 듣고 있어. 너만 괜찮다고 하면 지금 바로 가려고.'
[..맘대로 해.]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건지. 짧게 대답을 툭 내뱉고는 그대로 상대 쪽에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가도 괜찮다네.'
'방금.. 화낸 거 아니야..?'
'괜찮아. 그냥 질투하는 거니까. 화도 누나한테 난 게 아니라 나한테 난 거고. 애가 착해서 누나한테는 짜증도 못 내고 잘 얘기해줄 거야. 지금 바로 갈 거니까 옷 입어.'
'......'
직접 마주치기 전부터 찝찝하고 눈치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어쨌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어 최민석이 밀어붙이는 대로 따르며 다시 옷을 입고 모텔을 나와 차에 올랐다.
그리고 지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깔끔한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이 끊겼고, 차는 매끄럽게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와 널럴한 주차 공간에 자리를 잡고 정차했다.
"가자."
"....응."
이미 최민석과 함께 지내고 있던 이들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여자가 한 명 더 늘어난 상황이다.
자신도 최면에 걸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으니 억울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대가 느끼는 질투심 역시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주말 오전이라 그런지 조용한 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조용히 올라가는 층수를 지켜보다가 문이 열리자 함께 내렸다.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선 최민석은 노크도 하지 않고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탓에 자신도 눈치를 보면서도 뒤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철컥, 문이 닫히면서 풀렸던 도어락이 다시 잠기고. 거실 한켠에 있는 문이 벌컥 열리며 얇은 실내복 차림의 여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김민아. 사진으로 봤던 여자였다.
'..예쁘다.'
순간 긴장하고 있던 것도 잊어버리고 속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마르지 않은 적당하게 날씬한 몸매와 보기 좋게 굴곡을 드러낸 적당한 크기의 가슴은 가녀리면서도 나올 곳은 나온 섹시한 느낌이 물씬 풍겨온다.
언짢은 기분을 감출 생각이 없는 듯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사진으로 본 것과 비슷하면서도 눈매에서 알 수 없는 야릇함이 느껴져 얼굴이 살짝 화끈거린다.
아마도 이게 최민석이 말한 '몽마 특유의 분위기'인 모양이었다.
최민석과 만나면서 익숙해진 감각이었기에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이쪽이.."
"엘레나. 맞죠?"
"아, 네.."
둘 사이에서 소개부터 해주려던 최민석의 말을 끊고, 김민아 쪽에서 대뜸 말을 걸어와 살짝 당황하면서도 곧바로 대답했다.
"일단 둘이서 얘기 좀 할래요?"
"아니, 잠깐만.."
"넌 됐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여자끼리만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엘레나.. 아니, 언니도 괜찮죠?"
"그게.."
대뜸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상대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어 최민석에게 힐끔 시선을 보내니 편한 대로 하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기는 한데.."
"그럼 방에서 얘기해요.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고."
"알았어."
소유물이니 뭐니 했던 것 치고는 위아래가 없는 분위기다. 아니, 오히려 최민석이 잘못해서 눈치를 보고 김민아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다는 분위기였다.
"가요. 언니."
"..네."
설마 방에 들어가자마자 드라마처럼 따귀가 날아온다거나, 돈 봉투라도 건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다 싶어 짧게 한숨을 쉬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열려 있는 문으로 따라 들어갔다.
"문 좀 닫아줄래요?"
"아, 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시키는 대로 문을 닫자 김민아는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빼 엘레나가 서 있는 방향으로 돌리고, 본인은 침대 모서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앉아서 얘기해요."
"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의자에 앉자 김민아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 제 소개는 들었어요?"
"이름만.."
"그래도 일단 다시 소개할게요. 이름은 김민아가 맞고, 나이는 스물셋. 직업은 인터넷 방송 하고 있고.. 대충 그래요."
자기소개를 하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라는 듯 적당적당한 말투였다.
"언니 얘기는 한두 번 듣긴 했었는데. 이름이 엘레나고, 성은.. 얘기를 안 했었나..?"
"로빈슨이에요. 엘레나 로빈슨."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과 만나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저보다 언니는 맞죠? 걔가 누나라고 불렀으니까. 일단 언니라고 편하게 부를게요. 막 기 싸움하고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기분 나쁘면 이름으로 부를게요."
"..아니에요. 편하게 부르세요."
뭔가 대화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휙휙 넘어가는 느낌이었지만 막상 대화해 보니 최민석이 말한 대로 자신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셋 중에서는 제가 제일 어리거든요. 그래서 다 언니라고 부르다 보니까 이게 편해서 그래요. 아무튼, 저한테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했죠?"
"..네."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도 장난 아니게 빠르다.
"저도 처음 몽마 얘기 들었을 때 언니들이랑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려고 했거든요. 저야 뭐, 몽마 된다고 받아들인 다음에 만난 거긴 하지만."
"그래요..?"
"네. 언니 심정은 다 이해가 가요. 솔직히 언니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다 최민석 그 새끼가 쓰레기라 그런 거고 재수 없게 걸린 거지. 그냥 예쁘다고 최면 걸어서 신나게 따먹다가 좋아졌으니까 자기 걸로 하고 싶다고.. 대충 그런 거잖아요."
"아, 음...."
말투가 여러모로 거칠고 신랄하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맞는 말이라 뭐라고 반응하기가 더 애매했다.
"저도 언니랑 똑같아요. 그 새끼, 저한테 처음에 뭐라고 최면 걸어서 손댔는지 알아요?"
"아니.."
"제가 공시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거든요. 그때는 저도 걔도 돈 없어서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 새끼가 최면 능력 얻자마자 실험해보겠다고 건 최면이 무슨 고시원 성욕 해소 서비스랍시고 돈 6만 원에...."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위해 뭔가를 설명해준다는 느낌이 아니라 속에 쌓아두고 있던 불만을 쏟아낸다는 느낌이었지만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어쨌든 최민석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얘기기도 하고, 최민석과 김민아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알게 되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