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2화 > 본격적인 설득은 몸으로 (4)
옷을 갈아입고, 몇 분 정도가 더 지난 뒤에야 욕실 문이 열리며 수건으로 몸을 가린 엘레나가 어색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평소에는 같이 욕실에 들어갔다 같이 나오거나, 나오자마자 침대 위로 직행해 몸을 섞다 보니 이런 식으로 수건을 감싼 모습을 볼 일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더 신선한 느낌이었다.
'역시, 가슴이 진짜.."
벗고 있을 때도 굉장하지만, 이렇게 수건으로 몸을 감싸 놓으니 오히려 가슴을 굴곡을 한층 더 강조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너무 열심히 보는 거 아니야..?"
"누나가 너무 예뻐서 보고 싶은 걸 어떡해."
수건 위로 대놓고 자기 몸을 훑어내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엘레나는 살짝 몸을 움츠리며 작게 항의했지만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하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한숨을 쉬고는 수건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우윳빛의 뽀얀 살결 위로 완전히 대비되는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팬티와 브라가 입혀지고, 살색 스타킹이 씌워지는 장면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거기에, 검은색 오피스 정장과 무릎 위까지 오는 H스커트를 입어 평소와 똑같아진 모습 역시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옷을 갈아입은 엘레나는 힐끗, 내 눈치를 살폈다가 머뭇머뭇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나와 살짝 거리를 두고 침대 모서리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힐끔, 내 눈치를 살피고는 작게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했던 얘기 다 기억 나..?"
"기억이야 다 나는데, 누나가 맨정신일 때 제대로 다시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술에 취해서 조금 횡설수설 떠들어대기도 했고."
"으.."
아무래도 어제 일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인지, 횡설수설 떠들어댔다는 말에 어깨를 흠칫 떨고 얼굴을 희미하게 붉히며 침음성을 흘린다.
"누나가 모르는 척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어떻게 할래?"
"....이미 다 말했는데 어떻게 그래."
나름대로 엘레나의 기분을 배려해서 해준 말이었지만, 오히려 이 말이 더 결심을 도와준 듯 흔들리던 표정이 조금 단호해진 분위기로 변했다.
"일단.. 얘기했던 건 다 사실인데.. 재작년쯤부터 엄마가 계속 결혼은 언제 하냐고 재촉하다가 이번에 선까지 보라는 얘기가 나왔었거든.."
"그래서요?"
"나야 뭐.. 당장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싫다고 했는데, 엄마 쪽에서 포기를 못 하고 계속 자기 친구 아들이랑 한 번만 만나보라고 닦달해서.."
여기까지는 여기저기서 들어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였으니 말하기 어렵지 않았겠지만, 이 부분부터는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창피한 내용이다 보니 잠시 말을 끊고 망설인다.
그래도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지 않고 말없이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홧김에 내년 안에 누가 됐든 남자랑 만날 테니까 그만 좀 하라고 했는데.. 그게 약속처럼 돼버렸거든.."
어차피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인지 희미하게 붉어져 있던 얼굴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근데.. 주변에 알고 지내는 남자가 너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나랑.. 사귀면 안 되냐고.. 취해서.."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게 기어들어 가다가, 마지막에 변명처럼 짧게 '취해서 그랬다'라는 식으로 말을 덧붙인다.
일단은 여기서부터 얘기를 시작해보면 될 것 같았다.
"취해서?"
"응..?"
두서없이 짧게 되묻는 말에, 엘레나는 점점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무슨 말이냐는 듯 다시 되물었다.
"그냥 술김에 한 말이었어?"
"어..? 아, 아니.. 그게.."
다시 한번. 짧게 설명을 덧붙이며 묻자 엘레나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짧게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술김에 그냥 나온 말이면 뭐.."
"아, 아니이..! 그게 아니라..!"
마음이 얼마나 급했으면, 아예 내 손목을 탁 붙잡기까지 하며 목소리를 높여 부정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말을 끊어놓고 또 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인지 손목을 잡은 채로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가학심을 자극해오는 탓에 자꾸만 놀리고 괴롭혀주고 싶었다.
"그럼, 진심으로 한 얘기였어?"
"으...."
시작부터 조금씩 붉게 물들던 얼굴이 결국에는 한 번에 확 달아올라 사과처럼 새빨갛게 푹 익어버렸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제대로 해야겠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애초에 무슨 생각인지 제대로 정리를 못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취해서 나도 모르게 말했거든.. 근데.. 주변에 아는 남자가 너밖에 없고.. 너랑은 사귀어도 괜찮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당장 누구랑 사귀기에는 아는 남자가 나밖에 없고, 나랑 사귀는 게 싫지는 않았는데, 당장 사귀자고 고백할 생각까지는 없었다는 거지?"
"....응."
엘레나가 처한 상황이나 술에 취한 김에 고백 비슷한 걸 해버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엘레나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건 나름대로 큰 수확이다.
나름대로 호감이 쌓여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확신이 없었는데. 나라면 사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내 쪽에서 먼저 고백했더라도 받아줬을 정도의 호감은 있다는 의미였다.
'민아는 단순히 친구, 섹스 프렌드 정도로 선을 그어놓은 상태에서 설득이 됐었으니까. 나쁘지 않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뜸 본론으로 들어가 들이댈 정도는 아니지만.
"뭔가 애매하네. 내 생각이야 어쨌든 간에, 누나도 일단 나랑 사귀고 싶은지 아닌지도 결정을 못 한 거잖아."
"그야.."
"술김에 뱉은 말은 실수라고 치고, 결국 아직 제대로 나랑 사귀고 싶다고 고백받은 것도 아닌데, 내가 멋대로 좋다 싫다 대답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그, 그럼.. 내가 사귀자고 하면.."
"할 거야? 사귀자고?"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고백할지 말지를 물어보는 상황이 조금 우스웠지만, 최면을 자주 쓰다 보니 이 정도 이상한 상황은 익숙했다.
"진지하게 결정해줘. 그냥 부모님이 재촉하서, 어쩔 수 없이 사귄다는 식으로 결정하면 나도 좀 그럴 것 같으니까."
"......"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 보며 제대로, 확실하게 결정하라고 못을 박아두자 엘레나는 입술을 작게 벙긋거리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버린다.
여기서 제대로 내가 좋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몽마로 만드는 건 잠수 미뤄두고 더 길게 관계를 맺으며 나 없이는 못 살게 길들여놔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거절당했을 때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하면서, 말없이 엘레나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몇 분 정도 침묵이 이어진 끝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 올린 엘레나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런 게 처음이라 제대로 확신은 못 하겠지만.. 너랑은 사귀어도 괜찮을.. 아니, 사귀면 좋을 것 같아.. 너만 좋으면.. 나랑 사귀어줄래..?"
고민을 제법 길게 하더니, 결국은 스스로도 날 좋아한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조금 애매하고 어색하게 사귀어달라고 고백을 건네왔다.
'..기분이 좀 묘하긴 하네."
내가 확실하게 결정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여자한테 이런 식으로 확실하게 사귀자는 고백을 받아본 건 처음이라 그런지 노예가 되겠다는 대답을 받아낼 때와는 다른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신선한 느낌이 드는 건 드는 거고, 애초부터 이렇게 고백받고 사귀는 게 진짜 목적은 아니었던 만큼 이제는 쓰레기가 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불안과 기대가 섞인 표정과 함께 작게 떨리는 눈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엘레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마지막으로 생각을 짧게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불안했을 텐데. 제대로 용기 내서 고백해줘서 고마워."
"그럼.."
너무 무겁지 않게, 진지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자 긴장하고 있던 엘레나의 표정이 밝게 풀어진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그런데, 누나랑 사귀지는 못할 것 같아."
"어, 어..?"
확 밝아지며 작게 웃음기를 머금으려던 표정이 굳어지고, 이내 뭐가 뭔 당황으로 물들었다.
"왜.."
"내가 가족이랑 사이 안 좋다는 얘기, 기억해?"
"어, 응.."
엘레나 쪽에서 제대로 이유를 묻기 전에, 내 쪽에서 먼저 조금 진지해진 말투로 화제를 띄워 분위기를 잡았다.
조금 뜬금없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화제가 화제다 보니 엘레나도 분위기를 깨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답만 돌려줬다.
엘레나와는 섹스만이 아니라 매번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탓에 서로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던 적이 있어 대충 둘러대는 식으로 대답을 해둬서 분위기를 잡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때는 분위기가 안 좋아질까 봐 대충 둘러댔었는데. 실은 아예 연락도 완전히 끊고, 얼굴도 안 본 지 몇 년은 됐거든."
"아.. 그래..?"
"별로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닌데. 어릴 때 우리 집이 진짜 개판이었거든."
가족에 관해서는 전역하고 자취를 시작했을 때부터 완전히 관심을 꺼 버렸고,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은 뒤로는 남의 일 수준으로 밀려나 가끔 떠올리는 일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내 얘기일 뿐이고, 남이 듣기에는 충분히 불쌍하게 보일, 동정심을 얻기에 충분한 이야기였기에 이렇게 분위기를 잡을 때는 써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본격적으로 빌드업을 시작할 생각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곧바로 최면을 걸었다.
[최민석이 하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고 진심이다. 의심하지 않는다.]
애초에 거짓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상대가 내 이야기를 완전히 믿어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동정심을 얻고, 그걸 기반으로 사귀지는 않지만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내 행동에 어느 정도 당위성을 얻을 생각이었다.
남의 일도 아니고 내가 직접 겪은 일이었으니, 오래 지난 일이었다고 해도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화장실 하나 겨우 달린 좁아터진 원룸에서 갈 곳도 없이 아버지, 어머니가 매일 돈 문제로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얘기.
내 학교생활에 아무런 관심조차 없어서, 기초 수급자 신청도 못 하고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아 겨우 급식이나마 먹을 수 있었던 얘기.
급식비는커녕 내 식사에도 관심이 없어 방학에 학교에 가지 않을 때는 무료 급식소에 가서 겨우 끼니를 해결했던 일화까지.
내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갈수록 엘레나의 눈빛이 동정하는 기색을 띠더니, 끝내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자기 일처럼 슬퍼하는 눈빛을 보내올 정도가 돼버렸다.
성격이 착하고 남 돌보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강한 만큼 나름대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토리였음에도 진심으로 동정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자랐다 보니까 연애나 결혼 같은 관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누한테도 실례인 건 알지만 사귀자고 하는 게 아니라 몸만 즐기자고 솔직하게 말한 거고."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진심이다.
내가 연애나 결혼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데는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것들이 분명히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여자를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따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구 한 명에게 구속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컸다.
물론, 이런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하고 최면에 걸려 내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엘레나는 여전히 슬퍼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