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583화 (579/775)

< 583화 > 누나도 내꺼 할래? (2)

"엘레나 쌤. 오늘은 남자 친구가 데리러 오는 날이지?"

"네? 아, 네에."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학원 강사의 말에 속으로 움찔했다가,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학원 내에서는 최민석이 자신의 남자친구로 알려져 있다.

안 그래도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눈에 띄는 편인데, 매주 금요일마다 자신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학원 앞에 외제차를 떡하니 대놓고 있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사들뿐만 아니라, 학원을 오래 다닌 수강생들 사이에서도 알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하아.. 엘레나 쌤은 좋겠다. 나도 어디서 좋은 남자 좀 만나고 싶은데. 매일 학원이랑 집만 오가고 있으니.. 역시 엘레나 쌤처럼 예뻐야 뭐가 되는 건가 봐."

"아하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말에는 일부러 어색한 티를 내며 웃어넘겼다.

매일 학원이랑 집만 오가고 있다는 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여자끼리는 외모나 몸매에 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조금이라도 자랑하는 티를 내면 관계가 순식간에 틀어질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성격은 좋고, 외모도 평균보다는 조금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평가를 본인 앞에서 위로랍시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지영 쌤 정도면 금방 좋은 남자가 생길 거예요' 같은 말이나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다' 같은 말도 상대에 따라서는 자길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사이는 좋지만, 여자끼리의 관계는 여러모로 복잡해서 피곤하다.

그나마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사귀었던 친구 몇몇과는 이런 타산을 어느 정도 접어둘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먹고사느라 피곤해 핸드폰으로 연락이나 가끔 주고받는 사이였다.

'결국 민석이 얘기는 상담도 못 하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는 해도 섹스 프렌드 같은 관계로 지내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더욱이, 그 남자가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반하게 하고 싶다거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간이라도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가끔 여자들끼리 나누는 19금 토크에도 정도라는 건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랑 진도는 좀 나갔어?"

"아.."

적당히 얼버무렸던 덕분에 한동안 듣지 않았던 질문이 다시 나와버렸다.

"그냥.. 퇴근하면서 가끔 같이 식사하고.."

"그리고?"

없다. 기껏해야 모텔까지 차로 가면서 이런저런 잡담이나 나누는 정도일까.

"주말에는 영화 보거나.. 여기저기 차로 데려다주는 정도만.."

"어머어머. 그동안 별 얘기 없더니, 할 건 다 하고 있었네. 가끔은 남자친구 자랑도 좀 하고 그러지."

"아하하.."

이번에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 뭘 하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적당히 그럴듯하게 내뱉었을 뿐이다.

물론 실제 진도는 훨씬 더 깊게 나간 상태였지만, 막상 식사 외에는 데이트다운 경험이 없으니 그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마침 나왔다고.. 적당히 말하면 눈치 못 채려나..?'

어제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영화 한 편 보자는 얘기를 꺼내 보겠다는 결심조차 내리지 못했다.

정말 얘기를 꺼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마주치고 나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지금 끝났는데, 기다리고 있어?]

"응. 앞에 세워 놨으니까 내려와."

[알았어. 갈게.]

뚝. 통화가 끊어진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차에 타고 나서 직접 하면 그만이었으니, 일이 끝나고 하는 연락은 늘 이렇게 짧은 확인으로 끝이었다.

통화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 정문에서 나온 엘레나가 차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예쁘긴 예쁘단 말이지."

비단처럼 찰랑거리며 윤기 나는 금발도 그렇고,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청순하고 예쁜 얼굴과 촉촉하게 젖은 보드라운 입술.

얼굴만으로도 S급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수준인데, 몸매 쪽은 가히 폭력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슴이 크고 허리는 날씬해서 S라인이 옷 위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물론 조금 타이트하게 입은 하얀 셔츠와 무릎보다 조금 위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H스커트가 몸매를 돋보이게는 해도, 보정 같은 건 전혀 없는 훌륭한 몸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벗겨놨을 때 더 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서양인 특유의 부드러운 유백색 피부는 몽마가 된 우리 애들로서도 따라 할 수 없는 개성이라, 매번 벗겨놓고 보면서도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학원 정문에서부터 인도를 가로질러 차 앞까지 도착하는 짧은 사이 엘레나의 외모를 만족스럽게 감상하고, 그녀가 조수석 손잡이에 손을 뻗는 모습을 보며 평소처럼 표정을 관리했다.

"오래 기다린 거 아니지?"

"딱 맞춰서 왔지. 누나 부담스러울까 봐."

여행을 가게 되면서 일주일, 아니 금요일을 두 번 걸렀으니 2주를 못 만났었지만 매일 만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이 편해진다.

걸어놓은 최면에 맞춰 이것저것 연기를 할 필요가 있는 상대들과 비교하면 엘레나는 깔끔하게 섹스 프렌드 같은 관계를 만들어놓은 덕분에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가 덜했다.

"그럼 다행이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너는?"

"오늘은 좀 든든하게 먹고 싶은 기분인데. 갈비 어때?"

평소라면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사이에 에스테틱에서 편안하게 힐링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엘레나를 마중 나왔을 텐데.

오늘은 마사지사 컨셉으로 최혜선을 상대해주느라 제법 힘을 써서 그런지 배가 상당히 고픈 상태였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지더라도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격한 운동 뒤에 배가 고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갈비? 음.. 괜찮겠네. 오늘은 내가 살게."

"응? 그냥 내가 사도.."

"맨날 얻어먹기만 하잖아. 가끔은 나도 사주고 그래야 눈치가 덜 보이지."

"그럼, 뭐.. 이번엔 얻어먹을게."

평소처럼 나긋나긋하면서도 단호함이 느껴지는 말투에 적당히 양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니 가능하면 내 쪽에서 여자들에게 이것저것 사주면서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싶은 편이었지만, 굳이 부담을 주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까.

평소처럼 비싼 곳으로 가버리면 한 끼에 4, 50만원 씩 나올 수도 있겠지만 엘레나가 사겠다고 나섰으니 적당히 괜찮은 가게로 방향을 틀었다.

"여행은.. 잘 다녀왔어?"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는데, 갔다 와서 보니까 장난 아니게 피곤하드라. 안 하던 일을 갑자기 해서 그런가."

뭔가 말투가 평소보다 조금 조심스러운 느낌이었지만 운전하는 도중이라 신경 쓰지 않고 적당히 대꾸했다.

자주 만나지 않는 상대들한테는 여행 간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지만, 엘레나처럼 주기적으로 만나거나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상대에게는 적당히 친구들과 놀러 가는 거라고 적당히 거짓말을 해놨기에 숨길 필요는 없었다.

"열흘이나 놀다 왔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지금은 괜찮고?"

"며칠 늘어져 있었더니 쌩쌩해졌어. 누나 만나야 하는데, 빌빌대고 있으면 안 되잖아."

"말은 잘해.."

"누나는? 별일 없었어?"

"나야 뭐.. 집이랑 학원만 왔다 갔다 하는데, 평소랑 똑같았지. 별일 없었어."

"흐음.. 그래?"

별일 없었다고 하는 것치고는 목소리에 묘하게 기운이 없다. 조금 심란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아무 일도 없어서 가볍게 불평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말하고 싶었다면 솔직하게 얘기를 꺼냈을 테니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하고 적당히 넘어갔다.

"오늘은 술도 좀 마실까? 모처럼인데."

"술? 나야 상관없기는 한데.. 갑자기 왠일로?"

"그냥 좀 마시고 싶어서. 괜찮지?"

"마시고 싶으면 마셔야지. 누나가 사는 거기도 하고. 마음대로 해."

기본적으로 술 마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기왕이면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따먹는 게 반응도 좋고 더 오래 버텨주는 편이라 여자도 마시지 않는 쪽을 더 선호했지만 마시고 싶다는 걸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깔끔하게 식사만 했었는데.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하는 걸 보면 뭔가 고민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은 캐묻지 않기로 하고, 종업원이 구워주는 갈비를 먹으면서 술자리를 시작했다.

"짠 할까?"

"그래."

짠,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잔이 가볍게 부딪힌다.

그리고는 내 쪽에서 먼저 잔을 한 번에 비워주자, 누나도 살짝 눈치를 보다가 될 대로 되라는 듯 잔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으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소주 한 잔에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니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좋아했으면 진작에 마시자고 했었겠지.'

아침이나 점심도 아니고, 일 끝나고 같이 저녁을 먹은 게 몇 번인데. 그동안 얘기도 안 나왔던 걸 보면 애초에 술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누나, 주량은 얼마나 돼?"

"주량? 음.. 한 병 정도는 괜찮은데. 그 이상은 안 마셔봐서 잘 모르겠네. 너는?"

"두 병 정도까진 괜찮아."

사실 일전에 클럽에서 확인해본 결과로는 그냥 평범하게 마셔서는 취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인 것 같았지만 적당히 줄여서 대답했다.

"그래? 대학 때 남자애들 보면 자기 주량 막 부풀려서 말하고 그러던데. 그런 건 아니지?"

"뭐 하러 그래?"

"남자들은 막, 주량에 자존심 같은 거 있고 그러잖아."

"무슨, 애도 아니고. 안 그래."

오히려 허세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줄여 말한 입장에서는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만한 오해였다.

"그래도 너무 많은 것 같으면 반 병만 빼자."

"무슨 말이야?"

"진짜 주량은 본인이 말하는 거에서 반병은 빼는 게 맞다잖아. 누나가 말한 것처럼 허세 부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푸흣. 뭐야, 그럼 난 주량이 반병이야?"

어디서 들었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적당히 농담조로 말을 뱉었더니 엘레나의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 풀어지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조금이지만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반병만 마셔주면 더 좋지."

"응? 왜?"

"취한 누나랑 하는 것도 귀여워서 좋을 것 같긴 한데. 너무 취해서 금방 잠들어버리면 어떡해. 간만에 누나랑 만나는 거라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읏..!"

뜬금없이 던전 노골적인 섹드립에 엘레나의 뺨이 확 붉어진다.

"뭐야, 누난 기대 안 했어? 그래도 2주 만에 만나는 건데."

"아, 아니..! 너무 갑자기 확 들어오니까 그렇지..!"

"그럼, 기대했어?"

"하기는.. 했는데.. 몰라..!"

이미 대답해놓고는 뭘 또 모른다는 건지. 방금 한 잔을 비웠으면서 곧바로 병을 기울여 잔을 채우고는 두 잔째를 확 비워버린다.

기대했다는 것도, 취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도 진심이었는데. 어째 내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확 취해버릴 것 같은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