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0화 > 첫날밤은 순번제로 돌아갑니다 (1)
"미쳤어, 진짜."
"안 들켰으면 됐지 뭐."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김민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적당히 웃으며 대답했다.
모처럼 온 여행인데 시작부터 야외에서, 그것도 다른 여자랑 시끄럽게 즐겨댔으니 특히 질투심이 강한 김민아로서는 짜증이 날 만도 했으니까.
그게 아니면 정말로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서 저러는 걸지도 모르는 거고. 어느 쪽이든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다.
"되긴 뭐가 돼!? 서연 언니가 다 커버해줘서 겨우 넘어간 거지."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서연이 덕분에 산다니까."
"당연한 일인데요."
객실을 나오면서부터, 남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유서연을 옆에 끼고 걷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대답하는 듯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목소리가 가볍고 잔잔하게 들려왔다.
다른 승무원이 객실로 들어왔을 때. 눈치 좋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유서연은 곧바로 최면을 걸고 승무원의 주의를 돌린 뒤에 밖에서도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비행기가 생각보다 방음이 잘 되는 모양인지, 문에서 가까이 있어야 희미하게 들리는 정도라는 대답을 듣고는 내가 KTX에서 했던 것처럼 특별한 서비스를 진행 중이니 신경 쓰지 말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최면을 마무리했다.
물론, 확실하게 비밀 유지까지 시켜서.
KTX에서 내가 야외 플레이를 했다는 건 애들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나랑 같은 방식으로 최면을 건 걸 보면 그냥 기특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하아, 진짜. 언니, 언니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응? 나?"
나와 유서연이 찰싹 달라붙어 앞장서 걷고, 뒤에서 김민아와 나란히 걷던 임예진이 대뜸 바톤을 넘겨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태연스럽다.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그렇게 대놓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들키면 어쩌려고.."
"그거야 뭐.. 최면만 잘 걸어놓으면 괜찮잖아.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안 걸렸으니까 됐고."
"아니...."
지금 상황에 불만을 품은 게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김민아는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임예진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다 보니 할 말을 잃은 모양이다.
애초에 몽마가 된 뒤에도 나와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집에서만 지냈던 김민아와는 달리 다른 둘은 상하 관계를 확실하게 해두고 다른 여자들까지 바치게 돼버렸으니 사고방식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론 조심할 테니까 기분 풀어. 모처럼 놀러 왔는데, 초장부터 인상 쓰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다 누구 때문인데.. 하아.. 몰라. 알아서 해. 걱정해봤자 나만 손해지."
그래도 내 쪽에서 살짝 굽히고 들어가니 더는 뭐라고 하지 않고 넘어가 준다.
그리고 공항에서 나와서는, 곧바로 차를 렌트해 숙소로 향했다.
식사는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때웠으니 할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저녁 시간대에 출발한 탓에 본격적인 관광은 내일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다.
"목적지가.. 하코네라고 했었지?"
"네. 온천 관광지로 유명해요. 유명한 온천 관광지는 몇 군데 더 있긴 한데, 하코네 쪽이 제일 고급이라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그래?"
운전석에 혼자 앉아 차를 몰면서도 관광 가이드처럼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유서연의 설명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하다고는 해도 여행에 아무 관심도 없이 살았던 탓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지만 유서연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을 뿐이다.
원래 운전은 내가 하려고 했었는데, 유서연이 이번에야말로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부탁하길래 운전대를 넘긴 탓이었다.
"숙소도, 객실마다 노천탕이 있는 곳으로 잡아뒀으니까 번잡하지 않고 편하게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그건 기대되네."
지금도 어지간해서는 하루에 한두 시간씩은 꼭 욕탕에서 발을 쭉 뻗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정도로 목욕을 좋아하는 터라 온천 얘기가 나오니 확실히 기대가 된다.
개다가, 객실마다 노천탕이 있다는 건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뜻이었으니 더더욱 좋았다.
아무래도 물에 몸을 담근 상태에서는 푹 늘어지고 싶은 마음에 섹스하는 걸 별로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기간이 일주일이나 되니 온천에서 몇 번 정도는 즐기게 될 게 분명했다.
아마 이런 점도 고려해서 숙소를 고른 게 분명했다.
"여행은 다 좋은데, 이렇게 돌아다니는 시간이 너무 심심하지 않아?"
뒷좌석 한가운데는 내가 앉아있고, 양옆에는 김민아와 임예진이 몸을 비벼대듯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상태.
처음에는 집에서 막 차를 몰고 나왔을 때처럼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것마저도 지루했는지 김민아 쪽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심심할 시간에 바깥 경치도 즐기고, 혼자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그런다던데요? 오히려 그게 여행의 묘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딴 세상 얘기구만."
"그러게. 놀러 와서 웬 사색이래?"
옆에서 멍하니 핸드폰을 보고 있던 임예진이 대화에 끼어들어 그럴듯하게 설명을 내뱉었지만 나나 김민아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반응이 영 심드렁했다.
바깥 경치? 도심이야 한국이나 일본이나 간판에 써진 글자가 일본어라는 것만 빼면 비슷한 느낌이고, 지금은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중이라 볼 것도 없었다.
"서연이는 아예 유럽까지 가 봤으니까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네. 어땠어?"
"저도 뭐.. 심심한 건 마찬가지였죠. 그래도 그때는 스트레스가 좀 쌓여있던 상태라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좀 풀리긴 했어요. 조용히 힐링하는 느낌? 관광지도 그럭저럭 볼 만 했었고요. 사색 같은 건 저도 안 했고요."
"힐링이라."
되새기는 것처럼 중얼거리긴 했지만 이것도 별로 공감 가는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
"뭔데? 뭐 알았어?"
나도 모르게 알았다는 듯이 짧게 탄성을 흘렸더니 김민아 쪽에서 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우린 힐링이 필요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다들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살고 있으니까. 뭐 스트레스 쌓이는 일이 있어도 섹스로 다 풀고 있기도 하고."
"어.... 그런가..?"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필터 없이 주르륵 늘어놓자 김민아도 정말 이게 정답인가 싶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반응했다.
"하긴, 그렇긴 해요. 저만 해도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느낌이니까요. 무슨 힐링이 필요하겠어요. 일도 돈 걱정 없이 취미 수준으로 하고 있는 거고, 남들 다 하는 결혼이나 노후 걱정도 전혀 안 하고 있잖아요."
임예진 역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이 내 말에 추가로 살을 붙여 설명을 늘어놨다.
"아마 한창 스트레스받으면서 지낼 때 왔으면 달랐을 수도 있죠. 민아 너도, 주인님이랑 만나기 전에 혼자 왔으면 전혀 달랐을 수도 있지."
"음..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긴 해요. 요즘은 진짜 스트레스 없이 지내고 있으니까."
당장 이렇게 대답하는 김민아만 해도 처음 만났을 때는 1년 재수한 공시생이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있는 상태였고, 공시에 합격한 뒤에도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잦은 야근과 적은 월급에 일을 때려치우고 7급을 볼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임예진 역시, 처음 만났을 때는 불감증에 대한 스트레스로 지금이랑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빛이나 표정에 날이 서 있는 데다가 성격도 까칠했었고.
유서연이야 뭐, 직접 시달렸던 입장인 만큼 아예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분위기와 성격이 변했다는 게 느껴졌었으니까.
"그래도, 다 같이 다니면서 관광지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면 좋잖아요. 지금이야 좀 지루해도 기대가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 기대해 봐야지."
"헤헤."
옆에서 다시 분위기를 띄워주는 임예진의 말에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팔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기분 좋게 헤실헤실 웃으며 밀착시킨 몸을 고양이처럼 비벼댄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도도한 고양이 같은 인상이었는데, 지금 보니 활기 넘치고 애교 많은 골든 리트리버 같은 인상이 돼 있었다.
반대쪽에는 김민아가 뾰로통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길래 똑같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더니 자존심이 상하는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공항에서 여관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던 덕분에 지루한 시간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나온 뒤부터는 조금씩 경치가 변하더니, 이내 시야에 녹색이 점점 많이 비춰지고, 인터넷에서 이미지로나 봤을 법한 깔끔한 일본 시골 마을 같은 경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와.. 확실히 분위기부터 다르네."
"그러게. 이제 좀 여행 왔다는 느낌이 든다."
어지간히도 지루했는지 핸드폰만 보던 김민아와 임예진도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하니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문 밖의 풍경을 멍하니 쳐다볼 정도였다.
여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료칸 안으로 들어가니 곧바로 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모노 차림의 여자가 우리를 맞이해줬다.
"어서 오세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법 듣기 좋다.
어서 오라는 인사 정도야 일본어에 관심이 없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고, 나 같은 경우에는 영어때처럼 학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몇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은 집에서 일본어를 공부해온 덕분에 대화가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건.
'30대.. 중반 정도인가?'
료칸 주인인지 직원인지. 아무튼 들어오자마자 처음 만난 여자의 미모가 상당하다는 점이다.
기모노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직접 본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보통 옷과 비슷한 느낌이라면 최소 E컵은 될 것 같은 사이즈다.
개인적으로 여자는 30대 초반 정도까지가 먹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보니 30대 중반도 나쁘지 않다 싶을 정도로 농염한 매력이 느껴졌다.
"하여간.."
옆에서는 김민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투덜거렸지만, 나만이 아니라 남자인 이상 눈앞에 맛있어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는데 눈길도 주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읏..!"
그래도 질투하지 말라는 의미로 김민아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확 끌어 품에 당겨놓으니 움찔하면서도 얌전히 품에 안겨 있는다.
"유서연으로 예약했는데요."
아직 조금 딱딱하고 어눌한 내 일본어와는 다르게 유서연의 일본어는 굉장히 매끄럽다.
원래부터 할 줄 안다고 하기는 했지만 여행 계획은 두세 달쯤 전부터 세워뒀을 테니 유서연의 철저한 성격상 다시 연습해뒀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예. 유서연 님. 우선 객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관광 기분이야 고속도로에서 벗어났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일전에 지냈던 호텔과는 다른 고급 료칸의 객실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씩 기대감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