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6화 > 비행기에도 VIP 서비스는 존재한다 (1)
"서연이 바지 입은 건 오랜만에 보네?"
"어? 그러네요?"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파트에서 출발하기 직전. 현관 앞에서 문득 눈에 띄인 유서연의 옷차림에 다 같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기본적으로는 날이 춥건 덥건, 오피스 정장에 짧은 하이웨스트 치마만 고집하는 유서연이었기에 바지를 입은 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다르게 느껴졌다.
어두운 회색 계열 청바지에 깔끔한 와이셔츠 차림은 공들였다고 하기에는 심플한 코디였지만 얼굴과 몸매가 받쳐주니 그것만으로도 화보처럼 보인다.
특히 가슴 쪽은 정장 마이를 벗은 탓에 압박이 풀어져 남녀를 안 가리고 다 한 번씩은 돌아볼 정도로 굴곡이 두드러져 있었다.
"어울리네. 가끔은 이렇게 입어도 괜찮겠다."
"그러게. 언니 몸매면 옷 고르는 재미도 있을 텐데. 왜 정장만 입고 다녀요?"
"정장만 입는 건 아닌데.."
"에이. 밖에서는 매번 정장이잖아요."
김민아의 말대로, 집에서는 나름 편하게 실내복 차림으로 돌아다니긴 하지만 밖에 나갈 때는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장만 입고 다닌다.
물론 같은 정장이라고는 해도 여름용, 겨울용이 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불편한 차림일 테니 이상하게 보이긴 할 것이다.
"그냥.. 귀찮아서 그래."
"네?"
"주인님 말고는 잘 보일 상대도 없는데. 꾸미고 다니기 귀찮잖아. 그렇다고 아예 막 입고 다니기는 싫고. 정장 차림 정도면 눈에 띄지도 않고 적당히 예쁘니까 입고 다니는 거야."
"어.. 음.. 그렇구나."
나와 임예진은 이미 들었었지만, 김민아는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저는요? 저도 어울리죠?"
불쑥 대화에 끼어든 임예진이 자기도 봐달라며 몸을 활짝 편다.
유서연이 편하고 캐주얼하게 입었다면, 임예진은 오히려 가볍게 입고 다니는 평소와는 달리 종아리보다 조금 더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롱스커트에 베이지색 목폴라 니트를 입어서 단정하게 입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예쁘지."
"치. 너무 대충 대답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쩌겠어. 뭘 제대로 알아야 칭찬이라도 해주지. 그래도 예쁘다는 건 진심인 거 알지?"
"헤헤. 알죠."
내 성의 없는 평가에 살짝 뺨을 부풀렸다가도, 곧바로 기분이 풀어져서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찰싹 달라붙어 왔다.
그리고 김민아는.
"뭐, 할 말 있어?"
"아니, 뭐.."
뭘 입었는지도 모르게 검은색 롱패딩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 뭐라고 말해주기 애매했는데. 눈만 살짝 마주쳤는데도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걸 보니 자기도 옷차림이 신경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 모습으로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검은색 바지를 입었다는 것과 하얀색에 남색이 섞인 스니커즈를 신었다는 것 정도뿐이다.
"지도 똑같이 입었으면서."
"춥잖아."
"나도 춥거든?"
여름에 갔다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월이 끝나고 11월로 넘어가는 시기라 날이 춥긴 했다.
"아무튼,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몰라."
다른 두 사람이 눈앞에서 칭찬받으니 자기만 안 해줬다고 삐진 걸 수도 있고.
"민아는 괜찮겠고, 너희들은? 안 춥겠어?"
"지금은 괜찮아요. 겉옷도 일단은 챙겨뒀고요."
"저도요."
"그럼 됐고. 가자."
모처럼 가는 첫 해외 여행인데, 시작부터 물고 빨기는 뭐해서 자기가 운전하겠다는 유서연을 뒷좌석으로 보내놓고 혼자 앞에서 차를 몰았다.
처음에는 좀 조용한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잘 논다.
얘기는 주로 김민아의 방송 얘기나 임예진의 모델 쪽 얘기였고, 일하면서 누가 짜증 나고, 무슨 일이 있었고 하는 얘기를 주고받다 보면 유서연도 끼어서 한 마디씩 감상을 내뱉는 식이었는데, 덕분에 가는 길에도 귀가 심심하지는 않았다.
"평생 여행 같은 건 갈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공항도 처음 와 보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공항 안으로 들어온 김민아가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여행은 무슨. 그냥 직장이랑 고시원만 왔다 갔다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달 동안 결정도 못 내리고 고민만 했을 정도였으니까.
고등학교 때는 수학 여행을 제주도로 갔었지만 돈이 없어서 빠졌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여행이 뭐가 좋고 뭐가 재밌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애들이 가자고 하니 따라왔을 뿐이다.
혼자 여행을 가볼 계획을 세운 것도, 외국인 미녀와 제대로 즐겨보겠다는 목적이 있었을 뿐이지 여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엘레나는 외관만 보면 두말할 것 없는 외국인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말투나 행동거지는 한국인이나 다름없어 미묘한 느낌이었다.
"아, 저도 처음이에요."
"그래?"
"대학생이었으니까 나름 바쁘기도 했고, 불감증 문제 때문에 다른 데 신경을 전혀 안 썼거든요. 주인님이랑 만날 때쯤에는 거의 포기 상태라, 졸업하고 가볼 생각이 있긴 했었는데. 주인님이랑 만나면서 다 해결됐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모습이 귀엽다.
임예진 역시, 유서연 만큼이나 애정이나 맹목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이유가 있었다.
"서연이 너는?"
"저는.. 유럽에 한 번 다녀오긴 했었어요. 주인님이랑 만나기 전에, 연휴 때 기분전환 삼아서 갔던 건데, 별로 재미는 없었어요."
"오.."
확실히 부잣집 따님이라는 느낌이 확 든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니까 오히려 더 자랑하는 것 같은데."
"맞아요. 좀 재수 없는.. 아, 아니에요."
그냥 오, 하고 넘어간 나와는 달리 임예진과 김민아는 유서연에게 한마디씩 하다가, 싸늘한 시선을 받고는 다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와, 저게 다 면세점이지? 좀 구경하다 갈래?"
"이왕 볼 거면 돌아올 때 보는 게 낫지 않냐? 지금 가서 뭐 사 봤자 짐만 늘어나는 건데."
"아, 좀! 누가 당장 산대? 구경만 좀 하다 가자고! 아직 시간도 좀 남았잖아!"
면세점에서는 평소 이상으로 텐션이 높아진 김민아가 너무 강경하게 몰아붙이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구경에 어울려 줘야 했다.
당장 살 것도 없고, 생긴다고 해도 지금 사 봤자 짐만 늘어나는데 구경이 꼭 하고 싶은가 싶긴 했지만 유서연이나 임예진까지 해서 셋이 몰려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통에 빨리 가자고 재촉할 수도 없었다.
남자들이 여자랑 어울리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구간이 백화점 쇼핑이라는데. 그 부분에서는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이다.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지금은 진짜 가족 이상으로 가족처럼 느껴지는 세 사람이었기에 지루하고 피곤하기는 해도 이 정도는 얼마든지 어울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활기 넘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만족한 김민아와 두 사람과 함께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좌석은 당연히 퍼스트 클래스로 예약했다.
이제는 유서연이 집안 쪽에서 돈을 끌어올 것도 없이, 에스테틱에서 들어오는 수익이나 임예진, 김민아가 버는 돈도 제법 되는 덕분에 부담 가는 수준은 아니라는 모양이었다.
"와.. 넓다. 비싼 값은 하는.. 건가..?"
"왜 말이 애매해져?"
"아니, 그래도 좀 비쌌잖아. 비행기 한 번 타는데 돈이 무슨.."
이제는 기차 일등석도 타 보면서 가난한 사고가 조금 빠진 나와는 달리 김민아는 아직 물이 덜 빠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집에서 방송만 하고 있으니까.'
범위가 좁기는 해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나와는 달리 김민아는 정말 밖에 나가는 일조차도 드물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는..'
총 12석. 김민아의 말대로 비싼 값은 하는 모양인지 KTX보다도 좌석 수가 훨씬 적었다. 심지어 5자리는 비어 있었고.
"편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자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심심하겠다."
"어차피 2시간이면 도착하는데 뭘. 영화라도 한 편 보면 되지. 비행기에서 영화도 볼 수 있다더라."
"그 정돈 나도 알거든? 하여튼,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자리가 멀리 떨어졌다기보다는 그냥 창가 쪽에 일렬로 쭉 있는 좌석을 고른 것뿐이지만 확실히 비행 중에는 얘기를 주고받을 수 없는 배치이긴 했다.
투덜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자리에 털썩 앉는 김민아를 보고는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래도 처음 타는 거라고, 신기하긴 하네.'
기차도 처음 타보는 거긴 했지만 그때는 전철이랑 느낌이 비슷해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비행기는 확실히 좌석도 넓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데다가 창밖의 풍경도 탁 트여 있어 신선하게 느껴졌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이륙하겠습니다. 안전을 위해 안전벨트를..]
그리고 시간이 되자 안내 방송이 들려왔고,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과 함께 창밖의 풍경이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가 천천히 활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객실 내부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KTX에서 봤던 승무원들이 70점, 75점짜리 미인이라면 지금 객실 안을 돌아다니는 승무원은 80점은 되는 확실히 예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승무원은 좀 별로긴 한데. 그래도 이왕 탄 김에 먹긴 해야겠지?'
아무래도 승무원들은 인상도 비슷한 사람들만 뽑는 느낌이고, 머리 모양이나 화장도 다 똑같이 통일하다 보니 뭔가 취향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그래도 저번에 했던 기차 섹스가 꽤나 기분 좋기도 했고, 이런 장소에서만 즐길 수 있는 플레이였으니 제대로 즐기기로 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 잠시만요."
내가 일어나자마자, 객실을 돌아보고 있던 승무원이 다가와 영업용 스마일과 함께 말을 걸었지만 일단은 주변에 최면을 거는 게 먼저였기에 적당히 대꾸하며 천천히 객실을 돌며 승객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항공사의 VIP 고객 중에서도 일부 특별한 고객은 승무원에게 성처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객실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항공사 서비스의 일부이므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객실 내에서 남이 섹스하는 걸 훔쳐보는 건 아주 매너 없고 부끄러운 행동이다.]
[비행기에서 남이 섹스하는 걸 봤다고 남에게 얘기하는 건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부끄러운 행동이므로 절대 누군가에게 얘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 수가 적은 만큼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도록 강하게 최면을 집어넣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야, 야..! 갑자기 뭐 하는 건데..!"
김민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을 붉힌 채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한껏 죽이면서도 최대한 힘을 줘 따지고 들었다.
"내가 최면을 써봤자 뭐, 이상한데 쓰겠어? 쓰는 이유야 뻔하지."
"미, 미친놈..!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하는 건 싫다고..!!"
"..아."
아직 뭘 시작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정색하고 따지나 했더니. 여기서 자기랑 섹스하려고 이러는 건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나도 네 맨살 남한테 보여줄 생각 없어."
"그, 그럼 왜.."
"승무원이랑 하려고. 비행기에서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즐겨야지."
"..윽!"
당연히 자기랑 할 거라고 착각했던 게 부끄러운 건지, 승무원이랑 한다는 발상에 당황한 건지는 몰라도 안 그래도 빨갰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벼, 변태 새끼..! 맘대로 해..!"
그리고는 다시 등을 홱 돌려 자기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 돌아가 버렸다.
다른 둘은 내 의도를 알아챈 건지, 얌전히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 힐끔 시선만 돌려 눈을 마주쳤을 뿐 얌전히 있었기에 따로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객실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승무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