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452화 (452/775)

< 452화 > 캠퍼스의 최면 빌런 (5)

'60점. 70점. 60점.'

정혜수가 친구라고 데려온 여자들의 외모를 빠르게 훑으며 점수를 매겼다.

내 눈이 너무 높아진 것도 있지만, 그나마 70점을 받은 한 명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둘은 관심도 가지 않았다.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며 차에 가까워지던 세 사람의 눈빛이 이쪽을 관찰하듯 똑바로 날아들었다.

썬팅을 짙게 해 놨으니 내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닐 테고, 차를 살피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둘은 별다른 지식이 없는 모양인지 눈빛에 변화가 없었지만, 70점짜리 여자애는 조금 놀란 듯 눈동자가 작게 떨리는 게 보였다.

'하여간 있는 애들이 더 하다니까.'

무조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외모도 원판이 예쁜 애들이 더 정성껏 관리하고, 명품이나 메이커도 열심히 따지곤 했다.

사실 SKY급 대학에 합격하려면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공부에만 쏟아야 했을 테니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일 텐데.

비싼 차종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여유가 있든, 대학에 와서 관심이 생겼든 간에 얼굴값을 한다는 점에서는 참 부조리한 세상이다 싶었다.

덜컥. 차 앞문이 열리면서 정혜수가 옆자리에 앉았고, 다른 셋은 순서대로 뒷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저쪽 무리에서는 70점짜리 여자애가 리더인 모양인지, 그쪽이 먼저 입을 열고 나서야 다른 둘도 뒤따라 앵무새처럼 똑같이 실례합니다. 하고 말했다.

"혜수 친구분들이라고요? 반가워요. 혜수 남자친구입니다."

"자, 잘 부탁드려요."

운전석에 앉은 채로 몸만 틀고 고개를 내밀어 세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탈 때무터 내 얼굴에 관심이 있었는지 백미러를 열심히 쳐다보던 세 사람은 내 얼굴을 정면에서 확인하고 나서야 놀람과 감탄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얌전해졌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수 친구들이니까, 제가 살게요."

"으음.."

"그럼.."

됐다. 괜찮다. 그런 말은 하지도 않고 곧바로 뭘 먹을지 고민부터 하는 모습을 보니 꽤나 뻔뻔한 성격들이다.

대학에서는 여자 후배들이 남자 선배한테 애교 부리면서 밥 사달라고 호구 잡는 얘기는 대학에 안 가본 나도 알 정도로 흔한 얘기긴 했다.

어차피 하이엔드 급 스시라도 사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밥 한 끼 사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부대찌개 어때요?"

"부대찌개? 나야 좋지."

뜻밖에도 정혜수 쪽에서 먼저 먹고 싶은 메뉴를 정했다.

만났던 기간이 길었던 건 아니었지만 같이 어울리면서 한 번도 뭐가 먹고 싶다며 메뉴를 정해준 일이 없었기에 굉장히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애초에 내 쪽에서 뭘 먹을지 정해놓고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식사 전에는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긴 했으니까.

"부대찌개 어때요?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아, 저도요."

"저도 괜찮아요."

뻔뻔하기는 해도 여기서 다른 게 먹고 싶다고 새로 의견을 낼 정도는 아닌 모양인지 셋 다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근처에 먹을 만한 데가.."

"제가 봐둔 데 있어요. 여기로 가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가게를 검색해보려고 하는데, 정혜수 쪽에서 곧바로 자기 핸드폰을 내밀어 가게 주소가 적힌 블로그 리뷰를 보여줬다.

"리뷰도 있는 거 보니까 맛집 같은 곳인가 보네?"

"유명해요. 주택가 근처에서 하는 곳이라 점심시간에는 줄 설 필요도 없고요."

"그럼 여기로 가보자."

네비로 찍어보니 학교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 부담도 없었다.

차를 출발시키고, 첫 신호가 걸린 시점에서 여자애들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냈다.

"혜수랑은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혜수가 말 안 해줬어요?"

"네. 오빠 이름이랑 나이는 알려줬는데, 다른 건 아예 말을 안 해주더라고요."

"그래요? 전 말해도 별로 상관없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옆자리에 앉은 정혜수 쪽으로 힐끔 시선을 돌리자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운전면허 학원에서 만났다가, 첫눈에 반해서 제가 번호 달라고 꼬셨어요. 처음에는 거절당했는데, 계속 마주치면서 매달리니까 귀찮았는지 결국은 받아주더라고요. 한 여섯 번 차였었나?"

"......"

즉석에서 떠올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내뱉자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정혜수가 다시 이쪽을 홱 돌아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아. 여섯 번이나요?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는데요?"

"그냥, 예쁘잖아요. 그리고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냥 딱 보자마자 꽂혔다고밖엔 말 못 하겠는데. 사귀어보니까 귀여운 면도 많고. 아무튼 그냥 좋아요."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한 칭찬이었지만 정혜수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진 게 보였다.

예쁘다는 것도, 귀엽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긴 했다.

"오빠는 무슨 일 해요?"

나와 정혜수의 사이에 대한 조사는 얼추 끝난 모양인지, 다른 목소리로 새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냥, 부모님 사업하시는 거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일도 배우면서요. 사업이라고 해도 그냥 공장 하나 돌리는 수준이라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요."

사업이라고는 해도 정확히 무슨 사업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공장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세 사람에게 적당히 최면을 집어 넣었다.

[사업 쪽 얘기는 자세히 묻지 않는다. 최민석은 잘 사는 금수저다.]

'귀찮게 말이야.'

이미 정혜수에게 부모님 일을 돕느라 바쁘다고 거짓말을 해놓은 탓에 카페를 차리려고 준비 중이라는 거짓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다 귀찮아져서 사업은 부모님 대에서 끝내기로 하고, 카페나 하나 차리고 유유자적 지내기로 했다고 말을 뒤집을 수는 있겠지만 당장은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카페 쪽은 좀 서두르라고.. 말은 못 하겠네.'

재촉할 수는 있겠지만 이미 부지를 구해서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고 있다는 모양이었으니까.

내가 바다에 놀러 간 사이에 시작한 일이라 아직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아파트보다는 김민아의 오피스텔과 가까운 곳이었다.

돈이 목적이었다면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가게를 차렸겠지만, 적당히 명목상으로 굴리고 내가 원하는 알바를 골라 따먹는 게 목적이었기에 다니기 편한 곳을 골랐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미 공사까지 들어간 마당에 유서연을 재촉해봤자 나올 게 없었다.

"그럼 일 때문에 바쁘시지 않아요?"

"바쁘다고 여자 친구 얼굴도 못 볼 거면 애초에 사귀지도 않았죠. 최근에는 너무 못 만나서 반쯤 억지로 휴가받아서 온 거예요. 혜수도 대학 다니는 동안은 시간 내기 힘들 테니까 제가 맞추려고요. 제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거잖아요."

최대한 착하고, 여자 친구를 신경 써주는 느낌으로 말했다.

잘은 몰라도, 최대한 트집 잡힐 거리는 없는 게 좋을 테니까.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뒤에서 남친이 이건 괜찮은데 이게 좀 깨더라, 별로더라. 그런 얘기가 떠돌면 정혜수 쪽에서도 기분이 나쁘긴 할 것이다.

"혜수는 어때요? 학교에서 누가 괴롭히거나 귀찮게 구는 건 없죠?"

"으음.. 그런 건 없을걸요?"

잠깐 고민까지 한 주제에 대답이 애매했다.

이미 반쯤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역시 친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귀찮게 구는 남자라도 있다고 한다면 의심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하기야, 그랬다면 정혜수 쪽에서 먼저 누가 의심스럽다고 먼저 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가게에 도착한 뒤에도 밥을 먹으면서 온갖 귀찮은 호구조사에 시달렸다.

몸이 좋은데 따로 운동하는 게 있는지, 취미는 뭔지, 혜수 말고도 연애 경험은 있는지, 어떤 점이 귀엽다고 느껴지는지, 차는 얼마짜리고, 집은 어디인지.

누가 보면 저쪽이 정혜수의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별의별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며 정보를 캐갔다.

어떤 질문은 솔직하게 대답해주고, 어떤 질문은 적당히 최면으로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어떤 질문은 적당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 들러 마실것까지 챙겨준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와 정혜수의 친구들을 내려줬다.

"잘 먹었어요, 오빠~"

"잘 먹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오빠라는 건지. 같은 1학년들일 테니 내가 연상은 맞겠지만 이렇게 처음 만난 사이에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도 대단하다 싶었다.

친구들이 차에서 내리고, 저 멀리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창문을 올리자 그제서야 시종일관 조용했던 정혜수의 입이 열렸다.

"하아아.."

"많이 피곤해?"

"그럼, 당연히 피곤하죠. 말이 친구지, 과제 하면서 말 몇 번 섞어본 애들이 어제 오빠랑 붙어있던 거 보고 갑자기 친한 척하면서 달라붙는데. 다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근데 왜 갑자기 친한 척 한거래?"

"할 짓이 없으니까 그렇겠죠. 만약 사귀는 게 아니면 소개해달라고 귀찮게 굴 생각이었을 수도 있고요."

"세 명인데?"

"몰라요. 지들끼리 알아서 정했겠죠. 한 명 밀어주고 나머지는 오빠 친구라도 소개받는 느낌으로.. 걔들이 무슨 생각인지 알 게 뭐예요. 다 골 빈 애들인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랄하게 말이 쏟아져 나왔다.

"진짜.. 부대찌개 집도 오빠랑 가려고 알아봐 둔 거였는데.."

"그랬어?"

"..맨날 얻어먹기만 했으니까, 한 끼라도 제가 사려고 했죠."

"뭐야, 왠일로 솔직하네?"

"..몰라요. 아무튼, 그냥 냅두면 오빠가 걔들한테 비싼 거 사 먹일 것 같아서 막은 거예요. 그래봤자 더 빌붙기나 할 텐데. 귀찮아서라도 대충 먹여서 보내는 게 낫죠."

"그래? 한 끼 먹여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비싼 거 먹여주면 네 이미지라도 좀 좋아지지 않아?"

"뭐가 좋아져요? 그냥 호구 하나 잡았다고 생각하고 또 뭐 얻어먹을 거 없나 기웃거리기만 한다니까요."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어."

"밥 먹을 돈도 없으면 알바라도 하느라 축 쳐져서 지냈겠죠."

이미 정혜수의 머릿속에서는 그 셋이 자신을 귀찮게 구는 빈대 정도로 확실하게 자리가 잡은 모양이었다.

"아, 그래도 걔는 예쁘더라. 누구더라, 정화?"

"......"

"아, 그래도 당연히 혜수가 더 예쁘지. 내가 뭐 설명 안 해도 알고 있잖아."

그나마 눈에 찼던 70점짜리 여자애 얘기를 꺼냈더니 정혜수의 눈빛에 언짢은 기색이 맴돌아 곧장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본인 역시 자기가 더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는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기분이 나쁜 모양인지 눈빛이 그대로였다.

"그냥 놀리려고 해본 말이었어. 아직 강의 남았지? 몇 시야? 한강 가서 바람이나 쐬다 올래?"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요."

"그럼 한강은 저녁때 가자. 가서 같이 치킨도 먹고, 바람도 쐬고. 괜찮지?"

"..마음대로 해요."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뺏어도 괜찮나 싶긴 했지만 본인도 마냥 싫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홱 돌려 표정을 숨기면서 대답하는 모습에 살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화해한 기념으로 뽀뽀 한 번 해줘."

"아니, 뭔.."

"안 해줄 거야?"

"..하아."

정혜수는 내 뜬금없는 요구에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되돌리고는 천천히 몸을 내밀어 입을 맞춰 왔다.

서정화. 70점짜리 여자애. 역시 한 번 정도는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적어도 정혜수와 지내는 동안에는 괜찮다 싶으면 먹고 보는 잡식성이 되어 보기로 했다.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최민석과 한 번쯤은 섹스해보고 싶다.]라는 최면을 넣어서 돌려보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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