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 스토커 대책 경호원 겸 섹스 파트너 (2)
나름대로 풀어진 분위기에서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정혜수의 집 주소를 네비에 찍었다.
"뭐야, 학교에서 꽤 먼데?"
네비에 찍힌 위치는 학교에서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었다. 차로 다니면 금방이겠지만 한수영은 차가 없었다.
"..걸어서 20분 정도니까 다닐 만해요. 거의 하루 종일 앉아있는데, 그럴 때라도 걸어야죠."
"버스도 안 타?"
"정류장도 10분은 걸려요. 버스 기다리고 뭐하고 할 거면 그냥 걷는 게 낫더라고요."
"차라리 기숙사라도 들어가지 그랬어."
"신청 기간이 아니었어요. 학기 중간부터 시간 아끼려고 자취 시작한 거라. 그땐 스토커 같은 것도 없었고. 이번 학기도 이미 신청이 끝났고요."
"운이 없었네."
그 외엔 해줄 말이 없었다.
나야 이제 돈 걱정 없이 산다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그렇게 사는 건 아니었으니까.
정혜수 같은 경우에는 집이 조금 잘 사는 중산층 정도 수준이라고 했었으니 서울에 전세를 구하거나 보안이 좋은 비싼 오피스텔 같은 곳에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아.. 진짜 짜증 난다니까요. 세상에 할 일이 그렇게 없나.."
"그래도 난 좀 고마운데? 덕분이 이렇게 휴가도 받고, 간만에 혜수랑 만나서 데이트도 할 수 있잖아."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겉으로는 어이없는 척, 짜증스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에 전혀 날이 서 있지 않았다.
"아무튼, 한동안은 마음 편하게 지내. 계속 같이 있어 줄 테니까. 스토커 문제도 같이 해결해 보고."
"..고마워요. 읏..!"
같이 있어준다는 말이 제법 먹혔는지 수줍게 고맙다고 말하는 정혜수의 머리를 꾹 눌러 쓰다듬었다.
예전 같았으면 손을 밀어내거나 고개를 틀어서 피하려고 했을 텐데. 오늘은 얌전하게 손길을 받아들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 집 근처에 편의점은 있지?"
"편의점이요? 당연히.."
"거기부터 들렀다 가자. 어느 쪽이야?"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야 돼요."
정혜수의 집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에 방향을 틀어 편의점으로 향했다.
"뭐 사게요?"
"그냥. 주변 지리부터 좀 봐두려고. 편의점이면 그래도 자주 다닐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고? 라는 표정이다.
물론 나도 내가 직접 스토커를 잡겠다는 생각까지는 없다.
솔직히 같이 다녀주는 것 외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범인을 알아낸다고 해도 스토킹이라는 이상한 짓을 하는 인간이랑 직접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나와 정혜수가 붙어 지내는 걸 보고 눈이 돌아가서 칼이라도 휘두르면 위험하니까.
지금 편의점에 온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같이 차에서 내려 편의점에 들어와 천천히 코너를 돌았다.
"편의점에는 자주 와?"
"그냥 집 오는 길에 필요한 거 있으면 들르는 정도예요. 가끔 당 떨어질 때 오기도 하고요."
"물 같은 건 따로 안 사가도 되겠네."
"집에 정수기 있으니까요."
"그럼, 이거나 사 가자."
"뭘.."
반쯤 멍하니 풀어진 표정으로 내 질문에 대답하며 따라 걷던 정혜수는 내가 멈춰서자 같이 멈춰 서며 진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췄다.
멈춰선 진열대에는 분홍색, 초록색, 은색 등의 작은 사각형의 박스들이 광택을 내며 진열되어 있었다.
콘돔. 평소라면 쓸 일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오늘은 정혜수를 위해 특별히 사기로 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정혜수가.
"필요하잖아. 안 쓸 거야?"
"......"
"대답 안 하면 안 쓰고 한다?"
"아, 좀..! 다 알면서 물어보지 좀 말라고요..!"
"네가 자꾸 귀엽게 구니까 놀리고 싶어서 그러지."
"진짜 재수 없어..!"
이미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에 콘돔 정도로 당황하고, 얼굴이 빨개져서는 눈꼬리를 치켜세우고 있으니, 괴롭혀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걸로 사자. 가서 계산하고 와."
어차피 실제로는 쓸 생각도 없었기에 사이즈는 확인도 하지 않고 대충 0.01이라고 써진 빨간 형광색 콘돔 박스를 집어 정혜수에게 건넸다.
"제, 제가요!?"
"응. 밥은 내가 샀잖아."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 그래. 한 박스로는 안 될 테니까, 두 박스 사자."
"제가 안 살 거라고요..!"
처음에 당황해서 소리를 지른 게 신경 쓰였는지, 콘돔을 받아들지 않고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화내고 있었지만 나 역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고,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설득을 시작했다.
"저기 알바 좀 봐."
"..알바는 또 왜요."
"남자 알바잖아. 그리고 우리 들어올 때부터 자꾸 널 힐끔거리고 있더라고."
"그게 왜.."
"저 사람이 스토커일 수도 있잖아. 자주 오는 편의점이라며."
"아니.."
"만약 스토커 본인이라고 하면, 나랑 같이 들어와서 네가 콘돔을 계산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반응을 좀 보자는 거야."
"....그냥 나한테 사게 하고 싶은 거잖아요."
"아무튼."
씨알도 안 먹히긴 했지만 한풀 기가 꺾인 게 느껴져 지금이다 싶었다.
"아무튼 난 양보 못 해. 이번에 사면 앞으로는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한 번만 해주라. 응?"
"......"
고민한다. 고민하면서도 중간중간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고 도끼눈을 뜨고 이쪽을 노려보기도 했지만.
"..이번만이에요."
결국에는 내가 내밀고 있던 콘돔을 탁 낚아채고는 성큼성큼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
편의점 알바를 꾸준히 하다 보면 자주 오는 손님의 얼굴 정도는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다.
자주 보다 보면 그냥 기억에 남을 수도 있는 거고, 진상이라서, 사가는 물건이 맨날 똑같아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냥 외모 탓에 기억에 남는 손님도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가끔 보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 그랬다.
160이 조금 넘어 보이는 적당한 키에, 예쁘고 도도한 인상, 하얗고 깨끗한 목선이 드러나는 포니테일은 그냥 한 번만 봐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기억에 남건 말건 결국 관심이 없다는 건 똑같았지만, 그 손님이 들어올 때면 무의중에 눈이 쫓아갈 정도로 예뻤다.
그리고 오늘. 그 여자 손님이 다른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남친인가..?'
이상할 건 없다.
저렇게 예쁘니 남친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고, 남자 쪽 역시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얼굴도 잘생긴 게 조금 재수 없긴 했지만 급이 맞는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였으니까.
어차피 자신이 저 손님을 좋아하던 것도 아니고, 그냥 올 때마다 눈 호강만 했을 뿐이니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제, 제가요!?"
"....?"
순간 여자 쪽에서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인 탓에 보지 않으려던 시선이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혹시 싸우는 건가 싶었지만 처음 한 번을 빼면 서로 작게 소곤거리면서 얘기하는 걸 보니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선을 떼려고 하는데, 여자 쪽에서 돌연 등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카운터로 다가와 물건을 탁 내려놨다.
'아..'
형광색 박스 한가운데 0.01이라고 쓰여진 상품. 콘돔이다.
아무래도 이 근방이 빌라, 원룸촌이다 보니 콘돔을 사 가는 대학생들이야 흔한 편이었지만 이렇게 여자 쪽에서 직접, 그것도 이렇게 예쁜 여자가 사 가는 경우는 아예 처음이었기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 번에 두 박스나.
결국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힐끗 들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얼굴이 정말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는 게 보였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꼴렸다.
평소에 그렇게 도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던 여자가 이렇게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안 그럴 수가 없었다.
삑- 삑-
"24800원입니다."
"2만.. 뭐, 뭐가 이렇게 비싸..?"
"......"
0.01짜리 초박형은 비싸더라고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여자 쪽 역시 혼잣말을 해버린 게 창피했는지, 흠칫했다가 입을 꾹 다물고는 카드를 건네오길래 말없이 받아 결제를 마치고 카드를 돌려주자 카드와 함께 콘돔을 홱 낚아채고는 거의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이제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인산말과 함께 딸랑- 하는 방울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서 남자 쪽 역시 가벼운 걸음으로 여자의 뒤를 따라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겨우 편의점 안에 혼자 남은 알바는.
"인생 진짜.."
여자의 표정만으로 풀발기 해버린 하반신을 의식하고는 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유독 옆구리가 시린 기분이었다.
*
콘돔을 결제하고는 편의점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는 정혜수의 뒤를 따라 편의점 밖으로 나와 보니 곧바로 턱, 하고 차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밖에서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말도 없이 차까지 들어가버리는 모습에 더더욱 웃음기가 흘러나오며 나 역시 운전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아으.. 진짜아..!"
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정혜수가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둔 콘돔은 차 앞 유리 쪽에 고이 올려둔 상태였다.
"그래도 표정 보니까 스토커는 아닌 것 같더라."
"알 게 뭐에요..! 이제 거기 못 가게 됐잖아요..!"
그건 좀 미안하게 됐다.
아무래도 이번 건 조금 심했는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해도 정혜수가 정말 폭발해버릴 것 같아서 말없이 정혜수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라 도착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가 도착할 때까지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정혜수는 차가 멈추고 시동이 꺼지자 손을 내리고 여전히 짜증과 창피함이 가라앉지 않은 듯 울긋불긋한 얼굴로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건물에 따로 주차장이 없다는 건 불편했지만 골목 곳곳에 주르륵 서 있는 차들을 보니 단속에 걸릴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차를 세우고 내려 정혜수의 뒤를 쫓았다.
층수는 2층.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는 정혜수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안으로 들어왔다.
이대로 화가 나서 문을 닫아버려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고, 신발을 벗기도 전에.
"으읍..!? 읍, 읏..! 응읍..!!"
현관에서 곧바로 몸을 확 끌어안아 입술을 덮치고, 고개를 뒤로 빼지 못하게 뒷머리를 끌어안고 꽉 다물어진 이빨 위를 노크하듯이 혀로 톡톡 쳐댔다.
"읍..! 읏..! 으읍..! 읍..!"
정혜수는 키스할 기분이 아니라는 듯 몸에 힘을 주고 발버둥 치려고 했지만 애초에 힘에서는 상대가 안 되는 탓에 품에 안긴 채로 버둥거리기만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조심스럽게 길을 열어줬다.
"흐움.. 움.. 츄읍.. 읏.. 흐응.. 츄릅.. 츄읍.."
처음에는 정말 강간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힘껏 저항하더니, 한 번 혀가 뒤엉키기 시작하니 결국은 몸에 힘을 빼고 혀를 얽혀오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하반신에 불끈 힘이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