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1화 > 스토커 대책 경호원 겸 섹스 파트너 (1)
굳이 어딘가에 가지 않더라도 할 일은 이것저것 많았다.
'민아랑 혜연이 애널도 뚫어줘야 하고, 예진이가 소개해준 모델들은 한 명은 맛만 봤고, 나머지 둘은 아직 만나 보지도 못했네. 에스테틱 애들도 몇 번 못 먹었는데.'
내가 게으르게 빈둥거리며 지낸 탓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주변에 여자가 꽤 많아지다 보니 하고싶은 것들이 제법 쌓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것들을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또다시 시간을 빼앗길 일이 생겨버린 탓이었다.
"하다하다 이제 경호원 노릇까지 해주게 되네."
사건의 발단, 아니 발단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에스테틱에 가서 따먹은 횟수가 제일 적은 직원을 실신 직전까지 따먹어주고, 슬슬 저녁 시간이 돼서 유혜연에게 찾아가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메세지가 와 있었다.
[정혜수 : 오빠, 바쁜 거 알고 있는데.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진짜 부탁할 데가 없어서요.]
뜬금없이, 아니 아주 뜬금없는 건 아니었지만 정혜수에게 대뜸 도와달라는 메세지가 와 있었다.
외모는 80점 정도였지만,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면서 따먹는 사이 제법 정도 들었고, 상당히 정성 들여 조교하고, 개발해놓기도 해서 만나지만 않았을 뿐이지, 나름대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으니 이렇게 메세지가 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부탁? 무슨 일인데?]
[<그게요..]
이것저것 말이 많기는 했지만, 요점만 추리자면 정혜수에게 스토커가 생겼다는 게 사건의 핵심이었다.
더웠던 여름도 거의 다 끝나 9월로 넘어왔고, 정혜수는 대학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자취 중이다.
스토커가 생긴 건 확실한데, 아직 뭔가 일이 터진 건 아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해봐도 조심하라는 말만 해줄 뿐이고, 걱정할까 봐 가족들에게도 말을 못 했다나.
이제 겨우 일주일 째긴 했지만 직접 통화를 해 보니 괜찮은 척하면서도 꽤나 무서워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한동안은 경호원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한가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주변에서 보기 힘들어진 까칠하고 자존심 세우려는 성격이나 보지를 따먹고 싶은 생각도 들은 탓이었다.
"생각보다 멀지도 않네."
고려대 사범대학 캠퍼스.
이미 알고 있던 얘기긴 했지만 정혜수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명문대생이었다.
아무튼, 캠퍼스 자체는 에스테틱이 있는 강남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 찾아오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캠퍼스에 들어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미리 들어뒀던 본관 앞에 서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중간중간 지나가는 학생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런 시선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있어서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잘생겨서 쳐다보는 건데 뭐.'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면 모를까. 쳐다보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앞에 도착했어.]
[<5분만요. 금방 나갈게요.]
정혜수 역시 내 메세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정혜수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여자애들이 많기는 한데. 예쁜 애들은 안 보이네.'
하기야, 얼굴도 예쁜데 공부까지 잘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여럿 억울할 일이긴 했다.
그래도 의외로 평균 정도는 되는 애들이 꽤 많았고, 평균보다 조금 예쁜 애들도 간간이 보이는 게 찾아보면 영 없을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70점 정도만 돼도 따먹을만 한데 말이지.'
외모의 평균을 50점 정도라고 친다면, 그 아래로는 관심도 없고, 60점부터는 잠깐 시선이 간다. 그리고 70점부터는 따먹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내 기준이었다.
정혜수 같은 경우에는 80점. 내가 흔히 A급이라고 생각하는 90점대의 여자들과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는다.
당연히 기회만 된다면 얼마든지 따먹겠다는 의욕도 생기는 수준이지만 그쯤 되면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인터넷이나 클럽 같은 곳에서나 그나마 볼 수 있는, 직접 볼 일은 없는, 소위 말하는 연예인급 레벨이었으니까.
"아, 오빠!"
"왔어?"
지나다니는 학생들의 얼굴을 스캔하는 사이 건물 안에서 정혜수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왔고,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추고 후우, 한숨을 쉬며 똑바로 눈을 마주쳐왔다.
"..예뻐졌네?"
"마, 만나자마자 뭐예요."
"아니, 진짜 예뻐져서 하는 말이지."
딱히 인상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그냥 항상 보던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다는 것 외에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더 차분하고 성숙해진 분위기가 느껴지고 시원스럽게 들어난 목선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점수를 더 줘야겠는데? 85점? 90점?'
"전에는 좀 어린애 같았는데, 지금은 어른스러워져서 더 예뻐 보여."
"아, 정말.. 됐으니까 가기나 해요!"
나름대로 솔직한 감상을 내뱉은 건데도 정혜수는 그저 주변의 시선이 창피하다는 듯 내 어깨를 밀어 건물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차 가져왔으니까, 주차장 쪽으로 가자."
"..알았어요."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 중에서는 아예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적당히 져주는 척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래봤자 주차장도 나가는 길 근처에 떡하니 있어서, 차에 탈 때가지 쏟아지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지만.
"와, 무슨 구경거리라도 된 줄 알았네. 다들 왜 이렇게 쳐다 봐?"
"..오빠가 잘생겼으니까 그러는 거죠. 저도 평소에 혼자 다녔는데, 갑자기 잘생긴 남자랑 붙어 있으니까 보는 것도 있을 테고요."
"친구 없어?"
"아, 남자요! 남자! 친구 있거든요!?"
그냥 농담 한 번 던져본 건데,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짜증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진짜 친구 하나 없는 건 아니겠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보면 나한테만 까칠하게 굴 뿐이지, 사교성이 나쁠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냥 해본 소리야. 자, 일로 와봐."
"아, 좀. 밖이잖아요. 만나자마자.."
"그럼 집에 가면 해도 돼?"
"......"
내가 가볍게 분위기를 잡자마자 인상을 쓰며 툴툴거리려던 정혜수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내가 아주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는 게 정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썬팅 짙게 해놔서 가까이 와서 보는 거 아니면 보이지도 않아. 간만에 만났는데, 뽀뽀도 안 해줄 거야?"
"..진짜 짜증나."
저 짜증난다는 말도 정말 간만이다.
그리고,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옆자리에서 몸을 기울여 입술을 가볍게 맞추는 것도 좋았다.
"..쪽. 됐어요?"
내가 뽀뽀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걸 또 정말로 입만 맞추고는 뺨을 살짝 붉히며 표정을 풀지 않고 묻는다.
당연히 부족했다.
"아직 안 됐으니까. 더 해봐."
"정말.. 츄읏.. 읍, 응.. 츄릅.. 응.. 후앗.. 츄읍.."
마치 자기 쪽에서 져준다는 듯이, 한탄하듯 중얼거리고는 다시 입술만 살짝 대는 정혜수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 당겨 입술을 꾸욱 누르고 혀를 밀어 넣자 이건 또 모르는 척 받아들이며 당황하지도 않고 혀를 얽혀왔다.
"후우, 하아.. 이제 진짜 됐죠..?"
"일단은?"
"하여간에.."
그렇게 찐득하게 키스를 주고받고 나서야 입을 떼어냈고, 정혜수는 조금 더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계속 눈에 힘을 준 채로 툴툴거리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저녁은 아직이지?"
"..네."
"그럼 밖에서 먹고 들어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아, 학식이나 한 번 먹어볼까? 외부인도 먹을 수 있지?"
"관둬요. 별로 맛도 없으니까."
"그래?"
"..못 먹을 정도는 아닌데. 돈 있으면 그냥 나가서 사먹는 게 나아요."
그건 좀 아쉽다. 아무래도 고졸이다 보니 대학교 학식이라는 게 조금 궁금했었는데 말이다.
"평소에는 어디서 밥 먹는데?"
"..학식 먹죠."
아무래도 그냥 맛이 없다기보다는 맨날 학생 식당에서 먹다 보니 다른 데서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냥 초밥이나 먹으러 가자. 괜찮지?"
"괜찮아요."
메뉴를 고르기 어려울 때는 초밥 만한 게 없다.
생선 자체를 못 먹는 게 아니면 어지간해서는 싫어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맛도 있으면서 고급이라는 인상도 있었으니까.
물론 회전 초밥이나 무한 리필집 같은 곳은 제외다.
어차피 강남까지 30분 밖에 안 걸리니까. 예약이 없는 오마카세 집 정도는 여러 군데 알고 있다.
정혜수도 딱히 싫지는 않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곧장 네비를 켜고 차를 몰았다.
물론 말없이 운전만 할 생각은 없다. 면허를 막 땄을 때야 운전에 집중하느라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운전이 상당히 익숙해져서 대화할 여유 정도는 있었다.
"학교 분위기는 어때? 다닐만 해?"
"..그냥 할만해요. 그냥 학고만 안 먹으면 된다는 마인드로 다니는 애들도 있고, 빡세게 하는 애들도 있고. 다 똑같죠, 뭐."
"고대 쯤 되면 다들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보네?"
"입시 때 고생했으니까 놀고 싶다는 거죠. 임용 고시 경쟁률 장난 아닌 거야 다 알고 있어도, 그거야 선배들 얘기지 아직 몇 년 남았으니까 체감도 잘 안 될 테고요."
솔직히 말해서 재미 없는 얘기다.
그래도 이렇게 상대가 얘기를 풀기 쉬운 화제를 골라야 대화가 잘 이어지고, 말을 많이 하면서 마음도 느슨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운전하면서도 이것저것 얘기를 들어줬다.
그리고 거의 20여분 가까이 자기 얘기만 하던 정혜수는 후우, 하고 짧게 숨을 돌리고는 내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빠는요? 맨날 바쁘다, 바쁘다 하더니. 이렇게 바로 와도 괜찮아요?"
"어차피 아버지 회산데 뭘. 그냥 배 째라는 식으로 욕 바가지로 나왔지. 어차피 나 없다고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신경 안 써도 돼. 일단 한 달은 쉬겠다고 허락받았으니까."
정혜수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인천 쪽에서 부모님이 사업을 하고 있다. 덕분에 돈이 꽤 많은 금수저다. 이 정도 뿐이었다.
"..그럼 됐고요."
그래도 내가 무리해서, 부모님한테 욕까지 먹어서 왔다고 하니 목소리에서 살짝 기운이 빠진 게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신호에서 차를 멈추고 살짝 표정을 살펴보니, 정말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기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윽..! 누, 누가 뭐래요!?"
정혜수는 내가 한 마디 하고 나서야 자기 표정을 다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얼굴을 확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미안한 기분이 들게 해 놨으니, 이 자존심 세고 까칠한 성격을 다시 길들일 때 도움이 되겠지.
스토커야 당연히 잡을 생각이고, 얼마나 같이 지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또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