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399화 (399/775)

< 399화 > 욕구 불만 유부녀들과 19금 술게임 (2)

부르는 호칭도 호칭이고, 목소리도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만큼 자신을 부른 상대가 누구인지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예상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돌려 직접 얼굴을 확인해본 순간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시원스러운 인상의 잘생긴 얼굴에 내심 감탄했다.

"아, 민석이구나."

"같은 호텔이긴 해도,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은 몰랐는데. 우연이긴 해도 반갑네요."

"으응. 그러게."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기도 했으니 우연히 마주치는 일 정도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마침 당사자에 대해 얘기하려던 참에 이렇게 직접 마주쳐 버리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재경 누나도.. 또 둘이서만 있네요?"

"아, 응. 둘 다 잠이 잘 안 와서 잠깐 나왔거든. 민석이 너는?"

'또 둘이서만'이라는 말에 살짝 찔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재경이 자연스럽게 말을 받아줘서 티 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저도 뭐, 잠도 안 오고 할 것도 없어서 호텔 구경 다니고 있었죠."

"그래? 헌팅하러 온 거 아니었어? 뭐가 잘 안 풀렸어?"

"..그냥요. 제일 먼저 말을 걸어본 게 누나들이라 그런지 눈이 높아져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해변만 실컷 걸어 다니다 왔죠."

"얘는. 또 그런다, 또. 그렇게 칭찬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거든?"

"진짠데.. 진짜 그 뒤에 두 시간은 더 돌아다녔는데, 누나들보다 예쁜 여자들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고요."

정말일까? 머리로는 아무리 그래도 우리 듣기 좋으라고 하는 아부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멋대로 올라가려고 한다.

"근처에 클럽 같은 데도 꽤 있는 것 같던데, 거기라도 가 보지 그랬어."

"클럽.. 아무래도 그런 데는 좀 익숙하질 않아서요. 오면서 보긴 했는데, 들어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이번에는 정말 그건 아니라는 듯한 태도가 표정과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클럽이라면 대학생 때 이재경과 가본 적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처음이라면 혼자 들어가기 불편한 곳이긴 했다.

막상 들어가서도 잘 놀지도 못하고 굳어있기만 해서 한 번 가본 게 끝이기도 했었고.

"에휴. 그렇게 쑥맥인데, 우리한테는 어떻게 들이댔대?"

"진짜 용기 내서 처음 해본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랑 가족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안 들어서 긴장이 풀린 것도 있고요."

"흐흥. 우리는 여자로 안 보였다는 얘기야?"

"그런 건 아니고.."

"알아, 알아. 어쩐지 너무 편하게 대하더라니, 그래서 그랬구나."

이재경은 사교성이 좋은 성격답게 곧잘 농담도 건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이재경의 성격이 조금 부럽게 느껴졌다.

'나도 얘기하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지, 막상 둘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도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같이 앉아도 괜찮아요? 아, 제 건 제가 살게요. 뭣하면 누나들 것도 제가 사도 괜찮고요. 여기까지 온 건 좋았는데, 혼자 마시려니까 좀 처량한 기분이더라고요."

"흐음.. 나는 괜찮은데. 설이 너는?"

"..괜찮아."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미안하고, 다른 남자라면 거부감부터 들었겠지만, 최민석은 왠지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아 편하게 허락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답례로 제가 쏠 테니까, 시키고 싶은 거 있으면 편하게 시키세요."

"안 그래도 돼. 사회 초년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급하게 스위트룸으로 예약하면서 돈도 많이 깨졌다면서. 누나.. 가 살 테니까 너야말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편하게 시켜."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호의를 흘려 넘기고, 오히려 이쪽에서 연상 행세를 하며 자연스럽게 호의를 베푸는 발언은 놀랍게도 이재경이 아닌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음.. 그럼 그냥 더치로 해요. 제가 누나들한테 신세 지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얻어먹기까지 하는 건 너무 죄송하잖아요."

"그렇게 생각 안 해도 괜찮은데, 네가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하자."

누가 술값을 낼 것인가, 그 별것 없는 실랑이에도 알 수 없는 재미를 느끼면서 적당히 타협을 끝마쳤고, 합석한 최민석 역시 새 안주와 맥주를 주문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요? 얼핏 보니까 분위기가 조금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아, 음.. 그게.."

남편이 잠자리를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평에, 오늘 헌팅하러 왔던 남자들 중에 제일 잘생긴 남자애 얘기를 하고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 잠시 적당한 변명 거리를 떠올렸다.

심지어 그 제일 잘생긴 남자애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어째서인지, 최민석에게라면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아니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기분도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얘기까지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남편이 너무 애들이랑만 놀아준다고 불평하고 있었지이."

"재, 재경아?"

"뭐 어때. 불평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원래는 남편이랑 분위기 잡고 둘이서만 마시고 싶었는데, 저녁때 술 마시고 잠들어버려서 우리 둘이 온 거잖아."

"아, 응. 그렇지."

순간 이재경이 확 불평을 말해버려서 당황했었는데, 결국은 섹스 쪽은 얘기하지 않고 적당히 둘러대는 말일 뿐이라는 걸 눈치채고 적당히 맞춰줬다.

"그건 남편분들이 너무한데요? 낮에는 애들이랑 놀아주느라 그랬다고 쳐도, 애들이 잠들었으면 신경을 써 줘야 하는 건데."

"아니야. 그이도 피곤했겠지."

자신이 했던 생각을 그대로 읊어주는 것처럼 편을 들어주는 최민석의 말에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가, 다시 이성적으로 돌아와 남편을 변호했다.

이재경과 단둘이 있을 때야 적당히 불평도 하고 그랬지만 그건 경우가 다르니까.

하지만 최민석은 자신의 변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

"피곤해도 그렇죠. 술 마시고 자는 거라면서요. 남편분은 애들이랑만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가족 여행을 온 거잖아요. 그런데 애들만 챙겨주고, 자기만 기분 좋게 마시고 그대로 푹 자 버리는 건 아니죠. 사람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어머, 왜 네가 화를 내니?"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불평하듯이 투덜거리는 최민석의 말투에 이재경이 풋 웃으며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편을 들어주니 기분이 좋아진 건지 표정에서는 평소보다 기분 좋은 듯한 웃음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뭐.. 그냥.. 누나들이 억울할 것 같아서 그렇죠. 너무하잖아요."

정말,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걸까.

안 그래도 다시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게 남아있던 이상이 한층 더 호감으로 변하는 느낌이다.

처음 이재경과 함께 남편의 뒷담을 했을 때처럼, 뭔가 답답하게 막혀있던 곳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어쨌든 간만에 푹 쉬러 온 거니까 조금 풀어질 수도 있는 거지. 오늘은 한참 운전하고 짐 정리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을 테고.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남편 분이 운이 좋았네요."

"응? 뭐가?"

"누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잖아요. 제가 누나 입장이었으면 엄청 실망해서 삐져 있거나 나중에 제대로 긁으려고 벼르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오히려 이해해주려고 하는 사람은 엄청 드물걸요?"

"얘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질 것만 같다.

정말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해주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애. 나만 나쁜 년이지. 설이는 남편한테 실망하면서도 이해해주려고 하고, 나만 남편 불평하고 뒷담하고, 그렇지?"

"아, 아니에요. 누나. 누나도 결국은 안 따지고 같이 와서 참아주고 있던 거잖아요."

"글쎄에. 난 아닌 것 같은데?"

"으음.."

중간에 불쑥 끼어든 이재경이 또 짓궂게 농담을 던지며 최민석을 곤란하게 만든다.

자신이야 이재경의 저런 농담이 익숙했지만, 처음 겪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농담하고 있는 거라고 알려줘야겠지?'

저렇게 계속 당황하면서 놀림당하는 것도 불쌍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끼어들려고 했는데.

"그래도 누나도 사실 은설 누나랑 같은 생각이었잖아요. 안 그랬으면 은설 누나가 얘기할 때 끼어들어서 아니라고 했겠죠. 아니에요?"

"어, 어..?"

이번에는 이재경도 제대로 정곡을 찔렸는지, 순간 벙 찐 표정을 지으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재경과 알고 지낸 것도 10년이 넘었는데, 저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냥 보니까 알 것 같더라고요. 누나도 말은 조금 짓궂게 해도 좋은 사람일 것 같다고."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다 들켰죠?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순식간에 공수가 뒤바뀐 것처럼, 이번에는 최민석 쪽에서 장난기 서린 웃음을 씩 지어 보이며 이재경을 놀려댄다.

"뭐, 뭐래니. 그냥 어이가 없어서.."

"누나 얼굴 빨개졌는데요? 그쵸? 은설 누나."

"..아, 응. 그렇네."

"윽..!"

아닌 게 아니라, 새빨개졌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기에는 대충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나서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 그래, 부끄럽다. 됐어?"

"이렇게 놀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창피하게 해서 죄송해요."

"..됐어. 내가 먼저 놀리려다가 이렇게 된 건데 뭘."

"네? 저 놀리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아, 몰라. 다른 얘기 해."

그 장난기 많은 이재경이 이렇게 농담도 못 하고 노골적으로 얘기를 피하려는 걸 보니 정말 어지간히도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얘기요? 음.. 그럼.. 다른 고민 같은 건 없어요? 제가 들어줄게요."

"고민? 갑자기?"

너무 뜬금없는 말이라 이재경이 아닌 자신 쪽에서 되물어버렸다.

"제가 뭘 어떻게 해결해줄 수는 없어도, 그냥 얘기하고 나면 후련해지기도 하잖아요. 원래 같았으면 혼자 쓸쓸하게 마셨을 텐데, 누나들 덕분에 심심하진 않으니까 그 답례로요."

"고맙긴 한데.. 갑자기 얘기해보라고 해도.."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없으면 좋은 거고, 그냥 사소한 거라도 다 들어줄게요."

"으음.."

처음 들었을 때는 갑자기 무슨 고민 상담이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듣고 보니 또 혹하는 느낌이다.

어째서인지 최민석은 믿음이 가기도 하고, 고민이 있다면 솔직하게 털어놔도 괜찮겠다 싶은 기분도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었으니까.

"고민이라.. 그럼 잠깐 생각 좀 해볼게?"

"그러세요."

그래도 처음부터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꺼내는 건 아니다 싶어 다른 고민을 떠올리기 위해 잠깐 생각을 정리해보려는데.

그세 어떻게 멘탈을 추슬렀는지, 기운을 차린 이재경이 확 끼어들었다.

"그럼, 고민.. 이라고 할 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아?"

"편하게 물어보세요."

"......"

혹시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불안한 기분이 들어 생각에 빠져들려던 걸 멈추고 살짝 긴장한 채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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