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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397화 (397/775)

< 397화 > 유부녀든 뭐든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3)

"..뭐어, 그렇지. 좋은 사람이지. 그렇지?"

"아, 응.. 그렇지."

순간, 가볍게 비꼬는 듯한 말투와 함께 분위기가 살짝 굳어졌다.

"민석이 너는? 여자친구 없어?"

이재경 쪽에서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질문을 건네오긴 했지만 방금 전에 굳어졌던 분위기를 풀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건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없어요. 있었으면 여기 와서 이러고 있지도 않았죠."

최대한 무해한 남자로 보이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친구가 없다고 대답하면서 짧게 생각을 정리했다.

'둘 다 남편이랑 애들까지 데리고 여행을 올 정도면 사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처음부터 우울하거나 화난 분위기도 아니었고.'

아까 분위기를 굳어지게 했던 말 역시 '좋은 사람이 맞긴 한데..' 라고 말하면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약간의 불만 표시 비슷한 느낌이 강했다.

정말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을 꺼내거나, 대답 자체를 적당히 얼버무렸을 것이다.

'..애매하네.'

역시 아직은 정보가 부족하다. 그래도 '남편에 대한 불만'이라는 단서를 잡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였다는 건 확실했다.

"그래? 이렇게 잘생기고 키도 큰데, 인기 많지 않아?"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군대 갔다가 나와서 일만 하면서 지냈거든요. 그래도 이번 휴가 때는 뭐라도 놀아보려고 무턱대고 와보긴 했는데, 일행도 없다 보니까 할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아니, 설이한테 헌팅하려고 한 거야?"

"이래 보여도 엄청 용기 내서 온 거에요."

"그랬는데, 유부녀라서 아쉬웠겠네?"

"어쩔 수 없죠, 뭐. 그래도 이렇게 얘기라도 하고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아서 좋네요. 두 분 다 예쁘시기도 하고요."

"그래도 너무 쳐다보면 안 돼. 임자 있는 여자들이니까. 알지?"

"당연히 알죠."

말로는 무슨 말이든 못 해줄까.

최면으로 경계심을 낮춰놓긴 했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최대한 내가 무해한 상대라는 인상을 심어 놔야 이후의 일이 편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쪽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굴지 않는 건 나중에 분위기를 탔을 때 자연스럽게 밀어붙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누나들 수영복은 직접 고른 거예요?"

"수영복? 왜? 이상해?"

"그런 건 아니고요. 예쁘고 어울리긴 하는데, 제가 남자친구나 남편이면 이렇게 못 입게 할 것 같거든요. 다른 남자들이 다 쳐다보게 되잖아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남편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화제를 넘겼다.

동시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아주 희미하게 흔들린다.

정말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미리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반응을 캐치해낼 수 있었다.

"뭐어, 직접 골랐지. 그래도 모처럼 놀러 오는 건데, 안 꾸미면 손해잖아. 그리고, 너무 그렇게 구속하려고 하면 여자 친구도 싫어할 거야."

"어차피 있지도 않은데요. 뭘."

"그래도 나중에는 생길 수도 있잖니. 좋아해주는 건 좋아도, 너무 구속하려고 하면 여자도 피곤하고, 의처증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

정말로 그런가?

적어도 우리 애들은 내가 다른 남자들 앞에서 수영복 입고 다닐 거냐고 물어봤을 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민아 같은 경우에는 치사하다고 말한 걸 보면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누나네 남편분들은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어..? 응. 별말 안 했지..?"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게 좋다고 해놓고, 남편 쪽으로 얘기가 넘어갔더니 대답이 영 시원찮다. 그게 정말로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을 텐데.

"은설 누나네 남편분도요?"

"어, 어? 아, 우리 남편도.. 별말 없었어."

얌전히 나와 이재경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유은설은 갑자기 이름을 불리자 흠칫 놀라긴 했지만 은설과 마찬가지로 미묘한 반응으로 대답했다.

"흐음.. 아직 없긴 해도, 여자 친구가 생기면 다른 남자들 앞에서 맨살 많이 드러내고 그런 건 확실히 싫을 것 같은데. 여자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게 깨는 생각이에요?"

"뭐어.. 그래도 너무 유난 떨지만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남자 친구니까, 너무 무관심한 것도 조금 그렇긴 하지. 너무 심하게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아까와는 하는 말이 살짝 달라졌다.

"은설 누나 생각은 어떤데요?"

"나는.. 응. 그렇네.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나도 괜찮을 것 같긴 해."

이재경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대화가 잘 이어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대화에서 한 발짝 물러나 듣고만 있어서 계속 신경을 써 줘야 했다.

"어느 정도가 심한 건지가 중요하겠네요."

"그거야 뭐, 여자마다 다르겠지?"

"누나들은요? 어느 정도까지가 괜찮을 것 같아요?"

"글쎄에.. 직접 말로 설명해주긴 좀 애매하네. 그치?"

"아, 응. 그렇네."

이제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는 듯 애매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충 어떤 상황인지 느낌이 오기 시작한다.

일종의 권태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사이가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가정은 화목하게 굴러가고 있지만 여자 쪽에서만 은근하게 불만을 느끼고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그러니까 다 같이 여행도 왔지만 여자끼리만 빠져서 쉬고 있고, 남편에 대해 직접 불평을 말하진 않지만 은근하게, 비꼬듯이 불만을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얼추 상황이 이해가 간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남편 쪽에 불만이 있는 건 확실하니까.'

일단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당장 더 깊은 얘기까지 파고들기에는 주변이 시끌벅적해서 진지해지기도 어려울 것 같고, 언제 남편과 애들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아무튼, 가족끼리 휴가 왔다고 하니까 부럽긴 하네요. 몇 박으로 온 거예요?"

"4박 5일이야. 그래도 푹 쉬니까 편하긴 한데, 첫날부터 너무 심심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좋은 건지는 모르겠네."

몇 박으로 왔냐는 사소한 질문 정도는 경계심을 거의 낮춰놓은 덕분에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거기에 아직 물어보지도 않은 언제 돌아갈 건지에 대한 정보까지 먼저 말해줘서 말을 아낄 수도 있었고.

오늘을 포함해 나흘 밤 정도는 그녀들을 공략할 시간이 있다는 의미였으니 억지로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조금 있다가 돌아간다고 하면 그냥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다행이었다.

"숙소는 어디로 잡았어요? 저는 일정을 워낙 갑자기 잡아서, 일반 객실은 다 차고 남은 게 스위트룸밖에 없어서 돈 좀 깨졌거든요. 어차피 혼자 잠만 잘 건데."

"아하하. 미리 예약 안 해뒀으면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올해 초부터 계획해둔 거라 괜찮았어. 저기, 저쪽 호텔 보이지? 저기 스위트룸으로 잡았어. 일반 객실도 잡을 수 있긴 했는데, 모처럼 놀러 오는 거기도 하고, 가족끼리 왔으니까."

"어, 정말요?"

운이 좋다. 이재경이 손으로 가리킨 쪽에 있는 호텔은 해변에서도 뒤를 돌면 한눈에 보이는, 내가 잡아놓은 호텔이었으니까.

'이러면 억지를 쓸 필요가 없지.'

원래라면 반쯤 억지로 번호를 따 놓고, 내일 이른 시간에 만나서 제대로 작업을 들어가 볼 생각이었는데.

같은 곳에서 머무른다면 우연을 가장해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우연이네요. 저도 저기서 지내고 있거든요."

"어머? 그래?"

"나중에 지나가다 또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정말 '우연히' 만나는 걸 노릴 생각은 없었지만.

'분명히.. 맨 위에 라운지인가 하는 술 마시는 곳도 있었지?'

모처럼 호텔에서 지내게 됐으니까, 해변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여자를 꼬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알아봐 둬서 다행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남편과 아이들이 잠들면 유은설과 꼭대기 층에 있는 바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잡담을 나누고 싶다.]

이 정도 최면은 몽마가 되기 전이라도 얼마든지, 쉽게 걸 수 있는 수준의 최면이라 아무런 부담도 없이 휙 걸어버릴 수 있었다.

반대로 유은설에게도, 이재경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최면을 걸어뒀다. 물론 강도는 상당히 강하게. 오늘 확실히 라운지에서 마주칠 수 있도록 걸어뒀으니 확실하게 마주칠 수 있으리라.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응? 왜? 무슨 일 있어?"

이제 여기서 더 있는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물론 실제로 그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고, 적당한 변명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 건 아니고, 언제 남편분이랑 애들이 올지 모르잖아요, 저랑 같이 있으면 이상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냥 그래서요."

"흐응.. 그것도 그렇네. 오해 같은 건 몰라도 마주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수는 있겠다."

"그렇죠? 저도 아쉽긴 한데, 가볼게요. 푹 쉬세요."

"으응. 그래. 잘 가-."

"고마워.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네."

아직 딱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인사를 주고받으며 몸을 일으키자 이재경과 유은설의 눈빛에 은근하게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좋아서,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고. 그냥 단순하게 말 상대가 하나 줄어든다는 게 아쉬운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지루하거나.. 외롭다는 뜻이겠지.'

뭐가 됐든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었기에 조금 더 아쉬움이 남도록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라솔 밖으로 빠져나와 인파 사이로 숨어들었다가, 10분 정도를 돌아다니다 다시 두 사람이 있는 파라솔 근처로 다가가 분위기를 살폈다.

'역시 예쁘면 뭘 해도 그림이 된다니까.'

파라솔 아래, 비치 베드에 나란히 눕듯이 비스듬하게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잔잔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화보 촬영이라도 나온 것처럼 눈에 확 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을 지나가는 남자들도 두 사람을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두 사람의 상태를 잠시 지켜보다가, 나도 파라솔과 비치 베드를 빌려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깔았다.

워낙 파라솔이 빼곡하게 박혀 있어서 자리를 잡는 게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찾아보니 빈 공간이 없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지 못하고 들이댔다가 금방 퇴짜를 맞고 물러나는 남자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리고 내 쪽에도.

"저기, 혼자 오셨어요?"

"여자 친구랑 왔습니다."

몇몇 여자들이 다가와 헌팅을 시도했지만 저 두 사람에 비하면 전혀 눈에 차지 않는 수준이라 적당히 쳐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마음에 드는 수준이라면 번호라도 받아놨을 텐데.

내 눈에 차는 여자가 알아서 다가오기에는 해운대의 수질이 너무 별로였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서야, 유은설과 이재경이 있는 파라솔에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왔다.

인파 사이에 적당히 섞여서, 파라솔 근처를 지나치며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새롭게 최면을 걸었다.

[밤에 아내가 보이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는다. 친구와 잘 놀고 있을 것이다. 모처럼 놀러 왔으니 편하게 쉬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누가 누구의 남편인지 모르는 만큼 대충 친구라는 말로 상대를 뭉뚱그렸다.

두 사람이 친구 사이였으니 이 정도 빈 구멍은 알아서 메꿀 수 있으리라.

[밤에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 찾지 않는다.]

애들에게 거는 최면은 단순하고 강하게 걸었다.

혹시라도 남편은 괜찮더라도 애들이 엄마를 찾는다고 난리를 피워대면 귀찮아질 테니까.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최면이 확실하게 들어간 걸 확인하고, 해변을 조금 더 돌아다닐까 하다가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질려서 그냥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당장 낚아놓은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오늘 밤에 두 사람을 낚을 수만 있다면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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