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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385화 (385/775)

< 385화 > 잘못 걸린 것 같은데? (2)

처음에는 속이 다 비치는 시스루 슬립 차림에, 순식간에 평범한 외출복 차림으로 옷을 바꿨던 것처럼.

눈앞에 나타난 향설은 몸에 착 달라붙어 잘록한 허리와 커다란 가슴 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홀복 원피스 차림이었다.

심지어는 어깨 위로는 얇은 끈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아서, 새하얀 목선이나 쇄골, 가녀린 어깨, 깊게 골이 파인 윗가슴까지 전부 드러나 있어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모르는 척해. 얘 눈엔 내가 안 보일 테니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초에 상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생각해보면 일전에 연습이랍시고 편의점에 갔을 때도 알바생도 그 뒤에 들어온 손님도, 향설이 투명 인간이었던 것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았었으니까.

"아, 아. 겁먹지는 마. 진짜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나 엄청 건전한 사람이라니까? 여기서 약 못 팔고 이상한 놈들 안 꼬이게 하는 것도 다 내가 하는 거거든."

"..그럼 믿을게요."

"어우. 얘 왜 이렇게 귀엽지?"

내가 향설에게 잠시 정신이 팔렸던 걸 겁먹었다고 생각했던 건지 안심시키려는 말을 하는 백하린에게 적당히 대꾸하자 이게 또 마음에 들었는지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기분 좋은 눈길을 보내왔다.

"그래서, 누나는 저한테 뭐 궁금한 거 있어요? 누나 말대로 저만 물어봤으니까, 이번에는 누나가 물어봐요."

"그럴까?"

일단 향설이 시키는 대로 저쪽을 신경 쓰지 않고 적당히 대화를 주고받기 위해 생각 없이 대답하기 쉽도록 내가 질문을 받는 쪽으로 화제를 바꿨다.

"그럼.. 나이가 스물넷이랬으니까, 지금은 대학생이야?"

"대학은 안 다녀요. 고졸이거든요."

"그래? 그럼 무슨 일하는데?"

"몇 달 전까지는 백화점에서 일했었는데, 지금은 그만두고 놀고 있어요. 백수죠, 뭐."

"뭐야,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누나가 무서우니까 거짓말하긴 좀 그래서요. 그리고 뭐, 별로 창피할 일도 아니잖아요? 남이 보기엔 한심해 보일 수는 있어도, 저만 당당하면 됐죠."

"하아.. 그 새끼들 미리 다 내보내 놨어야 했는데. 그래, 뭐. 스스로 당당하기만 하면 됐지. 나도 학벌 같은 걸로 사람 판단하고 그런 성격은 아니니까."

내가 자길 무서워하고 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학벌에 관한 화제를 시원스럽게 넘겨버린 것과는 달리 불평하듯 투덜거리는 목소리에는 상당히 감정이 깊게 담겨 있었다.

"부모님은 뭐하시는데? 형제는 있고?"

"부모님이랑은 연 끊은 지 몇 년 됐죠. 전역하면서 말없이 집 나와서 번호도 갈았어요. 형제도 없고요."

"흐응.. 내가 기분 나쁘게 한 건 아니지?"

"전혀요? 어차피 알고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가족 문제는 진짜 신경도 안 써요. 어차피 그쪽도 그럴 테니까요."

"그래..?"

내 가정사는 아무래도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딱 좋다 보니 잘 꺼내지 않는 얘기였지만 써먹기에 따라선 불쌍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

정말로 내 과거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이렇게라도 써먹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정말 신경 안 써도 돼요. 어쨌든 집 나와서 잘 먹고 잘살고 있고, 이렇게 클럽도 와서 놀고 있잖아요? 오히려 신경 써주는 쪽이 더 불편해요."

"그럼, 뭐. 알았어. 신경 안 쓸게. 앞으로는 무슨 계획 같은 건 있어?"

"글쎄요. 일단은 해외로 여행이나 한번 가보려고요. 그러려고 영어 학원도 다녔거든요. 생활 쪽은.. 그래도 벌어둔 게 있어서 당장은 괜찮긴 한데, 별 계획은 없어요."

"흐응. 그래?"

한심하게 보는 눈빛은 아니다. 그냥 딱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다시 향설이 끼어들었다.

"이 여자. 널 의심하고 있지는 않은데,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네. 그래서 붙잡아둔 것 같기도 하고. 네 몸에서 나오는 정기가 일반인이랑 비교하면 너무 많고 느낌도 달라서 그런 것 같네. 그래도 어느 쪽이냐고 하면 경계가 아니라 흥미만 가진 정도니까 신경 안 써도 될 거야."

그건 좋은 소식이다.

"그래도 섣불리 최면부터 걸려고는 하지 마. 너도 느끼긴 했겠지만, 이런 애들은 최면을 걸려고 하면 이상한 걸 느끼고 피하거나 저항할 수도 있거든. 당연히 그 뒤에는 너한테 추궁이 들어갈 수도 있는 거고."

이런 애들이 어떤 애들인지 알려줬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향설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분위기를 봐서는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수준도 꽤 뛰어난 것 같고. 세상 참 좋아졌네. 예전엔 여자들은 무공 같은 건 익히지도 못했을 텐데."

무공? 무협지에 나오는 검술 같은 걸 말하는 걸까?

군대에 있을 때 부대에 있는 도서관에서 무협지를 몇 권 읽어본 덕분에 대충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아니,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몽마도 있는 세상에 뭐라고 없을까. 오히려 인간에서 몽마가 된 내 쪽이 더 현실성이 떨어지는 존재인데.

"가족, 나이, 학력도 물어봤고, 그럼.. 여자친구는 있어?"

"없어요. 만나는 사람은 몇 있긴 해도."

"썸이야?"

"그렇게 귀엽게 말하기는 좀 그렇고, 서로 가볍게 즐기는 사이죠. 아, 돈 뜯어내고 그런 건 없어요. 애초에 연애나 결혼은 생각 없다고 확실하게 못 박아두기도 했고요."

이번에는 반 정도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백하린에게는 너무 잘 보이고 싶지도, 너무 나쁘게 보이고 싶지도 않다.

가장 좋은 건 이대로 얘기만 나누다 나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헤어지는 건데, 그렇게 하려면 욕 나올 정도는 아니어도 조금 나쁜 인상을 심어주는 정도가 딱 좋았다.

물론 처음에는 눈치를 보느라 호감을 느낄 만한 대답 위주로 하긴 했었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에. 얘랑 하면 정기도 엄청 많이 얻을 수 있다니까? 지금 니가 가지고 있는 양의 3분의 1 정도는 더 늘어날걸?"

향설이 옆에서 가볍게 핀잔을 주는 목소리도 적당히 흘려 넘겼다.

정기가 많으면 좋긴 하겠지만 지금도 만족스럽게 이것저것 즐기고 있고, 알아서 즐길 거리가 늘어나고 있는데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

당장 임예진이 연결해준 모델 셋 중 둘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고, 유서연의 에스테틱에서도 괜찮은 손님을 선별하는 중이다.

카페를 차리면 매니저나 알바생도 내가 직접 면접을 봐서 취향껏 고를 예정이고.

정 지루하다 싶으면 이번처럼 어딘가로 놀러 가거나, 해외여행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백하린이 내가 생각한 대로 반응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흐응.. 그런데도 여자들은 좋다고 만나고 있단 말이지?"

조금은 당황하거나 정색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목소리도 지금까지보다 더 생생해진 것 같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야.. 잘생기고 몸도 좋긴 해도, 아예 그렇게 못 박아두고 섹프로만 만나자고 하면 대부분은 싫어할 텐데."

"그거야 뭐.."

"엄청 잘하나 보네?"

내가 뭐라고 둘러댈 틈조차 없이, 곧바로 정답을 찾아내 버렸다.

아무래도 최면이라는 요소가 있으니 그게 전부라고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짧게 끝나는 관계가 아닌 장기적인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쾌락으로 확실하게 길들여놓은 뒤에 관계를 확정 지었으니까.

"그냥 성격이 잘 맞는 부분이 커요."

"그렇게 부정하니까 더 진짜 같은데?"

"..제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 거죠?"

"응? 글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부분까지 평범하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그런 건 됐고. 그렇게 자신 있으면 누나랑도 만나 볼래?"

"네..?"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는데도, 너무 예상외의 말을 들은 탓에 나도 모르게 잠깐 당황해버렸다.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이왕 만나실 거면 저보다는 좀 제대로 된 상대를.."

"그런 애들은 나랑 못 사귀어. 우리 집안이 평범한 집안이 아니기도 하고, 아까 봤던 걔들이 하도 따라다녀서 평범한 애들은 겁먹어서 거절하거나 아예 한 번만 봐달라고 빌기까지 했거든. 그러니까 이런 데서라도 만나보려고 하는 거지."

이해는 간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처음 봤을 때 정말 좆됐다 싶었으니까.

"저도 무서운데.."

"다른 남자들보단 훨씬 덜하지. 진짜 무서워하는 애들은 눈빛부터가 다르거든. 그럴 만도 하지, 딱 봐도 조폭 같은 인상 더러운 덩치들이 가는 데마다 따라다니는데."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정도가 훨씬 더 심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만나는 상대가 그 덩치들이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상대인데, 그래도 넌 별로 떨지도 않고 내 기분도 맞춰주고, 할 말도 다 했잖아."

"그냥 담력이 센 편이라.."

"그거야. 담력 센 거. 겁을 아예 안 먹지는 않아도 최소한 좋고 싫고 자기 할 말은 할 줄 알아야지. 얼굴도 당연히 내 취향이어야 하고."

결국은 얼굴에서부터 성격까지 다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물론, 내 성격을 알았다고 하기엔 상대 쪽에 맞춰준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잡고 그렇게 행동했다는 점이었으니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속으로 고민하기 시작하자 옆에서 또 향설이 끼어들었다.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저렇게 먹어달라고 안달을 내는데, 그냥 좀 놀아주면 되잖아? 성격도 그렇게 나쁜 애 같지도 않고."

"......"

자기 일 아니라고 말은 쉽게 한다.

하지만 막상 듣고 보니 또 괜찮게 들리기도 한다.

어쨌든 최면 능력만 안 쓰면 내 정체가 들킬 일은 없는 거고, 일이 잘되면 최면도 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몸매가, 가슴 쪽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얼굴만큼은 흠잡을 곳 없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럼, 이것만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제가 누나랑 만난다고 하면 아까 그 사람들이 절 어떻게 할 일은 없다고 확신해요? 솔직히 그건 진짜 무섭거든요?"

"절대 없어. 직급상 내 아래기도 하고, 걔들 일은 내 신변 보호지 그딴 잡일이 아니거든."

백하린은 완벽하게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뭐..'

짧은 시간이긴 했어도 지금까지 본 성격상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렇게 해서 백하린에게 최면을 거는 데 성공만 한다면 내가 알지 못했던 정보도 이것저것 얻어낼 수 있으리라.

"그럼, 일단은 가볍게 만나보면서 생각해봐요."

"..정말?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이쪽은 나름대로 고심해서 결정한 일이었는데, 정작 말을 꺼낸 장본인이 당황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거절당했다면 정말로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던 걸까. 내심 백하린에 대한 신뢰도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만 보자는 거잖아요. 낮에 만나서 영화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

"그 정도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일단 확실히 선을 긋는 데도 성공했다.

어차피 백하린 쪽도 진심으로 애인을 구하는 게 아니라, 반쯤 장난 같은 느낌으로 제안했던 것 같고. 서로 깊게 터치하지 않는 수준의 관계만 이어진다면 나쁠 것도 없었다.

"아, 근데 나 누나한테 고백할 거 있는데."

"고백? 뭔데?"

"돈은 안 받는다고 했는데, 돈 주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거든요."

"뭐?"

"근데, 누나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스폰이라고 알아요? 상대 쪽에서 먼저 그렇게 만나자고 제안한 거거든요."

유서연에 관한 정보는 어차피 말할 수밖에 없다.

타고 다니는 차도 외제차고, 사는 곳도 비싼 아파트다. 평범한 상대가 아닌 만큼 나에 대한 뒷조사를 해볼 가능성도 있었으니 괜히 숨겼다가 들킬 수도 있으리라.

그럴 바엔 그냥 내 쪽에서 먼저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쪽이 나았다.

유혜연에게 말했던 회사에서 날 괴롭히던 상사와 사귀게 됐다는 내용을 적당히 각색해서, 욕구 불만이었던 상사에게 스폰 제의를 받게 되고, 동거까지 하게 됐다는 관계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술 마시면서 해요. 어떤 사람인지 사진도 보여줄게요."

나이 많고 못생긴 사람에게 스폰 제의를 받아 몸을 팔고 있다면 더럽다고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 상대가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녀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폰 제의는 구실일 뿐이고, 그냥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다고 얼마든지 얼버무릴 수 있으니까.

적어도 유서연 정도의 외모라면 그런 말을 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더럽다고, 싫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백하린의 앞에서는 다른 여자들을 상대할 때만큼 좋은 사람인 척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편했다.

중간에, 이진아를 비롯한 맛있게 먹으려고 킵해뒀던 여자들에게 전화가 마구 날아들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무음 상태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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