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 잘못 걸린 것 같은데? (1)
분위기가 좋지 않다.
뒤에서는 최우석이 뒤따라 들어오지 않고 달칵 문이 닫혔고, 룸 안에는 정체 모를 여자 외에도 검은 정장을 입은 가드가 둘. 아니, 문 바로 옆에까지 해서 셋이나 서 있다.
가드들은 아예 다 똑같이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서 있기만 해도 분위기가 살벌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여자 쪽은 그래도 예쁘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수준이 상당했다.
꼬고 앉은 다리도 매끄럽게 쭉 뻗어있고, 피부도 깨끗하고, 적당히 날씬한 게 비율도 좋아 보인다.
얼굴 쪽은 두말할 것도 없는 미인. 무표정하면서도 이쪽을 깔아보는 듯한 시선을 보아하니 상당히 기가 센.. 아니, 성질이 더러운 타입일 것 같다.
그리고 가슴 쪽은..
'너무 작은데?'
보통 A컵이라고 해도 브라까지 입으면 최소한 봉긋 솟은 느낌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복근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짧고 헐렁한 반팔 크롭티 차림이라지만 가슴 부분에서 굴곡이 조금도 보이질 않는다. 예쁘장한 얼굴과 위로 묶어 올린 롱 포니테일만 아니었다면 남자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였다.
"눈깔."
"네?"
"눈깔 조심해서 굴려. 아직 니가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어서 봐주고 있는 거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노골적인 협박성 멘트에 곧바로 시선을 위로 올려 여자의 얼굴 쪽에 포커스를 집중했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긴 하지만 가슴 쪽을 본 시선은 확실하게 들킨 것 같고, 이 이상 심기를 상하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위험 신호가 마구 울려대는 탓이었다.
"앉아."
"......"
문 바로 옆에도 사람이 하나 서 있으니 도망치는 건 무리겠다 싶어 순순히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금 보니 여자만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있는 가드들도 나보다 가진 정기가 많았다.
뭐가 됐든 간에 잘못 걸린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긴 한데.. 너, 뭐냐?"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여자 쪽에서 대뜸 질문을 던졌다.
뭐냐니,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 이름은 최민석이고, 나이는 스물넷.."
"그딴 거 말고, 니가 뭐 하는 놈이냐고."
"아직 하는 일은 없고.. 카페 하나 차리려고 준비 중인데.."
"야."
물어봤으면 말하는 건 끝까지 들어줄 것이지. 다 듣지도 않고 말을 뚝뚝 끊어댄다. 물론 직접 불평할 수는 없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너도 나 보자마자 좆됐다 싶은 표정 지었잖아. 뭘 아는 게 있으니까 그랬던 거 아니야."
"아니.. 들어오자마자 정면에서 험상궂은 사람들 둘이 떡하니 서 있으니까.."
"지랄 말고. 나랑 제일 먼저 눈 마주쳤잖아."
평소에는 최대한 표정이나 시선을 관리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에 전부 너무 티가 났던 모양이다.
"아니, 잠깐만요. 애초에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데요? 갑자기 사람 불러놓고 심문하듯이.."
"내가 누군진 아냐?"
"..모르죠."
일단 가드들이 같이 서 있는 걸 보면 클럽 관계자인 것 같긴 한데, 그 이상은 전혀 짐작이 안 된다.
이번 대답은 뭔가 생각할 여지가 있었던 건지, 여자는 잠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사장이거든. 지금 상황은 내 업장에 수상한 놈이 들어와 있길래 끌고 와서 뭐 하는 놈인지 확인해 보려는 상황이고."
수상하다? 뭐가 수상해 보였다는 거지? 이 클럽에 다닌 건 오늘로 3일 째고, 딱히 수상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다.
그나마 짚이는 게 있다면 최면을 썼다는 것 정도인데, 주변은 물론이고 당사자조차도 위화감을 느끼기 힘들 정도의 최면만 사용했었으니 그걸 들킨 건 아닐 것이다.
이 여자 눈에도 최면을 걸 때 상대에게 정기를 흘려 넣는 게 보였던 걸까? 내가 한 행동이 최면이라는 것까지 알았다면 분위기가 조금 더 험악했을 것이다.
"쓸데없이 대가리 굴리지 말고. 이제 대답이나 하지? 너 뭐 하는 놈이야?"
"그게..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뭐 여자 꼬셔서 뭐 돈 뜯어내고 그런 적은 없거든요? 진짜 건전하게 원나잇만 하고 끝냈었어요. 한 명은 연락처도 받아놔서 확인시켜드릴 수도 있는데."
"그래? 그거야 나중에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지금 하는 얘기는 그게 아니잖아. 말로 하는 게 싫으면 뭐.. 다른 방법으로 물어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줄까?"
"아니, 아니. 진짜 몰라서 이러는 겁니다. 최소한 제가 왜 수상해 보이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솔직히 제가 여기 한 거라고 해봤자 술 마시고 여자들이랑 얘기 좀 하다 나간 것밖에 없는데.."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게 맞긴 했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도대체 왜 수상하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그걸 모르면 얘기 자체가 안 된다.
최면을 걸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에게 정기를 흘려보내야 하는데, 이 여자는 몸 전체에 얇은 막처럼 정기를 두르고 있어서 최면도 제대로 안 걸릴 것 같다.
물론 가진 정기를 한 번에 다 때려 박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최후에나 할 만한 도박이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이번 질문은 뭔가 느낌이 쎄하다. 표정은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긴 하지만 뭔가 최후통첩 같은 느낌이 풍기는 게 대답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닌데, 이것만 대답해주시면 저도 솔직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야, 니가 지금 질문 같은 거 할 처지 같아?"
별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던 목소리에 약간이지만 짜증이 섞인 게 느껴진다. 그래도 일단 한마디 더 할 여유는 생겼으니 최대한 쫄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닌 건 알겠는데. 저도 좀 억울하거든요? 지금 상황 자체가 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수상해서 끌고 온 거라면서요.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웃긴 새끼네?"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여자 쪽은 정말 웃긴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뒤쪽에 서 있던 가드들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야, 니들 생각은 어때?"
"..일단 얌전히 놀기만 한 건 맞습니다."
다른 둘은 가만히 있고, 한 명이 대표로 대답했다. 말투가 지나치게 딱딱하긴 했지만 어쨌든 공평하게 내 편을 들어준 셈이다.
"들었지? 그래서 지금 니가 줘 터지고 있는 게 아니라 말로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일단은 잘못이 없어 보이니까. 들어보고 문제없다 싶으면 그냥 보내줄 거라고. 정 억울하면 여기 VIP룸도 빌려주고 술이랑 안주도 제일 비싼 걸로 넣어줄게."
진짜 한숨만 나온다. 물론 겉으로 티 낼 수는 없어서 생각만 할 뿐이었다.
'아무튼, 최면 쪽은 모르는 것 같으니까..'
적당히, 최대한 그럴듯한 말을 지어낼 필요가 있었다.
"..진짜 사실대로 말하는 거니까 믿어주셔야 합니다."
"진짜 개소리만 아니면 믿어줄 테니까, 지껄여봐."
뭐가 됐든, 이 여자와 주변에 있는 가드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적당히 그럴듯한 허구를 섞어서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도화살..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도화살..?"
"저도 제대로 설명할 정도로 자세히 아는 건 아닌데, 일종의 체질이라고 해야 하나 팔자라고 해야 하나. 좀 성적인 의미로 사람들을 홀리는.."
"설명은 됐어, 뭔지는 아니까. 그래서, 니가 도화살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건 다행이다.
예전에 군대에서 봤던 TV 다큐에서 잠깐 봤던 내용이라 제대로 지어내기는 힘들었는데.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길 가다 만난 무당이.."
"무당이? 길 가다가 그냥 너 붙잡고 도화살이라고 알려줬다고?"
"예. 그러면서 여자 때문에 팔자가 꼬일 수도 있으니까 굿으로 살을 누르거나 부적을 쓰는 게 좋다고 했었는데, 마음에 든 여자한테는 뭐가 흘러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되면 호감 사기가 좀 쉬워지거든요. 근데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싶어서 그냥 내버려 뒀었죠."
"흠.."
먹힌 건가? 반응을 보면 일단 먹혀든 것 같긴 한데.
"도화살이라 이거지."
"..저도 그렇게 듣기만 한 겁니다. 제가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어 되는대로 내뱉은 거라 말하면서도 안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먹힌 것 같다.
"손 내밀어봐."
"손이요?"
슬슬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는 것 같길래, 되물으면서도 곧바로 팔을 뻗어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 쪽에서도 마주 팔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안 익힌 것 같은데. 그렇다기엔 양이 너무 많단 말이지."
뭔가를 익혔니 마니 하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궁금증보다는 일단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튼, 이제 믿어주신 거죠?"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살짝 힘을 주며 묻자 미련 없이 손목을 놔주면서도 보내줄 생각은 없는지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궁금한 게 있어서. 내일? 아니, 지금 좀 와봐. 급한 건 아닌데, 일단 와 보라니까. 직접 봐야 확인이 될 거 아니야. 그래, 마음대로 마시고 가."
핸드폰 너머로 순식간에 대화가 휙휙 오도가더니 통화가 끊어졌는지 핸드폰 화면을 꺼버리고는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20분 안에 올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누가 오는 겁니까?"
"무당."
"......"
무당? 진짜로? 아무리 생각 없이 급하게 지어낸 말이었다지만 세상 누가 이 상황에서 곧바로 무당을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착한 무당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정 안 되면.. 나랑 만났던 무당이 사이비였나보다 하고 넘어가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가 너무 어색해서 적당히 테이블 위에 늘어진 안주를 집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고, 1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짧고 헐렁한 반바지에 검은 반팔티, 모자를 눌러 쓴 여자는 문도 닫지 않고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얘야? 딱 보니까 얘겠네."
그러면서 혼자 질문하고는 혼잣말로 확신하며 이쪽을 지나쳐 가더니 맞은편에 있는 여자 옆에 나란히 앉았다.
"뭐야, 왜 여기 앉아?"
"그럼 쟤 옆에 앉으리?"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양주를 따서 유리컵에 시원스럽게 부어넣고는 물처럼 벌컥벌컥 넘겨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보여?"
"으음.. 딱 보니까 색이 엄청 끼긴 했는데, 여기저기 흩뿌리고 다니는 느낌은 아니고, 도화살..? 그런 쪽 느낌이긴 한데 미묘하게 다르네. 나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뭐라고 술술 내뱉고 있기는 한데,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적적으로 도화살 비슷한 느낌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어떻게든 살아나갈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