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화 > 지기 싫은 여왕님 함락 시키기 (3)
클럽에서 나와 다른 두 사람과 갈라지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근처에 있는 적당한 포차로 들어가 소주와 안주를 이것저것 시켰다.
적당히 내 입맛에 맞게 파전에 닭튀김, 계란말이를 시켜놓고, 한예슬과 다시 술 대결을 이어 나간다.
아까처럼 무턱대고 마시지는 않고, 소주잔에 한 잔씩 따라 안주랑 같이 잔을 비워나가다 보니 술이 맛없긴 해도 그럭저럭 마실만했다.
"예슬 씨 진짜 잘 마시네요."
클럽에서도 양주를 세 병 가까이 비웠고, 포차에 와서도 벌써 소주를 두 병씩 비웠음에도 아직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으니 아까 했던 말이 그냥 허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건 좋지도 않다는 의미기도 했다.
"..당연하죠. 그쪽은.. 슬슬 힘든 것 같은데요..?"
슬슬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고, 말끝이 조금씩 늘어진다.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있던 눈꼬리도 살짝 내려가 있는 게 슬슬 취기가 올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저요? 저야 완전 멀쩡하죠. 그럼 한 병 더 시킬까요?"
"..마음대로 해요."
마음대로 하라는데, 당연히 마음대로 해줘야지.
한예슬의 대답을 듣자마자 곧바로 소주 두 병을 더 시켜놓고, 조금 페이스를 올려 소주를 계속해서 들이키다 보니 두 병을 비우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한 번 취기가 올라와 버린 탓인지, 한예슬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게 실시간으로 보인다.
본인도 자기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알기는 하는 모양인지,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고 버티려고 하고 있었지만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 조금씩 고개를 꾸벅거리며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아이고. 그러게 적당히 좀 마시시지. 이제 진짜 취하셨네."
"아니.. 거든요오..?"
여기까지 와서도 지기는 싫은 건지 구부리고 있던 등을 쭉 세우며 대답했지만, 이번에는 살짝 내려간 눈꼬리와 함께 발음이 쭈우욱 늘어진다.
"정말로 안 취했어요?"
"당연.."
"솔직하게 대답해요. 계속 마시다 예슬 씨 뻗으면 어디로 데려갈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
아무리 그래도 잠든 상대랑 하는 건 취향이 아니니까.
살짝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하자, 한예슬의 표정에 고민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스스로도 이젠 취했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긴 싫고, 그렇다고 해서 계속 마시자니 정말로 이 뒤에 어떻게 될지가 무서운 것이리라.
아무래도 이쯤에서 한 번 접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알았어요, 그럼 술 마시는 건 제가 진 걸로 해요. 예슬 씨 진짜 술 세네."
"아.."
물론 말로만 접어줄 뿐이지, 너무 대놓고 지고 넘어가 주는 말투였던 탓에 한예슬은 조금 욱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번에도 더 마시자는 말은 못 하고 입술만 잘근거렸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조금 걸을까요? 아, 제가 취했다는 얘기에요."
"......"
계산을 마치고 포자에서 나와 불안하게 휘청휘청 걷는 한예슬과 적당히 근처를 걷다가, 적당히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초코 우유도 하나 사서 건넸다.
"마셔요. 내일 숙취 때문에 고생할라."
",,흥."
내가 편의점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앞에 있는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있던 한예슬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건네는 초코 우유를 노려봤지만 결국에는 홱 낚아채듯이 받아들고는 벌컥벌컥 마셔 원샷해버렸다.
"이제 좀 괜찮아요?"
"괜찮다구요오..! 으, 읏..!?"
"어이쿠."
초코 우유를 다 마시고도 멍하니 앉아있는 한예슬에게 손을 뻗으며 묻자, 알아서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한 번에 벌떡 일어나려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한예슬을 받쳐준다.
"윽..!"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는지, 한예슬의 표정이 단박에 확 구겨졌다.
"힘들면 좀 쉬었다 갈까요? 시간 보니까 차도 다 끊겼을 테고, 택시 잡기도 힘들 것 같은데."
"으읏.."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는 한예슬을 뒤에서 받쳐주면서, 작게 속삭이듯이 묻자 완전히 등을 기대고 있던 몸이 흠칫 떨려온다.
당연히, 여기서 쉬자는 말은 아니다.
나이트클럽 인근에 있는 거리답게, 편의점 바로 앞에도 대놓고 간판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모텔이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아, 남자랑 둘이서만 들어가기엔 좀 그런가? 정 걱정되면 여기서 쉬어요. 저야 괜찮긴 한데, 여자들은 무서울 수도 있으니까요. 어떡하실래요?"
"......"
고민한다.
한예슬은 나한테 몸을 기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완전히 체중을 실어 몸을 맡겨놓고는 취해서 반쯤 풀어진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정 무서우시면 무리 안 해도 돼요. 그냥 여기서 적당히 바람 쐬다가 가는 것도.."
"..가요."
"네? 어딜요?"
"모텔.. 들어가자구요오.."
아무래도 너무 오래 고민할 것 같아서 적당히 도발이나 좀 하려고 했는데, 굳이 더 도발할 필요도 없었나 싶을 정도로 빠른 결정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거절하는 게 맞겠지만, 지기 싫다고 거듭 최면을 걸어놓은 것도 있고, 본인의 원래 성격에 술도 잔뜩 취했으니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기 힘들긴 했을 것이다.
"정말 괜찮겠어요? 아까 보니까 저랑 둘이서만 있는 것도 불안하신 것 같던데."
"됐으니까아.. 가자구요오..!"
어떻게 대답할지 이미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가볍게 도발을 날려주자 아예 자기 쪽에서 똑바로 서서는 내 팔을 붙잡아 모텔 쪽으로 막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만약 여기서 튕겼다면 최면을 한 번 더 써야 했을 텐데. 모텔까지 들어갔다면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
잔뜩 허세를 부리며 최민석을 잡아끌고, 모텔 건물 안으로 들어온 한예슬의 머리는 평생 이랬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 이게 맞나? 지금이라도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러면 진짜 겁먹었다고 생각할 텐데..!'
거의 2년 가까이, 바쁜 시험 기간을 제외한다면 꾸준히 클럽에 다니고, 남자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우습게 알며 놀았던 한예슬이었지만 놀랍게도 남자와 함께 모텔에 들어오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클럽에는 항상 이채영과 함께 갔었고, 2차 역시 2대 2로 포차에 가서 건전하게 즐겼을 뿐이다.
물론, 그 뒤에는 각자 찢어졌으니 이채영 쪽은 이미 남자 경험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예슬은 항상 모텔까지는 가지 않고 남자와 헤어져 유유히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 MT 때도, 어떻게든 자신을 취하게 해보려는 선배들을 전부 격추시키고 유유히 안전하게 침실까지 돌아가 잠을 청할 수 있었을 정도의 주량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자신 있던 주량 승부에서 져버렸다.
최민석이야 말로는 자기가 졌다고 말하긴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자신이 지고 고집부리는 걸 최민석 쪽에서 지고 넘어가 줬다는 게 뻔히 보이는 상황이라 더더욱 분했다.
그것만으로도 분한데, 남자랑 같이 모텔 들어가는 게 무섭다고 건물 코앞에서 들어가기 싫다고 버텨야 한다니.
이미 패배를 한 번 적립해둔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소라면 하나도 안 취했으니까 괜찮다고, 멀쩡하니까 집에 가서 자겠다고 말하며 매달리는 남자를 뿌리치고 휙 떠나버렸을 텐데. 오늘은 다리에 힘이 풀리고 휘청거려서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은 자존심이 이성을 억누르고,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로 허세를 부려 최민석을 모텔까지 끌고 온 상황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속으로는 이게 맞나? 지금이라도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같은 생각이 쉴 새 없이 머릿속을 채워나갔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에는 방을 잡고 안까지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철컥하고 문이 닫힌 순간.
"으, 으우웁!?"
현관에서부터 갑작스럽게, 도망치지도 못하게 뒷머리를 받쳐진 채로 입술을 답쳐졌다.
"으웁, 웁, 츄읏.. 읍, 후으읏..!"
안 그래도 평생 겪어볼 일 없었던 취기로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갑작스럽게 입술까지 덮쳐지니 숨까지 막히고 당황스러워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는다.
어느새 뒷머리만이 아닌 등까지 꽉 끌어안은 탄탄한 몸에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고, 뱀처럼 들어와 입 안을 미끄덩거리며 휘저어대는 감촉에 얼굴이, 아니 몸 전체가 화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후읍, 움, 츄읍.. 움.. 후으, 후앗.. 읍.. 응.."
키스라는 게 이런 거였나?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보니 이게 맞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키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더 부드럽고 끈적한,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숨이 턱턱 막혀오고, 미끄덩거리는 혀로 입 안 곳곳을 칠해지는 듯한 느낌이라 음란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조금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흐웁.. 움.. 후앗.. 그마안.. 읍, 츄으읍.."
숨이 막혀 한계라고 생각할 때마다, 짧게 입술이 떨어져 나가며 간신히 숨을 들이키게 해줬다가, 다시 입술을 틀어막고 입 안을 마구 휘저어댄다.
덕분에 겨우 정신만 차리고 키스를 받아내다가 어떻게든 숨을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침까지 꼴깍꼴깍 삼켜가며 겨우겨우 코로 숨을 쉬고 헐떡거리며 몸을 떨어야 했다.
"흐웃..! 하앗..! 하앗..!"
그렇게 길었는지 짧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던 시간이 지나가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를 파들파들 떨어가며 최민석의 품에 몸을 기댄 채로 가쁘게 숨을 들이켜고 내뱉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뭐, 뭐가요."
마음 같아서는 갑자기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싶은데, 이번에도 그놈의 자존심이 발목을 붙잡는다.
아니, 애초에 남자와 이렇게 모텔까지 와본 경험이 아예 없다 보니 이게 당연한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클럽에서 만나 술까지 마시고, 모텔에 들어온 남녀가 하는 일이야 뻔한 건데. 여기서 화내는 게 맞는 걸까?
다른 여자들은 안 그러는데, 자신만 유난 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만약 그런 거라면 대놓고 경험이 없다고 티 내는 것 아닌가.
"일단 씻을까요?"
"그, 그래요. 저는 좀 쉬고 있을 테니까, 먼저 씻고 오세요."
먼저 쉬겠다고 말하는 건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와 씻고 나올 용기는 더더욱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한예슬이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더 가차 없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씻죠."
"네, 네..?"
같이 씻자고? 그러니까, 여기서 같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서 같이 씻자는 말인가?
취기 때문에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머리 탓에 그 쉬운 말을 해석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분명 번갈아서 따로 씻고 나왔던 것 같은데?
"그, 그래도 같이 씻는 건 좀.."
"예슬 씨가 너무 휘청거리니까 불안해서 그래요. 지금도 제대로 서지도 못 하는데, 혼자 들어갔다가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
뭐라도 반박을 하고 싶은데,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완벽한 외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