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 지기 싫은 여왕님 함락 시키기 (2)
"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벌써 얼굴도 조금 빨개진 것 같고."
잔을 가득 채운 한예슬에게 다시 한번 도발을 날려주고는, 잔에 따라진 양주를 반 정도 마시고 내려놓는다.
아무리 그래도 초반부터 너무 빨리 달릴 필요는 없으니까.
한예슬은 이번에도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는, 다시 한번 잔에 따라진 술을 한 번에 다 마셔 버리고는 잔을 턱 내려놨다.
"괜찮으세요? 말이 없으신 거 보니까 취하신 것 같은데."
"..멀쩡해요."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더니, 취한 거 아니냐고 살짝 도발한 것만으로도 쉽게 입을 열어버린다.
이렇게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확실하게 최면이 들어간다는 건 본인의 성격 자체가 원래 이렇다는 뜻이다.
남들이 떠받들어주길 원하는 것도 그렇고, 지기 싫어하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첫인상대로 자존심이 센 여왕님 같은 성격이었다.
"술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마시는 거예요."
살짝 뜸 들이긴 했지만, 또 취했냐는 소리는 듣기 싫었는지 새침하게 대답을 돌려준다.
'이건 확실히 해두는 게 낫겠네.'
애초에 살살 웃으며 비위 맞춰주기 귀찮아서 이런 최면을 택한 거니까. 곧장 한예슬에게 [최민석의 말을 무시하면 취했다고 생각되는 것 같아 무시하지 않는다.] 라고 새로 최면을 걸었다.
마침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인지, 정기의 소모도 거의 없이 스무스하게 최면이 들어갔다.
"두 분이 친구라고 했었죠? 몇 살이에요?"
"스물.."
"아! 스물셋이에요!"
한예슬이 대답하기도 전에, 불쑥 끼어든 이채영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뭐야, 우리보다 어렸어?"
그리고 김현우는 정말로 놀란 듯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빠라고 불러줄까요?"
"아, 아니.. 음.."
"어째 실망한 눈친데? 누나인 쪽이 좋았냐?"
"뭐, 뭐래."
"꺄하하. 그런 거예요? 완전 귀여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뭔가 기분이 복잡하면서도 허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본인이 암만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물셋이면, 대학생이겠네요?"
"..네."
이채영한테 물어보면 대화를 이끌어가기 쉽긴 하겠지만 지금 내 타깃은 한예슬이니까. 굳이 한예슬 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학과인데요? 둘이 같은 데 다녀요?"
"영어교육과에요."
"영어교육과면.. 선생님 하는 거예요?"
"네."
이번 건 어째서인지 칼같이 대답해준다.
'꿇릴 거 없다는 건가?'
하기야, 교사 정도면 당당하게 밝힐 만한 직업이긴 하다.
"저는 수학교육과에요!"
"오. 수학이라고 하니까 더 똑똑해 보이는데요?"
"엣헴. 저 똑똑한 여자라고요."
한예슬은 영어 교육과, 이채영은 수학 교육과. 둘 다 예비 교사라는 뜻이다.
솔직히 클럽에 다니는 여자들이니 그렇게 똑똑하다는 인상은 없었는데, 의외였다.
'아니, 학과가 아니라 대학을 물어봐야 하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다. 어차피 저 둘이 교사를 하던 교수를 하던 오늘 하루 만나고 말 사이인데. 괜히 학벌 따진다고 인상만 나빠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대학인지는 안 물어봐요?"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채영 쪽에서 대뜸 왜 더 안 물어보냐고 따진다.
"저야 입시 쪽에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대학 이름은 들어도 모를 것 같아서요."
이미 내가 고졸이라는 것도, 코인으로 대박을 쳐서 카페 창업을 준비 중이라는 것도 밝혀둔 뒤라 이런 얘기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흐흥. 들으면 알 걸요?"
"그럼 물어봐야겠네요. 무슨 대학인데요?"
"한영대 사범대요. 알죠?"
거의 엎드려 절 받는 수준이었지만 이채영은 당당하게 대학 이름을 밝혔다.
그래도 한국에서 SKY와 서성한을 모르는 사람은 찾기 힘들 테니,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도 당연했다.
"당연히 알죠. 진짜 한영대에요?"
"진짜죠. 학생증 보여줄까요?"
"보고 싶긴 한데, 보여줘도 괜찮아요?"
"안될 거 없죠."
이채영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곧바로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놨다.
"오오, 사진 예쁘게 나왔는데요?"
"아, 뭐야! 사진이 아니라 학교를 봐야죠!"
어차피 학벌에는 별로 관심도 없던 터라, 사진부터 구경했더니 곧바로 학생증을 확 낚아채 다시 지갑으로 숨겨버렸다.
"아무튼, 둘 다 진짜 공부 잘했나 보네요. 부럽다, 부러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칭찬을 해주면서, 잔에 남아있던 양주를 마저 다 마셔 버리자, 곧바로 한예슬 쪽에서 이쪽도 보라는 것처럼 잔을 가득 채운 양주를 반쯤 마시고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며 달칵 내려놓는다.
'그럴 거면 자기도 대화에 끼던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번에는 이채영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 버린 감이 있다.
'현우랑 놀 것이지, 왜.. 아아.'
이해했다.
이채영도 김현우가 마음에 든 건 맞는데, 저놈이 입을 꾹 다물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있으니까 나랑 떠들 수밖에 없는 거다.
'에라이.'
나도 서큐버스 시스템이 생기기 전까진, 그리고 생긴 뒤에도 최면이 걸린 상대가 아니면 말 섞는 게 어색했으니 이해가 가는 만큼 뭐라고 하기도 애매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최면 없이 여자랑 얘기할 때는 조금 긴장되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나.'
어쨌든 오늘은 전역한 걸 축하해주러 온 거기도 하고, 평생 안 올 것 같았던 클럽이라는 장소에 온 것도 저놈 덕분이었으니 조금은 더 서비스 해줘도 괜찮겠지.
'적당히.. 얘기만 틀 수 있게..'
이채영에게는 김현우가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귀엽다고 느끼도록 해놨으니까, 긴장하고 있는 부분은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자기도 이채영과 좀 더 대화하고 싶다는 욕구만 더 부풀렸다.
'그리고 이채영 쪽은..'
평소의 나라면 쓰지 않을 방법이지만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김현우 쪽이 대상인 만큼 조금 과감하게 최면을 건다.
[김현우가 귀엽다. 동정일 것 같다. 섹스할 때도 긴장하고 있으면 엄청 흥분될 것 같다.]
이 짧은 시간에 김현우가 귀엽게 느껴진다는 최면이 빠르게 자리를 잡은 모양인지, 예상외로 정기의 소모가 적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못 먹으면 뭐..'
본인 잘못이지 뭐.
최면 덕분인지 긴장하면서도 이채영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김현우를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한예슬 쪽으로 시선을 돌려 집중했다.
2대 2로 만나긴 했지만 다 같이 놀고 헤어질 것도 아닌데, 각자 상대에게 집중하는 게 좋겠지.
"현우도 이제 긴장이 좀 풀린 것 같네요. 짠, 괜찮죠?"
"..마음대로 해요."
양주가 가득 차 있는 내 잔과 반 정도 차 있는 한예슬의 잔이 짤랑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서로가 말없이 잔을 입으로 옮겨 내용물을 시원스럽게 삼켜 잔을 비운다.
그리고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잔을 가득 채운다.
"괜찮으시겠어요? 이거, 도수도 좀 센 것 같던데. 슬슬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괜찮은데, 슬슬 힘드신가 봐요?"
그냥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적당히 도발을 날렸더니, 이번에는 한예슬 쪽에서 피식 웃고는 자기 쪽에서 도발을 해왔다.
'어쭈.'
한예슬 쪽은 허세인지 정말 멀쩡한 건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쪽은 아직 한참이나 여유가 있으니 저렇게 나와준다면 환영이다.
"주량에 꽤 자신 있으신가 보네요? 저도 어디 가서 꿇리는 수준은 아닌데."
"그냥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는 여유롭죠."
나는 평범한 수준인데, 이 정도로 힘들다고 생각하는 거면 술 약한 거 아니냐? 대충 그런 의미일 것이다.
나도 대충 그런 식으로 비꼬고 있었으니 알아듣기 어렵지도 않았다.
"그럼, 술 좀 더 시킬까요? 원래는 예슬 씨 생각해서 이것까지만 마시려고 했었는데. 자꾸 마시면 내일 고생하실 것 같아서."
마침 김현우와 미리 마시던 것도 있어서, 세 병 있던 양주가 거의 다 비워진 참이다.
"..저는 상관없어요."
우스울 정도로 알기 쉬운 반응이지만 여태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존심을 세우던 여자는 못 만났던 탓에 오히려 신선한 기분이다.
곧바로 호출벨을 눌러 최우석에게 양주 세 병을 추가로 세팅하게 했고, 테이블에 새 안주와 함께 양주가 올라오자마자 잔을 가득 채워 동시에 원샷해버렸다.
'더럽게 맛없네.'
취하지는 않지만 워낙 맛이 없어서 마시는 게 고역이긴 하다. 그래도 한예슬 앞에서 힘들다고 내색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표정 관리를 하면서 최대한 맛도 보지 않고 곧바로 삼켜버리는 중이었다.
"야, 야. 그렇게 마셔도 괜찮냐?"
"슬슬 적당히 마셔야 하는 거 아니야?"
별다른 알맹이도 없는 잡담을 몇 마디 나누다가 잔을 채우고, 그대로 다시 원샷해버리고, 다시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다가 잔을 채우고..
간 건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우리의 레이스를 지켜보던 다른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슬그머니 끼어들어 제지하려고 들었다.
"뭐, 어때.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데, 이럴 때 많이 마셔야지. 별로 취하지도 않았고."
"나도 상관없어. 하나도 안 취하는데 뭘."
나와 한예슬 둘 다 여전히 발음도 새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멀쩡했지만 한예슬 쪽은 슬슬 피부가 조금씩 발갛게 물들고 있는 게 보인다.
내 상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몸도 정신도 완벽하게 멀쩡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렇게 술만 마시려니까 입이 좀 심심한데, 2차 가서 안주랑 같이 마실까요?"
"....저는 상관없어요."
이번에는 조금 길게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은 지기 싫은 모양이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일단 저랑 예슬 씨는 근처에서 마저 마시기로 하고, 둘은? 어떻게 할래요? 우린 좀 오래 마실 것 같은데."
일단은 이채영과 김현우를 신경 써주는 척 물어보긴 했지만,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왕 쓰는 김에 시원스럽게 쓰자는 생각으로, 두 사람에게 [둘이서만 마시고 싶다]라고 최면을 강하게 집어넣자 곧바로 반응이 돌아왔다.
"나야 뭐.. 슬슬 취하기도 했고, 적당히 마시고 싶은데.. 채영 씨는요?"
"저도.. 오늘은 적당히 마시고 싶으니까.. 여기서 갈라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어, 어..?"
갑작스럽게, 한예슬 쪽에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 순간 곧장 표정을 관리하긴 했지만, 한예슬이 방금 당황했다는 건 확실했다.
'둘이서만 마시는 건 부담스럽다 그건가?'
물론 이대로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다.
"아, 저랑 둘이서만 마시기 불안하시면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만 마시죠. 많이 마셨으니까 힘드시기도 할 테고요."
"..윽."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투였지만, 한예슬의 성격상 내 말투가 어땠든 간에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남자랑 둘이 마시는 건 불편하지 않냐, 이미 많이 취하지 않았냐. 그렇게 내 멋대로 프레임을 씌워버렸으니까.
"..하나도 안 불편하니까 가요. 안 그래도 더 마시고 싶던 참이니까."
한예슬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세게 허세를 부리면서 몸을 일으킨다.
정말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알기 쉬운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