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 지기 싫은 여왕님 함락 시키기 (1)
이채영은 달랐지만, 한예슬은 최민석이 느꼈던 첫인상대로 여왕님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릴 때부터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로 유치원, 초등학교에서는 항상 인기가 많았고, 어른들에게도 귀여움받으며 자랐다.
2차 성징을 거치며 제대로 '예쁜' 얼굴과 몸매를 갖추게 된 한예슬은 중, 고등학교를 공학에서 다니며 남학생들의 시선과 호의, 여학생들의 은근한 질투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여왕님스러운 성격으로 변해갔다.
대학에 가서는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개화한 얼굴과 몸매 덕분에 동기,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그녀와 밥 한 끼, 커피 한 잔이라도 함께 하기 위해 무수한 호의와 조공을 바쳤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받아왔던, 특히 남성으로부터의 호의는 한예슬에게 있어 즐겁다기보다는 당연한 일에 가까웠다.
클럽은 대학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첫 방학 때 유일한 친구인 이채영과 함께 경험하게 됐다.
이채영을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급이 맞았기 때문이다.
성적도 비슷하고, 집안도, 외모도 비슷한 수준이다. 덕분에 여자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은근한 시기와 질투, 기 싸움 같은 것이 없이 서로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관계였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성격 정도일 뿐이겠지만, 여왕님 같은 성격의 자신과는 달리 이채영은 밝고 소탈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서로 부딪힐 만한 일도 없었다.
이채영이 클럽에 가자고 권한 이유는 재밌을 것 같아서였고, 한예슬도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왔다가 은근히 재미가 들렸다.
'하여튼, 다 똑같다니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채영이 봐온 남자들은 욕구에 솔직하고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클럽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그 이상으로 노골적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친구부터, 연인부터 시작하려는 지금까지의 남자들과는 달리 어떻게든 자신과 하룻밤 자보려고 안달이 난 모습은 정말 우스울 정도였으니까.
그냥 적당히 앉아서 말만 들어줘도 양주니 위스키니 하는 온갖 술을 갖다 바치고, 희번뜩한 눈으로 언제쯤 섹스를 할 수 있을까 각을 잰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여자 입장에서 보면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자기만은 안전한 남자인 척 연기를 하면서 말이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주에 한두 번씩은 클럽에 다녔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클럽 골드는 수질 관리를 확실하게 하는 덕분에 질 나쁜 손님도 없고, 남자 쪽에서 술만 마시고 간다고 해서 여자 쪽을 겁박하거나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할 수조차 없어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아무튼, 남자들은 다 똑같다.
하나같이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이성적인 척하면서도 부글부글 끓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안달을 낸다.
분명 그랬을 텐데.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예슬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뒤통수를 몰래 흘겨보며 생각했다.
웨이터에게 조심스럽게 부킹을 권유 받았을 때만 해도 평소처럼 괜찮은 남자가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외모가 어느 선을 넘으면 클럽 쪽에서도 여자 측에게 아무 남자나 연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룸에 들어가서 얼굴을 봤을 때는, 솔직하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시원스러운 인상의 미남이라고 해야 할지. 분하지만 얼굴은 흠잡을 곳이 없었고, 어깨도 넓게 벌어져 체격도 괜찮아 보였다. 옷도 깔끔하게 잘 입은 게 여태 만난 남자 중에서도 가장 괜찮은 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남자 조차도 자신과 이채영의 몸을 훑어내리는 모습을 보고 결국에는 똑같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면에서 눈을 마주쳤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몸을 훑어내리는 모습은 더더욱 노골적이다.
다른 남자들은 적어도 여자 쪽에서 경계하지 않도록, 불쾌해하지 않도록 은근슬쩍 보려는 시도 정도는 하는 편인데, 최민석은 눈이 마주쳤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눈동자를 굴려댔으니까.
그래도 얼굴은 봐 줄 만하고, 옆에 앉은 남자도 수준이 나쁘지는 않았기에 일단은 합석했다.
자신과는 달리 클럽에서 생기는 '만남' 자체를 즐기는 이채영은 평소처럼 더 좋은 남자인 최민석을 자신에게 양보했고, 클럽에 처음 온 건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남자 쪽으로 향했다.
굳어있으면 굳어있는 대로 놀리는 맛이 있으니까.
그렇게 자리까지 정하고, 이제는 이 잘생긴 남자가 어떤 식으로 안달 나서 달려들지를 구경하려고 했었는데..
'도대체 뭐야?'
합석하고 난 뒤로 자신에게는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더니,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통성명을 맞추고 잡담까지 나누다가 뒤늦게 신경 써주듯이 이름이나 물어보고 말았다.
"..한예슬이에요."
"아아, 예슬 씨라고 하는구나. 예슬 씨는 클럽 처음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지 무시하기는 조금 그래서 대답해줬더니 긴장해서 굳어 있는 줄 알고 쓸데없는 질문이나 한다.
"아, 처음은 아닌데, 오늘은 나오기 싫다는 걸 제가 혼자 오기는 싫다고 억지로 끌고 나왔거든요."
그래도 슬슬 대화를 트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안달 나게 해주려고 기분 나쁜 척 적당히 무시했더니 적당히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이채영이 끼어들었다.
여기까지는 자신을 신경 써서 해준 말이었으니 괜찮았지만.
"그러셨구나. 억지로 나오셨으면 놀 기분이 안 날 수도 있죠. 그러시면 귀찮게 안 할 테니까 편하게 쉬다 가세요. 그래도 지금 그냥 가 버리시면 채영 씨도 불편하실 테니까요."
이렇게 말해놓고는 정말 한참 동안 말을 걸기는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른 두 사람과 섞여 시답잖은 얘기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도대체 뭐냐고..!'
남자들은 다 똑같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려고 하면서도, 예쁜 여자가 눈앞에 있으면 어떻게든 한 번 따먹으려고 안달을 내는 게 뻔히 보인다.
그런데, 최민석은 그게 안 보인다.
항상 욕구에 가득 찬 남자의 시선을 받아오며 익숙해진 만큼 조금이라도 그런 기색이 있다면 눈치 챌 수 있었을 텐데.
최민석은 뭔가.. '관심은 있지만 아니면 말고'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자신과 이채영을 훑어보는 걸 봤었는데, 그 뒤로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방치라니.
설마, 먼저 들이대긴 자존심 상해서 아예 관심조차 없는 척하고 자신이 못 참을 때까지 애태우려는 걸까?
'..웃겨.'
남들이랑 다르게, 배려심 있는 척하면 여자 쪽에서 반해서 먼저 말이라도 걸어줄 줄 아는 건가?
최민석 본인에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한예슬에게는 최민석이 남들이랑 다른 행동으로 자신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것처럼만 보였다.
'마음대로 해보라지.'
그런다고 넘어갈 줄 아나.
최민석의 의도는 뻔히 보인다. 하지만..
"아이고, 살다 살다 내가 귀여움이 없어서 저놈한테 밀리는 날이 오네."
"다음에는 민석 씨도 귀여움 컨셉으로 승부해보세요."
"에이. 남자가 돼서 그럴 순 없죠."
"야, 그럼 내가 뭐가 되냐?"
"뭐래. 귀여움 받으니까 좋아 죽으려고 하면서."
자기만 빼놓고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으니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항상 남자들에게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의 호의를 받으며 어떤 집단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거나, 그 근처에서만 생활했던 한예슬에게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너무 낯설고 불편했다.
'채영이 쟤도 재밌다고 놀기만 하고 있고..'
저쪽은.. 김현우라고 했던가? 이름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저런 게 취향인가? 그럭저럭 괜찮게 생기긴 했지만, 그렇게 잘생겼다고 할 정도도 아니고, 바짝 긴장해있던 상대치고는 취급이 좋다.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 중에 가장 접촉도 많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하..'
뭔가 짜증은 나는데,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 양주가 담긴 잔에 얼음이 띄워져 있는 걸 발견하고, 속이나 식힐 겸 손을 뻗다가,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잔을 잡고는 일부러 손목을 꺾어 잔을 테이블에 부딪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입으로 옮겼다.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의도해서 한 행동이었음은 확실했다.
*
방금 난 소리는 누가 봐도 일부러 낸 듯한 소리였다.
나도 김현우와 떠들면서 술잔을 여러 번 들었다 놨다 했었지만 저렇게 크고 선명하게 소리가 났던 적은 없었으니까.
'갑자기 또 왜 이래?'
말하기 싫은 것 같아 내버려 뒀더니, 이번에는 관심 좀 가져 달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고는 또 눈도 안 마주치고 술만 몇 모금 흘려 넣고는 다시 고개를 슬쩍 돌려 대놓고 눈 마주치기 싫다는 분위기를 풍겨댄다.
'애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지.
어쨌든 자기한테도 관심을 달라고 하는 것 같은데, 태도가 저래서야 살금살금 비위나 맞춰주면서 대화를 터야..
'그렇게 해달라는 건가?'
이쪽에 한 번 생각이 꽂히고 보니 그 외에는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도 이제는 여자를 꽤 많이 만나보기도 했고, 예쁜 여자들은 다들 기본적으로 자존심이 센 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행동하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내심 신기하면서도 우스웠다.
어차피 저 정도 얼굴에 몸매면 주변에서도 남자들이 알아서 떠받들어줄 텐데, 뭐가 부족해서 클럽에서 이러고 있는 건지. 웃기는 여자다.
"제가 술맛은 잘 모르는데, 이게 맛있는 술인가 봐요?"
"......"
어차피 대답은 바라지도 않았으니 무시는 적당히 무시하고, 반쯤 비어 있는 한예슬의 잔에 다시 양주를 아슬아슬한 정도까지 채워 넣고 내 잔에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한예슬 쪽에 새롭게 최면을 집어넣었다.
'최민석에게는 얕보이고 싶지 않다. 뭐 하나 지고 싶지 않다.'
그래도 나중에 침대에서 같이 뒹굴 사이인데, 짜증 난다든가 하는 생각은 집어넣지 않고 딱 밀리고 싶지 않다는 감정만 연달아 집어넣고는 곧장 도발을 날린다.
"그래도 적당히 마시세요. 예슬 씨는 술도 약하실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한예슬의 눈썹이 살짝 움찔하며 희미하게 치켜세워지는 게 보였다.
그걸 적당히 모르는 척하면서, 내 잔에 따른 양주를 한입에 벌컥벌컥 삼키고는 다시 채워 넣고 보란 듯이 잔을 가볍게 흔들어 안에 담긴 얼음들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저야 술이 세서 많이 마셔도 괜찮긴 하지만."
"......"
한예슬은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돌렸던 불편한 기색이 당당하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잔과 내 얼굴을 번갈아 흘겨본다.
지기 싫다, 얕보이기 싫다는 최면만 넣었을 뿐이지. 질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한예슬 쪽에서 그냥 져준다고 생각하고 도발을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저렇게 자존심 세 보이는 여자가 그럴 리가 없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 손에 들린 잔을 입가에 대고 나와 마찬가지로 한입에 벌컥벌컥 삼켜버리고는, 자기 손으로 다시 잔을 채우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낄낄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