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 내가 스폰서라고? (5)
불안, 긴장,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끈거림 때문에 가슴이 진정 되질 않는다.
쏴아아-.
멀게 들리는 듯하면서도 가까운 듯한 샤워기 소리와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남성의 실루엣에 자꾸 시선이 가버린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돈을 받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목적을 가지고 몸을 파는 행위일 뿐인데.
기분 나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불쾌한 기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처음 했을 때는 어땠더라?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바짝 긴장한 탓인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침대도 아닌 창가에 있는 푹신한 소파 의자에 앉아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바짝 굳어 있는 사이 물소리가 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민석이 하얀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후우."
욕실 바깥 공기가 시원하다는 듯이 흘러나오는 한숨과 하얀 가운 사이로 보이는 푹 파인 쇄골에 어떻게 생각할 틈조차 없이 홀린 듯이 시선을 빼앗겨 정신없이 쳐다봤다.
"설아 씨도 씻으실 거죠?"
"네, 네에."
잔뜩 긴장한 자신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터벅터벅 걸어와 맞은편에 앉으며 묻는 최민석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안 보고 있을 테니까 편하게 씻고 오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의자에 걸쳐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눈도 맞추지 않는 모습에 조금 쫓겨나는 듯한 기분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욕실 앞까지 걸어갔다.
최민석은.. 정말 안 보겠다는 말을 지킬 생각인지 핸드폰만 보고 있다.
그 모습에 약간의 안심과, 그래도 여전히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몸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빠른 걸음으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하아아."
철컥, 하고 욕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기분이 조금 진정되는 걸 느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유리창이 넓긴 하지만 욕실 밖에서 보이는 건 정말 흐릿한 실루엣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정말 이게 맞나?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와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씻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샤워기의 수도를 한 번에 확 틀어 머리에서부터 온몸으로 물을 맞는다.
쏴아아아-.
물 온도가 정말 딱 좋게 따듯한 수준이라 그런지, 정말로 불안한 마음들이 조금씩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어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축 늘어지듯이 편안해진다.
"아.."
그러고 나서야 머리까지 전부 젖어버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목 아래로만, 아니면 딱 얼굴까지만 씻고 머리는 젖지 않도록 하는 게 보통인데.
이미 두피 안쪽부터 뒷머리 끝자락까지 전부 젖어 물을 맞고 있으니 되돌릴 수도 없었다.
"..모르겠다."
우습게도, 지금 걸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긴장의 끈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건지 머리가 텅 비워지고, 아예 비치된 샴푸로 머리까지 전부 감아버리고 나서야 가운을 걸치고 다시 조심스럽게 욕실 밖으로 나왔다.
"머리까지 감으셨네요?"
"아, 네에. 머리 묶는 걸 깜빡해서.."
"제대로 안 말리면 머릿결 나빠지실 텐데. 일단 머리부터 말리죠."
"저, 저는 괜찮은데.."
"모델이시잖아요. 머릿결도 잘 관리하셔야죠. 자, 앉아보세요."
"아, 읏..!?"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금 강압적인 손길에 이끌려 화장대 앞에 앉혀지자, 최민석이 곧장 수건을 가져와 머리에 묻은 물기를 한 번 더 털어내 주고는 아예 드라이기로 직접 머리까지 말려준다.
마치 이쪽이 접대를 받는 듯한 상황에 약간의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위이이잉, 하고 들려오는 드라이기 소리와 머릿결 사이사이로 바람이 스치며 물기를 말려주는 감각이 너무 편안해서 결국에는 몸을 맡겨 버렸다.
미용실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 머리를 맡기면서도 편안함을 느끼는 걸 보아하니 오늘은 정말 어지간히도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10분이 넘어 거의 20분이 다 되어가는 시간동안 말 한마디도 없이 머릿결 사이스를 스치는 바람과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고 있다가, 희미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드라이기가 멈추고 나서야 눈을 떴다.
"다 됐네요. 잘 말랐죠?"
남성 특유의 두꺼운 손가락이 머릿결 사이로 들어와 스치듯 스르륵 쓸고 내려간다.
확실히 걸리는 느낌이 하나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가는 걸 보니 머리는 잘 마른 모양이지만..
'기분.. 나쁘지.. 않네..?'
가슴이나 허리, 골반, 허벅지 같은 장소를 제외하고, 여자의 경우에는 남의 손이 닿았을 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장소 중 하나가 머리카락이다.
하지만 20분 가까이 머리를 말려주는 손길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건지, 지금 머리를 쓸어내린 최민석의 손길은 조금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저도 남의 머리 말려주는 건 처음 해보는 거라 신선하고 재밌었어요."
"아.."
이게 처음이라고? 그렇게 편안하고 기분 좋았는데?
"오늘 하루 종일 긴장 많이 하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조금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 그러게요.."
나름대로 내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다 티가 났던 모양이다.
조금 얼굴이 화끈거리긴 했지만 다시 긴장으로 몸이 굳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방금 머리를 말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긴장마저도 전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피곤하신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쉴까요?"
"아, 네에.."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거부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다시 한번 최민석의 손에 이끌려 침대 위로 올라와 큼직한 베개에 등을 기대며 반쯤 눕듯이 몸을 앉혔다.
바로 옆에서는 마찬가지로 최민석이 베개에 기대앉아 몸을 살짝 돌려 눈을 맞춰오고 있었다.
"설아 씨는 무슨 계기로 모델이 되신 거예요?"
"계기요?"
"나쁘게 말하려는 건 아닌데, 모델이라고 하면 평범한 이미지는 아니잖아요. 살면서 처음 봤거든요. 모델 하는 사람."
"아.."
직접 모델 일을 하고 있고, 학원에 다니면서 매일 평범하게 모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지내다 보니 자신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확실히 신기한 직업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쪽을 골랐어요. 원래는 연영과에 다녔었는데, 그쪽 업계는 진짜 경쟁이 장난 아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재능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은 수준이고, 재능이 있어도 운이 안 따르면 안 될 정도로요."
모델 업계는 그나마 낫다. 일만 잘 받으면 최소한 생계유지는 할 수 있는 정도는 되고, 연습 같은 걸로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는 만큼 다른 일도 병행할 수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느끼자마자 안 되겠다 싶어서 그만두고 나왔는데, 막상 그만두고 나오니까 전공도 쓸모가 없고, 학벌도 없고. 그나마 가진 외모라도 살려서 할 수 있는 길로 들어온 거죠."
이미 한 번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모델이라는 직업이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결단력이 대단하시네요."
"결단력.. 그냥 도망친 건데요 뭘."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듣기 좋게 우울한 일화를 포장해주는 단어에 자기도 모르게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최민석은 이것마저도 가볍게 받아넘기지 않고, 오히려 조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덧붙여왔다.
"도망치는 것도 결단력이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런 사람들도 있잖아요? 가망이 없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는 게 무서워서 계속 버티다가 성격만 나빠지고 악만 남은 사람들."
"......"
있다.
실제로 연영과에서 졸업을 앞둔 선배들이나, 뭐 얻어먹을 게 없나 학교에 찾아오던 졸업생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다.
뭔가 제대로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기라는 직업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고만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도 무례하고, 성격도 나쁘고, 조금이라도 건수가 있다 싶으면 굽실거리기에 바빠 보기 좋지는 않았다.
"민석 씨는.. 말하는 게 되게 어른스럽네요."
부잣집이라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가?
"아, 제가 너무 아는 척했나요? 그냥 어른들 말씀하시는 걸 몇 마디씩 주워듣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말이 이렇게 나왔네요. 그쪽 업계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아, 아니에요. 정말 그렇구나 싶을 정도로 말을 잘하시길래 그런 거예요."
"그래도요. 제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하긴 했죠."
"괜찮은데.. 아.."
목뒤로, 최민석의 손이 부드럽게 머릿결을 쓸어내린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황스럽지도 않고, 갑작스럽다고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어쨌든, 도망쳤다고 하는 것보다는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새로 찾아서 도전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잖아요."
지금도? 내 평소 생활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이렇게 몸을 팔고 있는 일을? 아마도 후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식으로 비꼬는 말을 하기에는, 오늘 보여준 최민석의 언행이나 분위기가 너무 배려심이 넘쳤다.
'예진이한테 들었나 보다.'
정확히 어떤 말로 소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한 사람이라고 들었다고 했으니까.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지만 그래도 성실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부드럽게 스치는 느낌이 기분 좋았고 말이다.
'나도 뭔가 해야 할까?'
그런 생각도 떠올랐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혹시 변태 같아 보이면 어떡하나, 너무 싸 보이면 어떡하나 같은 생각도 들어 더더욱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읏.."
머릿결을 쓰다듬던 손이 스며들듯이 안으로 들어와 목뒤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그 생생한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떨려오고, 쓰다듬어지는 목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게 느껴졌다.
"할까요?"
"..네."
어느새 몸을 숙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최민석의 질문에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고, 약간의 텀을 두고서 최민석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져 온다.
키스하려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술이 닿기도 전에 질끈 눈을 감아버렸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입술이 부드럽게 툭 닿는 게 느껴졌다.
"흐읏.."
살짝 닿기만 하고 떨어져 나가는가 싶더니, 무슨 일이지 하며 눈을 뜨기도 전에 다시 한번 입술이 닿으며 조금 더 강하게 꾸욱 달라붙어 왔다.
"읏.. 응.."
머리가 반쯤 새하얘져서 어쩔 줄을 모르고 눈만 감고 있는데, 부드럽게 달라붙은 입술 사이로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꽉 닫힌 이빨 위를 끝으로 노크하듯이 툭툭 건드려왔다.
열어달라는 뜻이구나.
키스가 처음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 직접 지시를 받고 나서야 천천히 길을 열어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