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 내가 스폰서라고? (4)
외출 준비를 마친 최설아는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복장을 체크했다.
"하아.."
어제는 어쩌다보니 하겠다고 말해버리긴 했지만,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정말 이게 맞나 싶은 마음에 한숨만 흘러나왔다.
여자 모델들 중에는 업소에서 일하거나 스폰을 받으며 생활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혹했던 적도 있다.
고정적인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쥐꼬리만 한 모델 수입만으로 생활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오기 같은 것도 있었다.
오피에서 일하던 애들은 돈이 어지간히도 잘 벌리는지 그걸로 자금을 모아서 모델 일을 그만두고 자기가 쇼핑몰을 창업해 버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모델 일은 취미 수준의 부업이 됐을 뿐이다.
나는 모델로 성공하고 싶어서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건데, 조금 편하게 지내자고 몸까지 팔아가면서 목표와 멀어지거나, 노력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번에 스폰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스폰의 보상이 '돈'이 아닌 '일감'이기 때문이었다.
모델로서의 일이 늘어나면 그만큼 수입도 늘어날 테니 생활도 자연스럽게 편해질 테고, 단순히 몸만 파는 것과는 달리 계속해서 경력을 쌓으며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얘기만 잘 되면 아예 어디 전속 모델로 들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르고요.'
생각보다 좋은 조건에 한창 고민하던 도중에 들려온 그 말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성공을 한다면 가급적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얼굴을 알릴 기회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지금처럼 짜잘짜잘한 쇼핑몰 피팅 모델 수준의 건수로는 가망이 거의 없다.
적어도 학원 측에서 가끔 연결해주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곳들에서 들어오는 일거리가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었다.
짝-!
"후우우."
뺨이 조금 얼얼할 정도로 힘껏 때려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하겠다고 한 일을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무르려고 하면 무를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상황을 타개할 만한 대책도 없이 도망만 치는 것 같아 싫었다.
"사람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한 살 어린 동생의 소개긴 했지만 왠지 믿음이 갔다.
어차피 몸을 팔기로 했다면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에게 파는 것보다는 그나마 신원도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 파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건 생활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성공하기 위한 '기회'를 잡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까똑!
"..앗."
너무 멍하니 시간을 끌었던 걸까. 핸드백에 넣어뒀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꺼내 화면을 확인해보니 예상했던 상대에게 메세지가 와 있었다.
[최민석 : 지금 앞에 도착했습니다.]
최민석, 자신에게 스폰을 해줄 남자에게 온 메세지다.
나이는 스물넷이라고 했던가.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연하라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나이 먹고 기름진 아저씨 같은 사람보다는 낫지 않냐는 말에 곧바로 수긍해버렸다.
프로필 사진은 기본 프로필이라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얼굴도 잘생겼다고 했었고, 어제 잠깐이지만 대화를 주고받아본 느낌으로는 예의도 바르고 성격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최설아 : 지금 내려갈게요.]
상대가 직접 마중까지 나와주는 만큼 먼저 내려가 있으려고 했는데,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늦어버렸다.
미안함.. 보다는 조금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서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자 바로 앞에 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와.."
아무래도 모델 업계 같은 곳에서 일하다 보면 관심이 없더라도 돈 많은 사람도 자주 보게 되고, 그만큼 비싼 차나 시계 같은 것도 많이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신형이었나? 못 해도 2억 정도 하는 것 같던데..'
역시 부자라 그런지 타고 다니는 차도 다르다.
돈이 많고 비싼 차를 탄다고 해서 잘 보이고 싶거나 호감을 사고 싶어지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조금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 맞아요."
잠깐 차를 훑어보며 멍하니 서 있었더니,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훤칠한 남자 하나가 슬쩍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 네..! 지금 탈게요..!"
잘생겼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저 정도면 아예 자기가 모델을 해도 괜찮은 수준이 아닌가.
괜히 허둥지둥하는 자신의 모습에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반대쪽으로 빙 돌아가 차 앞문을 열고 들어와 좌석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사진으로 봤을 때도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실물이 훨씬 더 예쁘시네요?"
"아, 하하.. 그런가요..?"
외모에 대한 칭찬 정도는 지겨울 정도로 들었을 텐데. 지금은 왠지 이상할 정도로 진정되지를 않는 기분이라 자연스럽게 받아넘기지 못하고 어색한 태도로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와.. 팔도 탄탄하고 어깨도..'
그러면서도 눈은 빠르게 남자의, 최민석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내리며 체격을 파악해나간다.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라, 제대로 운동도 하는 모양인지 몸도 굉장히 좋았다.
'이 사람이랑 하는 거구나..'
아예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해버려서는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
'확실히 보정이 없는 게 맞았네.'
오피스텔 현관에서 나오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확신하긴 했지만, 옆자리에 앉은 최설아의 모습을 한 번 더 훑어보며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임예진보다 조금 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키와 매끈하게 빠진 비율이 좋았다.
다만, 옷차림이 조금 아쉬웠다.
사진으로 봤던 엉덩이와 허벅지, 종아리까지 쫙 달라붙는 레깅스 바지와 착 달라붙는 티셔츠에 꽃힌 부분도 없잖아 있었는데.
지금의 최설아는 얇은 여름용 청바지에 얇고 하늘하늘한, 조금 헐렁한 느낌의 여름 가디건을 입고 나왔다.
이건 이것대로 청바지가 착 달라붙어 하반신 라인은 확실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가슴 부분 만은 하반신처럼 확실히 굴곡이 드러나서 나쁘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갈까요?"
"아, 네."
드물게도 내가 아닌 여자 쪽이 긴장해서 바짝 굳어 있는 상황에 신선한 기분을 느끼면서 차를 몰았다.
어디서 먹을지도 이미 정해뒀다.
유서연에게 데이트가 있다고 적당히 예약 좀 해달라고 했더니 코스로 요리가 나오는 레스토랑을 예약을 해줬다.
사실 이런 곳은 나도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유서연과 몇 번 다니면서 익숙해진 것도 있어서 긴장하거나 굳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게로 들어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내가 차를 모는 동안 최설아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표정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일단 처음 만나는 거라 힘을 줘서 고르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런 가게는 좀 불편하네요."
"그래요..? 오히려 익숙하지 않나요?"
"가게에서 대놓고 분위기 잡고 격식 차리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잘 안 오게 되더라고요."
들으나 마나 별 관계도 없는 시답잖은 이야기로 우선은 대화를 튼다.
금수저라는 설정을 생각해보면 쓸데없이 없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임예진 쪽에서 소탈한 성격이라고 미리 소개를 해놨으니 적당히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것이다.
"아,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최설아도 일단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다.
나는 이 가게가 마음에 든다거나, 나도 불편하다거나.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임예진에게 들은 대로 무난하게 상대에게 맞춰주는 성격인 것 같았다.
"설아 씨는 저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처음 만났으니까 이것저것 궁금한 것도 있을 법 한데."
"음.. 저는 이런 식으로 누굴 만나는 게 처음이라.. 아직은 잘.."
"괜찮아요. 저도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거든요. 예진이가 괜찮은 언니가 있다고 하도 추천하길래.. 아, 그렇다고 억지로 나온 건 아니고. 사진을 보니까 너무 제 취향이라 마음에 들었거든요."
"예진이가요..?"
뒷사정이야 어쨌든, 이 만남은 임예진의 주선으로 만들어진 자리다.
모델 학원에 들어간 임예진은 일단 외모와 성격, 조건이 가장 괜찮아 보이는 상대 몇몇을 골라서 친근하게 어울리며 친분을 쌓았고, 자연스럽게 날 소개했다.
언니 사정을 아니까 도와는 주고 싶은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한 번 만나보라는 식이었다.
"네. 학원에서 만난 언니가 예쁘고, 성격도 좋고, 엄청 성실한 사람이라고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아직 연애 생각 없는 거 아니까, 이런 식으로 만나서 도움도 주면서 친해져 보라고요."
"아.."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최설아에게는 임예진이 정말 자신을 위해 날 설득해서 소개해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임예진이 최설아에게 얼마만큼의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처음에는 이게 맞나 싶어서 많이 망설였었는데, 막상 만나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어색하진 않네요. 아까도 말하긴 했지만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예쁘셔서 마음에 들기도 하고요."
"......"
첫인상이 나쁘게 박히지 않는 이상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설아 정도면 주변에서 예쁘다는 소리는 지겹도록 들었을 텐데. 내가 예쁘다고 칭찬해줄 때마다 싫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조금 창피한 듯한 표정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니 흐름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동안 쌓인 데이트 연습 덕분에 대화가 끊기지 않게 익숙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갈 수도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가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시작한 뒤로는 대화가 조금 줄긴 했지만, 요리가 입에 맞냐, 좋아하는 요리가 뭐냐, 다음에는 그런 데 가서 먹으면 되겠다 같은 화제로 편안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고, 중간중간 와인도 자연스럽게 마시게 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운전을 핑계로 마시지 않았지만.
식사가 끝나고, 아주 조금 취기가 오른 듯 볼이 살짝 발그랗게 물든 최설아를 차에 태우고 미리 위치를 찾아둔 모텔로 차를 몰았다.
최설아는 식사까지는 편안하게 마쳤지만, 막상 모텔까지 와 버리니 조금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결국은 내가 재촉하기도 전에 스스로 차에서 내려 모텔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같이 씻는 건.. 나중에 해도 되겠지.'
굳이 모텔까지 와서 따로 씻는 것보다는 둘이 같이 씻는 게 분위기도 풀어지고 혼자 멍하니 있는 시간도 줄어서 좋았지만 아직은 같이 씻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았으니까.
"제가 먼저 씻을 테니까, 설아 씨는 쉬고 계세요."
"아, 네에."
살짝 긴장한 듯 굳어져 있는 최설아에게 제대로 쉬라고 말해주고는 그대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하자 등 뒤로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적당히 모르는 척해주며 옷을 전부 벗고는 욕실로 들어와 느긋하게 몸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