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내가 스폰서라고? (3)
"그러니까, 모델들한테 돈 주면서 하라고?"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너무 낭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묻자 곧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 언니였으면 그렇게 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너무 낭비잖아요."
"그렇지."
다행히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모양이다.
경제적인 감각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 나나 김민아는 가난하게 자란 탓에 돈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자기도 모르게 예민하게 생각하고 아끼려는 경향이 있고, 유서연 같은 경우에는 그냥 생각하는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임예진은, 그 사이쯤에 있는 평범한 수준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평범하게 부족하진 않은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기도 했고, 반쯤 흑역사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본인도 오피에서 번 돈으로 걱정 없이 대학 생활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나나 김민아가 유서연에게 온갖 지원을 받으면서 조금은 느슨해진 것처럼, 임예진 역시 낭비라고 생각하는 소비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님이 그 애들한테 스폰해주는 건 돈이 아니라 일감이에요."
"일감?"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애들은 일단 진지하게 모델이 하고 싶으니까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거라고."
"그랬지."
"그런 애들은 돈도 돈이지만, '가난해도 좋으니까 모델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생각이 있단 말이죠? 그야 성공만 하면 생활 쪽은 걱정이 없어지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서, 걔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일감을 주는 거라고?"
"성공이야 본인한테 달린 거고, 저희는 일감만 주는 거죠. 어쨌든 뭐라도 촬영할 때마다 경력도 쌓이고 얼굴도 여기저기 퍼지는 거니까요. 어쨌든 일이 생기는 거니까 수입도 조금 늘어날 거고요."
결론은 모델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약간의 지원과 함께 금전적인 문제에도 조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유서연이 가끔 소름 끼친다고 하는 것 치고는 본인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공은 본인한테 달렸다며 가장 중요한 부분을 넘겨버렸지만.
'얘도 점점 서연이 닮아가는 건가.'
이제 아마 우리 중에 가장 정상인 건 나까지 포함하더라도 김민아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일감은 어떻게 줄 건데? 서연이가 또 어떻게 도와줬어?"
"에이. 일감 주는 건 쉬웠죠. 결국 학원에서 건수가 들어오면 괜찮은 애들 골라서 보내는 건데, 위에 있는 사람들만 적당히 구워삶으면 되는 거니까요."
"아아."
이제야 전체적인 흐름이 조금 보인다.
학원에서 괜찮은 일거리가 생기면 그걸 학원생들한테 연결을 해주니까, 일감을 누구한테 줄지 결정할 만한 사람한테 최면을 걸어서 나한테 스폰을 받는 애들한테 일감이 갈 수 있도록 라인을 만들어놨다는 뜻이다.
"사실 그게 쉬우면서도 힘들긴 했어요. 너무 몇몇 한테만 일감이 몰리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것도 조정하느라 힘들었고, 학원 안에서도 각자 밀어주는 애들이 달라서 그 부분도 손을 써야 됐거든요."
"고생 많이 했네."
겉으로는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이만큼 애썼으니 칭찬해달라!' 같은 분위기를 마구 뿜어내는 임예진의 모습에 그대로 품으로 확 끌어당겨 안아주고는 머릿결을 꾹꾹 누르듯이 쓰다듬어줬다.
등 뒤로 안고 있는 탓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깨가 가늘게 떨리면서 흐흥, 하고 콧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보니 나름대로 만족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학원은 큰데 저도 일개 학원생일 뿐이다 보니까 나름 파워가 있는 사람들은 만나기도 힘들더라고요? 그거 때문에 사람들 이름이랑 얼굴도 달달 외워놓고, 소문도 주워듣고, 얼굴 한 번 보려고 학원 앞에 있는 카페에서 아예 살았다니까요."
확실히, 이렇게까지 손을 썼다면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당연하다. 임예진이 가끔은 주말까지 써 가면서 밖으로 나돌던 이유는 이런 부분이 가장 컸던 모양이었다.
"음.. 그래서.. 이거 한번 보실래요?"
"뭔데?"
임예진이 뒤로 내민 핸드폰을 받아 확인해보니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다.
곧바로 그중 아무 사진이나 적당히 골라 확대해보자 화보처럼 깨끗하게 찍힌 사진 한가운데에 임예진처럼 앞머리만 살짝 펌을 넣어 가르마를 탄 긴 생머리의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 포즈를 잡고 있다.
순간 화보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상대가 모델이라는 걸 깨닫고 진짜 화보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사진을 휙휙 넘겨봤다.
"걔는 서혜경이라고, 비키니 쪽으로 많이 나가는 애인데, 성격도 괜찮고 얼굴도 예쁜 편이에요."
임예진의 설명대로 나오는 사진들은 전부 바닷가나 야외, 실내 수영장 같은 밝은 곳에서 비키니를 입고 있는 것들뿐이다.
조금 설명이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슴 쪽이 못해도 E컵에서 F컵은 되는, 유혜연급의 사이즈에 날씬하게 빠진 훌륭한 비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일 첫 번째 사진은 보정 없이 찍은 셀카에요."
"그래?"
임예진의 추가 설명에 곧바로 제일 첫 번째 사진을 찾아 확대해보자 모텔처럼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 비키니만 걸치고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보정 없는 거 맞아?"
"그렇게 하라고 최면까지 걸어서 찍게 한 거니까 그럴 거예요. 그래도 현직 모델인데, 조명 정도는 신경 써서 받긴 했죠."
단순히 조명빨만 받았다기엔 사진이 너무 잘 나오긴 했지만, 얼굴이 예쁘고 피부만 깨끗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납득했다.
"그리고, 그 폴더 말고 다른 폴더도 두 개 더 있죠? 제가 고른 애들 따로 넣어놓은 거니까 그쪽도 한번 확인해보세요."
시간이 오래 걸린 만큼 확실히 준비가 잘 되어 있다.
임예진의 꼼꼼한 준비에 내심 감탄하며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어주고는 '최설아' 폴더에 들어가 첫 번째 사진을 확대했다.
이쪽은 그냥 조명이라기 보다는 약간 밝은 자연광을 받으면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상반신에 딱 달라붙는 얇은 반팔 티셔츠에 레깅스 바지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머리는 시원스럽게 포니테일로 정리해서 목선이 시원하게 드러났고, 레깅스와 티셔츠 사이의 작은 틈새 사이로 매끈하게 뻗은 11자 복근도 살짝 드러나 있었다.
가슴은.. D컵 정도 될 것 같았다.
"최설아. 얘는?"
"걔는 주로 스포츠 웨어 쪽으로 찍긴 하는데, 비율이 워낙 좋아서 평범하게 다른 쪽 사진들도 많이 찍어요."
임예진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진을 휙휙 넘겨보니 확실히 운동복이나 몸에 착 달라붙어 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활동성 좋아 보이는 옷을 입은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타입은 임예진을 제외하면 주변에 잘 없는 타입이었기에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걸 느끼면서 마지막 '이은설' 폴더로 들어가 첫 번째 사진을 확대했다.
"이은설. 얘는.."
임예진이 자주 입을 법한 약간 어두운 붉은 색의 속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속옷이 조금 더 화려하기도 하고 아예 가터벨트까지 입어 섹시하면서도 화려하다.
인상은 도도하다기보다는 조금 깔아본다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연기인지 원래 인상인지는 몰라도 성격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이었다.
살짝 말을 늘이면서 사진을 휙휙 넘겨보니, 입고 있는 것들이 죄다 화려한 속옷들이었기에 어느 쪽을 주로 하는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속옷 모델인가?"
"맞아요. 그쪽이 페이도 조금 센 편이라 일감도 그렇게 없지는 않고, 셋 중에는 제일 괜찮게 벌고 있어요."
"이 셋이 끝이야?"
"일단은요. 그래도 제일 예쁜 애들로만 고른 거거든요. 더 필요하시면 몇 명 더 구해볼게요."
"지금은 됐어. 셋 다 마음에 드네. 얘들 중에 하나 골라서 만나면 돼?"
"네. 얘기는 이미 해뒀으니까, 내일이나 모레 중에는 바로 약속 잡을 수 있을 거예요."
"흐음."
유서연의 에스테틱과는 확실히 다르면서도 마음에 드는 선물이다.
예쁜 얼굴 정도야 이제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거고, 몸매도 이젠 어느 정도 당연하게 급이 있어야 마음에 든다.
그렇다고 해도 또 아무나 만나는 건 내키지 않았는데, 모델이라고 하니 확실히 일반인이랑은 다른 느낌이라 조금 설레기도 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유명한 상대는 아니지만 모델 셋을 원하는 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니.
에스테틱 때도 그렇긴 했지만 삶의 질.. 이라기보다는 급수가 확 높아진 기분이었다.
'누구로 하지?'
가슴만 본다면 단연 서혜경이 1등이긴 했지만 당장 오늘 새벽까지 유서연과 유혜연의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다 온 탓인지 그닥 끌리는 느낌이 없다.
그러니까 일단 서혜경은 제외하고. 남은 건 최설아와 이은설.
둘 다 가슴은 비슷한 수준이고, 건강미냐 섹시미냐, 확실히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일단.. 최설아. 이쪽 먼저 만나보자."
"그럼 오늘 안에 약속 잡아둘게요!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같이 밥 먹으면서 얘기부터 해보게 그냥 저녁 약속으로 잡아줘. 모델이라고 하니까 신기하네."
"저도 모델인데요?"
"..그렇네."
아무래도 매일 보고 있다 보니 체감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너도 찍은 거 있으면 보여줘."
"헤헤.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혹시라도 임예진이 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당히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래서, 자세한 설정이 어떻게 되는 건데?"
아무래도 일반적인 관계가 아닌 만큼 걸어둔 최면에 따라서는 이것저것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으니 미리 어떻게 최면을 걸어뒀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음.. 그냥 평범하게 해뒀어요. 금수저 집안 아들이고, 부모님이 사업을 이것저것 하는데 이쪽 업계에도 인맥이 좀 있는 편이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설정이 아니었지만 스폰이라는 상황 자체에는 어울리는 설정이다.
"성격은 부자답지 않게 소탈하고 무난한 편이고, 연애가 귀찮고 깔끔한 관계를 원해서 스폰으로 여자를 만난다는 설정이니까 그냥 평소처럼 하셔도 괜찮을 거예요."
확실히 편하게 즐기기엔 무난하고 나쁘지 않은 설정이다.
이것저것 다른 설정을 넣어서 연기하는 것도 재미가 있긴 했지만, 그런 걸 하고 싶을 때는 내가 하나하나 직접 판을 짜고 직접 최면을 걸어서 상황을 만드는 쪽이 몰입도 되고 즐기기에도 좋았다.
'서연이한테 가게 예약도 해 놓으라고 해야겠네.'
아무래도 금수저 집안 아들이라는 설정이니까. 나름대로 비싼 곳에서 만나야 리얼리티가 살지 않겠는가.
처음 만나는 여자랑 같이 식사도 하고 모텔도 들어가서 밤을 보내고. 이제는 그런 행위가 긴장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