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6화 > 내가 스폰서라고? (2)
결국은 새벽부터 시작해 해가 뜰 때까지 셋이서 뒹굴다가, 지쳐 잠든 유혜연을 눕혀놓고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와도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아 임예진은 어딜 나갔나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욕실 안쪽에서 타박타박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물기도 닦지 않고 수건만 겨우 걸치고 있는 임예진이 나와 곧바로 인사를 건네왔다.
"그냥 씻고 있지 뭐 하러 나왔어?"
"에헤헤. 그래도 주인님 오셨는데 인사는 해야죠. 어차피 다 씻고 나오려던 참이기도 했고요."
"기특하긴."
제대로 물기도 닦지 못하고 나왔으면서도 헤실헤실 웃는 임예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특한 마음이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가, 머리도 젖어있는 걸 보고 뺨에 살짝 입만 맞춰줬다.
"잘 쉬다 오셨어요?"
"쉬기는 밤새 기 빨리다 온 거지."
"그래도 언니 닮아서 귀엽고 예쁘잖아요."
유혜연과 임예진이 만날 일이야 당연히 없겠지만, 아무래도 유서연에게 따로 사진을 받은 모양인지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거야 뭐, 당연한 거고."
애초에 예쁘지 않았으면 상대 쪽에서 반했다고 하더라도 만날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오히려 귀찮게 굴지 않도록 최면까지 써서라도 떼놓았으리라.
"그래도 노예 삼을 정도는 아닌가 보네요?"
"지금은 굳이? 그냥 생각날 때마다 부르고 찾아가는 정도가 딱 좋지."
대놓고 말하기에는 너무 쓰레기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인성에 관한 부분이야 진작에 포기해버리기도 했고, 전부터 이런 관계가 편하다는 얘기를 몇 번씩 했기 때문에 새삼 숨길 만한 생각도 아니었다.
실제로 임예진도 유혜연이 불쌍하다던가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모양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고는, 곧바로 다른 얘기로 넘어가 버렸다.
"으음.. 아, 맞다. 혹시 내일이나 모레쯤에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 오전만 아니면 한가하지."
내가 학원만 잠깐 다니고 빈둥거리는 백수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음에도 굳이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우습긴 했지만 일단은 대답해줬다.
"저도 언니 피부관리샵처럼 뭐 하나 준비한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었지. 이제 준비 끝났어?"
기간으로 치면 거의 네 달 가까이 걸렸나.
이것저것 중간보고도 해주는 유서연과는 달리 철저하게 비밀로 했던 탓에 소식을 들을 일도 없어 반쯤 잊고 있던 얘기였다.
"네! 주인님만 좋으시면 내일이나 모레 바로 만나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상대가 누군데?"
"잠깐, 옷 좀 갈아입고 와서 설명해드릴게요.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요."
"갈아입고 와.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금방 올게요!"
자기도 드디어 유서연처럼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신이 난 건지, 임예진은 확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서연이 너는? 이대로 출근할 거야?"
"조금만 자고 점심때 나가러고요. 매니저는.. 아직 안 정하셨죠?"
"급해?"
에스테틱에서 일하는 관리사들을 경쟁시키기 위한 첫 번째 미끼가 에스테틱의 관리자 자리다.
솔직히 말하면 두 번째 지점을 차리는 건 실제로 할지 말지도 정하지 않았고, 한다고 해도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인 만큼 당장 차려놓은 가게 자체를 미끼로 걸어놓은 상태였다.
직원들은 결정권을 가진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그중 제일 마음에 든 상대한테 가게의 최고 관리자 자리를 맡긴다.
직원들이 조금이라도 나한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가 있어서 꾸준히 다니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누가 1등인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급하진 않아요. 어차피 가게에는 제가 꾸준히 나가봐야 해서, 그냥 잡일 몇 개 더는 수준이니까요."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해줘. 일단 천천히 고르고 싶거든."
에스테틱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기본적으로 다들 예쁘고 유능하다. 능력에 관한 부분이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고, 아마 매니저가 되는 직원은 나와 더 친밀한 관계가 될 테니 막 고르고 싶지는 않았다.
'성하연이나 하연수 둘 중 하나일 텐데.'
일단 성하연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필요한 말만 하는 타입이라 같이 있으면서도 잡생각 없이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거기에 처음에는 아부나 애교 같은 게 아닌 순수한 능력만으로 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본인도 섹스의 쾌감에 빠져들어서 무의식적으로 더 끈적하게 달라붙고 응석 부리는 것 같은 행동을 하다가 깜짝 놀라며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귀엽다.
반대로 하연수는 서글서글하고 웃음이 많으면서 가장 노골적으로 애교를 부리는 타입이라 대놓고 '서비스'를 받는다는 느낌이 좋다.
이쪽 역시, 처음에는 애교와 몸으로 날 완전히 녹이려고 했으면서 조금씩 섹스에 빠져들어서 서비스 정신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달라붙었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고.
다른 직원들도 예쁜 건 당연하고, 다들 나름대로 개성이 있긴 했지만, 이 둘에 비하면 그냥 예쁜 여자를 상대로 서비스받으면서 한 발 빼고 온다는 느낌이라 확 끌리지는 않았다.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골라주세요. 아예 안 고르셔도 상관없고요. 어차피 다 주인님이 쓰시라고 데려온 사람들이니까요."
"고맙긴 한데, 너무 담담하게 말하니까 조금 그렇네."
쓰레기 같기로는 나도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상대에게 살짝 미안한 기분 정도는 들 때가 있는데.
유서연은 항상 그런 기색조차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말을 해버려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임예진의 '서연 언니는 가끔 소름 끼칠 때가 있다니까요.' 같은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사실인데요 뭘. 그럼 전 자러 갈 건데.. 이따 저 나갈 때 같이 나가서 점심 드시지 않을래요?"
"그러자. 아니, 아예 가는 김에 나도 가서 놀다 오면 되겠네."
"그러셔도 좋고요. 그럼 이따 한 시쯤에 나가요."
"그래. 푹 쉬어."
유서연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나도 내 방으로 들어와 생각 없이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아무래도 새벽에 제대로 못 잤으니 자려면 얼마든지 잘 수 있겠지만 반대로 체력은 여전히 쌩쌩해서 졸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기를 잠시, 거실에서 작게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솔직히 말하면 숨길 것도 없으니 아무 때나 열고 들어와도 상관없는데. 막상 또 그렇게 하라고 하기에는 조금 찜찜해서 아직도 매번 이렇게 노크를 받고 허락을 해준 뒤에야 방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놓고 있었다.
오늘도 밖에 일정이 있는 모양인지, 외출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임예진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그대로 베개를 세워 그 위로 등을 기대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이렇게 오래 걸렸어?"
"모델이에요."
"모델?"
나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로 올라와 앉은 임예진에게 묻자 짧게 모델이라는 직업만 돌아왔다.
"그게.. 일단 저도 뭐라도 일자리를 갖고 싶긴 했는데,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너무 바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무슨 느낌인지 알겠네."
당장 나도 생활에 부족함은 없지만 너무 빈둥거리면서 지내다 보니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굳이 힘들게 일하기는 또 싫었고. 힘들다와 바쁘다, 서로 말만 다르지 결국은 똑같은 의미였으니 완전히 같은 생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가끔 주인님이 저보고 모델 같다고 칭찬해주셨잖아요.. 그래서.. 모델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었는데.."
이 부분은 뭔가 말하기 부끄러운 모양인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모델 같다는 칭찬을 들어서 모델이 되기로 했다고, 칭찬해준 장본인한테 말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부끄러울 만도 했다.
"어울리는데 뭘. 그래서?"
"일단.. 제가 뭘 아는 게 없으니까,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규모가 꽤 큰 모델 학원이 있다길래 거기 등록해서 이것저것 배우고 있었거든요."
요 몇 달 동안 바쁘게 돌아다니던 게 학원에 다니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뭘 하나 궁금한 것도 꽤 있었는데, 전문적으로 모델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니 솔직히 좀 놀랐다.
"하여튼, 거기 다니면서 알게 된 게. 모델이라고 해도 정말 유명한 사람들이나 제대로 소속사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돈을 엄청 못 벌더라고요?"
"그래?"
"네. 그냥 못 버는 수준이 아니라 다른 아르바이트가 주업이고 모델 일이 부업인 수준으로요. 소속사가 있으면 꾸준히 일거리가 들어오니까 괜찮은데, 신입들은 기껏해야 작은 쇼핑몰 피팅 모델 알바 같은 걸로 일당만 챙기는 수준이니까요. 패션쇼 같은 것도 돈은 잘 안 주는 모양이고."
나야 이런 쪽에 아예 관심이 없다 보니 처음 듣는 얘기긴 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래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얘기다.
임예진도 내가 대꾸는 해주고 있지만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곧바로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아무튼, 학원이 꽤 규모가 크고 유명한 편이라 괜찮은 애들한테는 일자리도 주고, 가끔은 아예 소속사에 꽂아 주기도 하는데 그런 것도 결국은 손에 꼽는 수준이라 다들 돈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노린 거죠."
"어떻게 노렸는데?"
"모델 하고 싶다는 애들이 언제 일거리가 들어올지 모르는데 제대로 된 직장이 있겠어요? 집에서 생활비라도 받는 애들은 다행이고, 대부분은 야간 알바라도 하면서 사는 거죠. 그중에는 아예 오피에서 뛰거나 스폰을 받는 애들도 있고요."
"스폰?"
오피는 나도 가보기도 했고, 그러다가 임예진을 만난 거였으니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스폰이라는 말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개인 단위로 지원을 해주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돈을 주는 사람이 스폰서고, 그렇게 지원을 받는 걸 스폰을 받는다고 말해요. 뭐, 달에 얼마씩 돈 받으면서 사귀는 사이처럼 지내는 거죠."
"아아. 대충 알겠네."
임예진의 말을 조금 더 쉽게, 노골적으로 풀어서 말하면 오피처럼 몸을 파는건 똑같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파는 게 아니라 돈 많은 사람 하나를 골라서 그 사람 하나에게만 제대로 서비스를 해준다는 뜻일 것이다.
"의외로 그렇게 편하게 돈 벌면서 모델 쪽에 집중하는 애들이 꽤 많은 편인데, 개중에는 그렇게까진 하기 싫다고 힘들게 지내는 애들도 있단 말이죠?"
"그렇겠지?"
하는 여자들은 별다른 거부감도 없이 쉽게 해버리는 것 같지만 사실, 몸을 판다는 게 그렇게 좋은 일도 아니고, 쉽게 결정할 만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깔끔하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임예진이 기다렸다는 듯 밝게 웃으며 결론을 내놨다.
"그러니까, 주인님이 그런 애들한테 스폰서가 되는 거예요."
"엥..?"
얘기가 잘 이어지는 것 같더니, 뜬금없이 이상한 결론이 튀어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