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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320화 (320/775)

< 320화 > 오빠 성욕 푸는 걸 도와달라고?? (1)

"왔어?"

"..혜연이는?"

"같이 기다리고 있었지. 들어와."

그동안 유서연에게 수없이 시비를 걸면서도 어떻게 될까 무섭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문이 열리자마자 자신부터 찾는 이 상황이 너무 떨리고 무서웠다.

그렇다고 해서 유서연이 뭔가 크게 사고를 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어떤 형태로든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으니까.

또각, 하고 구둣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을 벗었는지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앉아서 유서연을 맞이하는 것도 너무 불편하다 싶어서 몸을 일으켜 서며 유혜연이 시야에 들어오는 걸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서연이 아주 짧은 현관 복도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 언니.."

"앉아."

"..응."

뭐라고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유서연의 싸늘한 목소리에 일으켰던 몸을 다시 내려 침대맡에 걸치고는 무릎을 다소곳하게 모아 앉았다.

"민석 씨. 의자 좀 가지고 와봐요."

"알았어."

이게 과연 술에 취해서 곧이곧대로 말을 듣는 건지, 원래 이런 건지 모를 정도로 유서연의 말에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고 와 유혜연의 맞은편에 의자를 내려놨고, 유서연은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민석 씨도 옆에 앉아요."

"한 번에 말하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다시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 유서연의 옆에 앉는 최민석.

이제 시작인 걸까. 앞으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상황에 긴장하고 있는데, 바스락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유서연의 손에 까만 봉투 하나가 들려 있는 게 이제서야 보였다.

"일단.. 민석 씨."

"응."

"민석 씨는 됐으니까, 이것부터 다 마셔요."

그렇게 말하면서 봉투에 손을 넣어 꺼낸 것들은 유혜연도 익히 아는 것들. 원래는 몰랐지만 최민석을 취하게 하고, 자신은 취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알아보고 사 먹었던 숙취 해소제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네 개나 되는 것들을 하나씩 최민석에게 넘겨줬다.

"숙취 해소제? 취하지도 않았는데.."

"민석 씨."

이대로 내버려 둬도 술에 취했으니 투덜대면서도 알아서 마실 텐데. 유서연은 그마저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는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안 취했어도, 일단 오늘 술을 마신 건 맞죠?"

"..마셨지."

"얼마나 마셨어요?"

"..한 병 반쯤?"

"하.. 많이도 마셨네."

최민석의 태연스러운 대답에 유서연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관자놀이를 짚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가, 이내 눈을 뜨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취하진 않았어도 몸에 한 병 반 분만큼 알콜이 들어갔다는 건데. 숙취해소제를 마셔서 나쁠 게 있어요?"

"..없지?"

"그렇죠? 거기에, 제가 지금 엄청 짜증이.. 아니, 화가 많이 난 상태인데. 민석 씨가 이걸 다 마시면 제 기분이 아주 조금은 풀릴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연히 마셔야지. 그런데 왜 화가 났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굳이 명령이 아니라도 최민석이 숙취해소제를 마시게 할 만큼 깔끔한 설명에 최민석은 그대로 병뚜껑 하나를 따며 묻고는 내용물을 꿀꺽꿀꺽 목으로 넘겼다.

"모르겠어요. 얼마나 안 좋은 일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윽."

유서연의 싸늘한 시선이 유혜연을 살짝 흘겨본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언니가, 유서연이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 없는, 그래서 더 무서운 눈빛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나중에라도 말해줘."

"..알았어요."

핀트가 안 맞는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도 두 병, 세 병째 각기 다른 숙취해소제를 마셔나가는 최민석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점점 불안한 기분이 커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네 병째를 다 마시고 나자.

"잘했어요. 이걸로 입가심 좀 해요."

"고마워."

이번에는 봉투 안에서 유리병에 담긴 노란 꿀물이 나와 최민석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는 반말도 잘만 하더니. 지금은 왜 존댓말일까. 유서연은 너무 화가 나면 존댓말을 쓰는 타입인가? 저번에 둘이 소파에서 할 때도 존댓말이었는데. 기준이 뭐지?

순간 멍하니 그런 생각이 떠올라 멍하니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그게 현실도피라는 걸 깨닫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눈을 똑바로 떴다.

최민석은 이미 유서연에게 받은 꿀물까지 전부 마시고 병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이제 기분 좀 풀렸어?"

"..이대로 민석 씨가 욕실에 들어가서 찬물로 꼼꼼하게 샤워도 하고, 머리까지 다 감고 나오면 확실하게 풀릴 것 같은데. 해줄 수 있어요?"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럼, 가서 샤워하면서 이것까지 다 마시고 나와요."

"생수? 알았어."

이번에는 500미리짜리 생수 두 병을 건네고는 그대로 최민석을 욕실로 보내버렸다.

최민석이 옷을 벗고 패트병 두 개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고. 아주 짧은 침묵이 가차없이 끊어지며 유서연의 시선이 똑바로 유혜연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단. 변명할 거 있어? 있으면 지금 해."

"그게.."

없다.

언니의 남친을. 그것도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남자를 술에 취하게 만들어 모텔에서 몸을 섞었는데 거기다 대고 무슨 변명을 한단 말인가.

유혜연이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다시 한번 유서연의 입이 열렸다.

"그래. 없단 말이지?"

"..응."

"간만에 만나서 조금은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내가 싫었다는 거네."

"어, 어..?"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는 유서연의 말에, 순간 이건 아닌데? 하면서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한테 직접적으로 잘못한 건 없어도, 나 때문에 피해 본 건 맞으니까 지금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지냈었는데. 이번 건 그냥 못 넘어가겠다."

"자, 잠깐만..! 그게 아니라..!"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어? 방금 내가 말하라고 할 땐 없다면서?"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까 변명할 말이 없다는 거였고.. 이유는 언니가 말한 거랑 다른 거라서.."

"뭔데? 말해봐."

분명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 상황일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이유를 하나하나 다 들을 여유가 있는 걸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유서연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어 반사적으로 꿀꺽 침을 삼켜버렸다.

"그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아, 알았어. 그러니까.."

유서연은 뜸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다른 사람이어도 부끄러워서 밝히는 걸 망설일 텐데. 그 상대가 언니의 남자 친구라면 더더욱 말하기 힘든 게 당연했다.

"민석 오빠 말이야.."

"......"

유서연은 가벼운 맞장구조차 쳐주지 않고 유혜연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시선에 다시 한번 어깨를 움츠렸다가, 결국은 매라도 빨리 맞는 게 낫겠다 싶어 남은 말을 전부 입 밖으로 내뱉었다.

"처음 보자마자 반했는데.. 언니 남자친구라고 하니까 너무 화가 나서.. 언니랑 헤어지고 나랑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

도대체 왜?

이유 정도는 적당히 각색해서 말해도 괜찮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속에 있는 얘기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일단 오빠랑 친해지면서 어떻게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빠 술버릇을 알게 돼서.."

"그래서, 이렇게 나 몰래 모텔에서 뒹굴었다고? 그냥 임신이라도 해서 깽판이라도 치려고 했어?"

"그, 그건 아니야..! 그, 그냥..! 나도 오빠랑 하고 싶어서.. 나중에 오빠랑 사귀게 됐을 때 만족 못 시켜주면 안 되니까.. 연습이라도 해보려고.."

처음에는 유서연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박하려고 했지만,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다 보니 어느새 다시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신이 나갔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이걸 왜 진작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민석 씨를 처음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고, 나한테 민석 씨를 뺏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마침 민석 씨의 술버릇을 알게 돼서 하고 싶은 대로 해댔다는 거네?"

"으, 으응."

"..그걸 믿으라고?"

"지, 진짜야."

스스로가 말해놓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로 이게 사실인 걸 어쩌란 말인가.

물론 중간에 최민석과 유서연의 섹스를 몰래 훔쳐봤다는 계기가 있긴 했지만, 그걸 말했다가는 유서연이 그런 장면을 보여줘서 그랬다고 탓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아무튼.. 결국 뺏을 마음은 먹고 있었다는 거네."

"..응."

결국은 전부 다 들켜버렸다.

이젠 어떻게 되는 걸까. 일단 따귀부터 맞고 시작하나? 아니면 이대로 집까지 끌려가서 부모님한테 다 말해버리고, 미친년 취급을 받게 되는 걸까?

그런 예상과는 달리, 유서연은 여전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서늘한 눈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번이 몇 번째야?"

"..여섯 번째."

"거짓말하지 말고. 둘이 같이 밥 먹고 술 마신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지, 진짜야. 그전까지는 그냥 취해도 장난만 치고 돌려보냈었어."

"장난?"

"그.. 언니가 했던 것처럼.. 끌어안거나 쓰다듬거나.. 그런 거.."

"그래..?"

도대체 저 서늘한 눈빛과 침묵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차라리 난리를 피울 거면 빨리 피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한 마음이 커지고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 나한테는 더럽다느니 걸레라느니 별소리를 다 해놓고선.."

"......"

유서연이 한탄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가슴에 비수가 푹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혼자만 막 나가던 유서연과는 달리, 자신은 아예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행동했으니 이제는 자신이 유서연보다 더한 쓰레기라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였다.

"일단,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드디어 뭔가 결론이 나오는 걸까.

여전히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갑게 가라앉은 유서연의 질문에 움찔하며 대답했다.

"성질 같아선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데, 지금 상황에서 난리가 나서 좋을 게 없단 말이지."

"응..?"

"지금도 아버지한테 민석 씨랑 사귀는 걸 허락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너랑까지 일이 터졌다고 해봐. 누구 잘못이든 간에 아버지가 그걸 받아들이시겠어? 당연히 헤어지라고 하시겠지."

그것도 그렇다.

유서연이 문제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게 누구 잘못인가를 떠나서. 그냥 큰딸의 남자 친구가 작은딸과도 몸을 섞었다고 하면, 굳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 그 어느 부모라도 그 남자를 사위로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 진짜로. 성질대로 하고 싶은데. 민석 씨랑 결혼도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딱 이번 까지만 묻고 가자."

"진짜..?"

"짜증 나니까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딱 이번 까지만 참아주는 거야."

정말 다행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일이 부모님께 알려지는 일을 가장 무서워했던 유혜연으로서는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풀릴 정도로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이 하나 해결됐다고 생각하니, 곧바로 다시 최민석에 대한 문제로 생각이 뻗쳤다.

'그럼 이제 오빠랑은..'

끝나는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바람, 불륜이나 다름없는 일을 들킨 상황이었으니 다시 만나는 것조차 못 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에 이어 굉장히 서글픈 기분이 올라오려는 순간.

"혜연이 너. 불륜 예방 부서라고 알아?"

"응..?"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단어가 유서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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