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제가 언니보다 잘 할 수 있다고요! (2)
에스테틱에서 깔끔하게 샤워까지 마치고, 곧장 차를 몰아 유혜연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전보다 조금 늦게 안에서 인기척이 다가왔고, 이내 누구냐는 질문조차 없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실례할게."
문을 열자마자 느껴졌었지만, 현관 안으로 들어와 보니 약간 매콤한 냄새가 조금 더 진하게 풍겨왔다.
"냄새 좋네? 뭐 만드는 거야?"
"파스타요. 토마토랑 해산물이랑 이것저것 넣어서 조금 맵게 하고 있어요."
"맛있겠네. 기대할게."
"네!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당장 눈에 보이는 유혜연의 태도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하고 밝아 보여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긴 한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본인은 그게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걸 모르는 거겠지.
평소에 가볍게 같이 식사만 할 때도 긴장하고 굳어있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단둘이 집에 있으면서 저렇게 태연한 태도를 보인다?
저 훌륭한 연기 덕분에 오늘은 정말 제대로 칼을 갈았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다.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따라 들어와 주변을 가볍게 살폈다.
유혜연은 이미 한발 앞서 주방으로 돌아가 뒤돌아서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 외에는 저번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분위기였다.
내가 왔을 때는 정말 요리가 거의 다 끝난 시점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에 그릇을 들고나온 유혜연이 그릇을 테이블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자, 나왔어요! 금방 다른 것들도 가져올게요!"
"..진짜 맛있겠는데?"
그냥 상투적으로 하는 칭찬이 아니라, 유혜연이 가져온 파스타는 가게에서 찍은 사진처럼 새하얀 그릇 위로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도는 소스와 면, 조개나 새우 같은 해산물이 예쁘게 담겨 있어 겉모습부터 상당히 훌륭해 보였다.
냄새 역시 살짝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향이 느껴지는 게 굉장히 식욕을 돋구는 느낌이라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파스타만 먹으면 심심할 것 같아서, 콘치즈랑 감자튀김도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맛은 별로 기대 안 했었는데. 사과해야겠는데?"
"히히. 칭찬은 먹어보고 해주세요."
접시 위에서 지글지글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콘치즈도 그렇고, 이건 따로 사 온 거겠지만 바삭하게 튀겨진 감자튀김도 파스타랑 어울리고 맛있어 보였다.
나름대로 진심을 담은 칭찬에도 유혜연은 여유롭게 웃어넘기면서 다시 한번 뒤로 돌아 주방으로 돌아갔고, 이내 어디서 본 듯한 술병과 와인 잔을 가지고 돌아와 맞은 편에 앉았다.
"술이야?"
"헤헤. 저번에 중국집에서 먹었던 술이에요. 그때도 맛있었는데, 매운 거랑 먹으면 더 어울린다길래 사 봤어요."
"그래..?"
고량주라. 도수는 유혜연이 적당히 골랐겠지만 날 취하게 하는 게 목적인 만큼 약한 걸로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앞치마 입은 것도 어울리네. 귀여워."
"읏..!? 그, 그러네요! 앞치마도 안 벗고 먹을 뻔했네..! 아하하..!"
"그게 아니라, 앞치마 입은 것도 어울린다고."
"으읏..! 그.. 그래요..?"
앞치마 차림을 칭찬받는 건 예상에 없었던 걸까? 태연하게 유지되고 있던 표정에 금이 가며 얼굴이 살짝 발갛게 달아오르며 표정이 경직되는 게 실시간으로 보여서 조금 재미있었다.
얇은 긴 팔 티셔츠 위로 걸쳐진 연한 분홍색 앞치마는 허리끈을 꽉 졸라맨 덕분에 가슴 앞부분이 훌륭하게 부각 된 상태라 실제로도 보기 좋았다.
보고만 있어도 눈이 즐거운 모습이라 이대로 입은 채로 먹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유혜연이 그걸 허겁지겁 벗어서 내려놓은 탓에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후우.."
앞치마를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내려놓은 유혜연은 어떻게든 침착을 되찾으려는 듯 살짝 눈을 감고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떴다.
"..그럼 먹어요!"
행동 하나하나가 우스우리만치 잘 보였던 그 유혜연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정을 되찾는 게 빠르다.
발갛게 달아올랐던 뺨도 금세 진정시키고, 표정도 다시 자연스럽게 되돌아온 모습에 내심 감탄을 흘리며 포크를 들었다.
"잘 먹을게."
"맛있게 드세요!"
유혜연의 속내야 어쨌든, 지금은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니 생각을 비우고 파스타를 말아 입으로 옮겨 넣었다.
"..오."
맛있다.
차가 생긴 뒤로는 나름대로 혼자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먹어보기도 했는데, 유혜연이 만들어준 파스타는 어지간한 가게에 있는 것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맛있었다.
"..맛있는데?"
"헤헤. 정말요?"
"응. 진짜 맛있어. 이대로 장사해도 괜찮겠다. 요리도 잘할 줄은 몰랐는데. 요리도 배웠어?"
"그, 그냥 혼자 취미로 가끔 하는 정도에요."
정말 취미가 요리였다면 냉장고가 그렇게 텅텅 비어있을 리는 없었을 텐데.
그렇다고 해서 하루 이틀 사이에 요리 실력이 좋아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유혜연이 요리를 잘하는 건 사실일 것이다.
아까 주방을 힐끔 봤을 때도 직접 면도 삶고 새우 껍질을 벗겨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였으니 어디서 사 온 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서연 씨는 직접 요리하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 그래서 당연히 혜연이도 그럴 줄 알았지."
"언니는 뭐.. 만드는 건 귀찮아하고, 먹는 쪽만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기분 좋은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한동안 하지 않았던 은근히 유서연을 까 내리는 듯한 말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자, 우리 짠해요. 짠."
이제 막 한 입 먹었을 뿐인데. 기분이 좋아진 유혜연은 그대로 와인잔에 술을 따라 넣고는 그대로 건네며 자기도 잔을 내밀었다.
중국 술에 와인잔이라는 것도 조금 안 어울렸지만 그럼 파스타는 어울리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분위기는 났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래, 그래. 그래도 적당히 마셔야 한다?"
"그럴게요."
지켜지지 않을 게 뻔한 대답과 함께 잔이 가볍게 부딪히며 맑은소리가 울렸다.
'..전에 먹었던 것보다 센 것 같은데?'
목으로 넘어가면서 화끈하고 올라오는 느낌이 심상치 않다.
나야 상관없지만 이러면 유혜연은 버티기 힘들 텐데.
설마 자기 주량도 모르고 이런 술을 고를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을 것 같고, 아예 취기에 몸을 맡기고 일을 벌일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혜연을 힐끔 쳐다보니 처음부터 자기 잔에는 술을 적게 따라놓고, 아주 찔끔만 마시면서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나한테만 많이 먹일 생각인가 보네.'
그런 생각이라면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다 마시기에는 맛이 없으니, 적당히 한 번에 반 정도만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음. 확실히 맛있네."
"그렇죠?"
일단, 말로 유혜연을 안심시켜 놓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며 잔을 비웠다.
유혜연은 내가 마실 때마다 자기도 찔끔찔끔 잔을 비우며 마시는 척 어울렸고, 내 잔이 빌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술을 채워 넣고는 자기 잔도 티만 날 정도로 조금씩만 채우며 나한테 술을 먹여 나갔다.
'입장이 반대로 됐네.'
여자 친구를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술을 먹이는 얘기는 들어봤는데, 여자 쪽에서 어떻게든 남자를 취하게 하려는 경우는 못 들어봤기에 나름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냥 밥만 먹고 싶은데 말이지.'
유혜연이 해준 요리가 생각보다 너무 입에 맞아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쉽게도 식욕보다는 성욕이 앞서는 상황이었기에 유혜연이 따라주는 대로 계속해서 잔을 비워나갔다.
그렇게, 요리가 맛있다는 칭찬이나 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해주겠다는 약속 같은 사소한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식사가 끝을 향해 나아갔고, 어느새 유혜연이 가져온 술도 완전히 바닥을 보였다.
"후우. 맛있게 잘 먹었네. 고마워."
"헤헤. 아니에요. 그런데, 오빠."
"응?"
유혜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눈빛이 조심스럽게 변했다.
"오빠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주실 수 있어요?"
"나한테? 뭔데?"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돼요?"
"알았어, 그럴게."
드디어 뭔가 시작하려는 모양인 것 같아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고 곧장 알겠다고 대답하자 유혜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언니 성격, 솔직히 어떻게 생각해요? 처음에 오빠도 엄청 괴롭혔다면서요."
"음.. 확실히 서연 씨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긴 하지. 그래도 성격이 나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니까. 아마 뭔가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았나 봐. 나랑 사귄 뒤로는 잘 웃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잘 지내더라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여전히 유서연의 내숭에 넘어가 있다는 티도 확실하게 냈다.
"..그게 다 내숭이면요?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성격 다 죽이면서 사는 거면요?"
"그럼.. 조금 섭섭할 것 같네. 자기 성격을 다 억누르면서 살 정도로 날 좋아해 준다는 건데, 내 앞에서 솔직하게 행동할 정도로 날 못 믿는다는 거잖아."
"하.."
최대한 좋은 사람인 것처럼, 최대한 유서연을 좋아하는 것처럼 대답하자 유혜연의 표정이 답답하다는 듯 구겨졌다.
"그럼, 언니가 예전에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면서 원나잇.. 같은 것도 하고 지냈으면요? 아예 정신도 못 차리고 마약 같은 것도 했으면요?"
"..질문이 조금.."
"일단 대답해주세요. 솔직하게."
아무리 내가 취해서 시키는 대로 다 따르고, 기억도 못 한다지만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글쎄..? 예전 일이야 어쩔 수 없으니까, 지금만 안 그러면 될 것 같아."
"......"
유혜연이 그나마 믿고 있었던 무기인 유서연의 과거조차 내가 별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답답한 표정이 우울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이젠 몰라. 나도 마음대로 할 거예요."
당장 유서연과 날 헤어지게 할 방법은 없다.
유혜연도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지만, 역시나 포기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오빠. 잠깐 방에 가서 얘기 좀 해요."
"방에서?"
"네. 빨리요."
"알았어."
드디어, 유혜연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 정도로 멘탈이 깨졌으니 유혜연도 적당히 하지는 않으리라.
"여기 앉아 봐요."
"앉았는데?"
유혜연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서, 시키는 대로 침대에 걸터앉자 유혜연의 숨이 조금씩 가쁘게 올라오는 게 보였다.
"제가 여태 여중, 여고만 나오고 남자친구.. 아니, 남자랑 친하게 지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그래?"
"네. 그래서.. 저도 이제 대학에서는 남자도 좀 만나고 싶은데, 남자가 너무 거북해서요. 오빠가 조금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줘야지. 어떻게 도와줄까?"
이제는 정말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완벽하게 의사를 드러냈다..
유혜연 역시 이제는 고지가 코앞이라는 걸 느꼈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키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일단.. 가까이 있는 것부터 너무 거북해서 그런데, 오빠 몸으로 익숙해져도 괜찮죠?"
"괜찮기는 한데, 어떻게 하려고? 옆에 앉아 있으면 돼?"
"아니에요. 일단 몸부터 익숙해져야 하니까.. 제대로 관찰부터 해보려고요. 옷 좀 벗어서 보여주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은 내가 최면 걸 때 구색이라도 맞추려고 쓰는 방법인데. 이렇게 억지스러운 핑계를 쓰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끝까지 갈 마음이 든 것 같다.
유혜연의 요구에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망설이지 않고 옷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