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이래도 안 먹어? (2)
유혜연의 집 안으로 들어온 유서연은 일단 확인이라도 해본다는 것처럼 가볍게 주위를 둘러봤다.
"흐음.. 깨끗하게 하고 지내네?"
"..일단 뭐가 있지도 않으니까."
집이 지지분하려면 우선 지저분하게 할 뭐라도 있어야 하는데, 유혜연의 집은 정말 필요한 것만 딱딱 가져다 놓은 덕분에 아주 깔끔했다.
거실에는 식탁에 의자, 소파에 테이블만 달랑 있었고, 그 흔한 TV조차 없다.
살짝 보이는 주방에 있는 싱크대도 새것처럼 깨끗했고, 아마 냉장고에도 별로 들은 게 없을 것 같았다.
'혼자 살면 외식이 편하긴 하지.'
그래도 뭐라도 시켜 먹었으면 생활 쓰레기 정도는 나왔을 텐데.
그마저도 없는 걸 보면 우리가 오기 전에 깔끔하게 비워뒀거나, 애초에 집에서는 식사를 안 하는 걸 수도 있다.
밖에서 먹으면 조금 귀찮기는 해도 쓰레기 자체가 아예 안 남으니까. 나도 고시원에서 지낼 때는 밖에서 먹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혼자 살다 보면 음료수병 같은 거라도 쌓이던데, 청소도 잘하나 보네."
"..제가 지저분한 걸 싫어해서요. 별거 아니에요."
유서연의 말에는 차마 무시할 수는 없어서 대답한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나한테는 살짝 부끄럽기까지 하다는 듯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겸손까지 떤다.
알기 쉬울 정도로 온도 차가 확 느껴지는 대우였지만 유서연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 문까지 벌컥 열고 안쪽을 돌아봤다.
"여기도 깨끗하네. 이 정도면 엄마한테도 잘 지낸다고 해도 괜찮겠다. 아, 냉장고도 확인한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도 열어본다.
나도 호기심에 살짝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확인해봤지만 안에는 정말 들어있는 게 단 하나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들은 게 하나도 없네. 아무리 밖에서만 먹는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 음료수 같은 거라도 넣어두지."
"뭐 어때. 넣을 것도 없는데."
"맞아. 뭐 어때. 나도 혼자 살 땐 이렇게 하고 지냈는데. 지저분한 것보다는 낫지."
"그렇죠?"
내가 계속해서 유혜연의 편을 들어주자 유혜연은 살짝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받아줬다.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해. 민석 씨 말대로 지저분한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도 엄마한테는 다 그대로 말한다?"
"마음대로 해."
유혜연이 유서연의 집으로 인사하러 왔던 것처럼. 유서연 역시 부모님에게 동생이 잘 지내는지 확인해달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그런 설정이었다.
유서연은 그대로 집을 돌아다니며 비어 있는 방이나 욕실도 한 번씩 살피며 한두 마디씩 가볍게 평가를 내렸고, 유혜연이 집을 깨끗하게 하고 지낸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보다 볼 게 없어서 금방 끝났네. 이렇게 끝나니까 너무 재미없는데, 컴퓨터도 확인해 봐도 돼?"
"..안돼."
유서연의 시선이 침실에 있는 컴퓨터로 향하자 움찔하고 어깨를 떤 유혜연이 처음으로 단호하게 거절을 내뱉었다.
"뭐 이상한 거라도 검색했니? 아니면 다운받아놨나?"
"프라이버시 문제거든..?"
"그래. 아무리 그래도 컴퓨터까지 확인하는 건 좀 그렇지. 여기까지 하자."
"치. 알았어."
유혜연이 컴퓨터로 뭘 했길래 저렇게 반응하는지는 나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유혜연의 편을 들어줘야 할 때라 적당히 말렸다.
"확인 끝났으면, 조금 이르긴 해도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두 사람 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찜닭 어때? 나 오늘 찜닭 먹고 싶었는데."
유혜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서연이 확 끼어들어 메뉴를 골랐다.
"찜닭? 혜연이는 어때?"
"저도 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찜닭 먹기로 하고, 근처에 가게가 있나?"
"그냥 배달시켜 먹어도 괜찮지 않아? 밖에 돌아다니기도 귀찮은데."
순식간에 정해놓은 대로 얘기가 빠르게 진행된다.
"나야 운전 안 하고 편하긴 한데, 집에 냄새 베잖아. 우리집도 아닌데. 그러기엔 좀.."
"저는 괜찮아요!"
"그래? 괜찮겠어?"
"어차피 창문만 열어놓으면 금방 빠지니까 괜찮아요. 이제 날도 안 춥고요."
유혜연이야 내가 좋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 사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긴 했다.
"그럼 오늘은 배달로 먹자. 주문은.."
"내가 할게. 모처럼 동생 집에 왔는데, 한턱내야지."
"알았어. 서연 씨가 주문해줘."
결국은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메뉴와 가게가 순식간에 정해지고 배달까지 시킬 수 있었다.
"대학생은 이제 곧 방학이겠네? 언제 해?"
"23일부터야."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방학에는 집에 내려갈 거지?"
주문을 마치고,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나누던 도중 방학 얘기가 나오자 유혜연의 시선이 힐끔 내 쪽으로 향했다가 돌아갔다.
"..모르겠네. 어차피 방학이라고 노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지내야 집중도 잘 될 것 같은데."
"에이. 그래도 놀 건 놀면서 해야지. 모처럼 방학인데 친구들이랑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남자 친구도 사귀어도 괜찮잖아. 학비 걱정도 없으니까 알바 같은 것도 안 해도 되고."
"그렇.. 긴 하지. 그래도 방학이라고 마냥 노는 건 조금 그래서. 아마 이쪽에서 자격증 공부라도 할 것 같아."
"자격증? 무슨 자격증?"
"그냥.. 관심 가는 거 있으면 하나 따 보려고. 자기 계발 정도는 괜찮잖아."
"하여간.. 재미없게 산다니까. 난 휴가 내서 우리 자기랑 바다라도 가려고 했는데. 바쁘면 넌 같이 못 가겠다."
"바다..?"
어떻게든 여기 남아있으려고 핑계를 대던 유혜연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가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산이나 계곡은 피곤할 것 같고, 바다에 가서 느긋하게 놀다 오려고."
"......"
나중에 언제 한 번 여름 바다에 가볼 생각이 있긴 했다.
한여름에 바다에 놀러 간다고 하면 뭔가 인싸 같아서 어색하긴 했지만 결국 목표는 괜찮은 여자가 있으면 낚아서 즐겨볼 생각으로 가는 것뿐이다.
아니, 이것도 너무 인싸 같은가?
내 경우에는 최면을 사용해서 낚을 테니 순수하게 외모와 분위기, 말빨로 낚는 인싸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긴 했다.
"하여튼 바쁘게 지낼 거라니까 아쉽네. 아쉽긴 해도 둘이서 가야지 뭐."
간다면 누굴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가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나와 합의했던 흐름이 아니라 유서연이 일방적으로 꺼낸 애드리브였다.
'그때 가서 바빠졌다고 못 간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간단한 공수표 정도라면 뿌려놔도 괜찮겠지.
유혜연만이 아니라, 유서연이나 임예진, 김민아를 옆에 두고 있으면 여자는 고사하고 남자만 질리도록 꼬일 거다. 나도 유서연이 옆에 있으면 괜히 보는 눈만 높아져서 다른 여자들한테 관심이 안 갈 것 같기도 했고.
"그래도.. 며칠 정도는 쉬어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럴 시간 있으면 집에 내려가 봐야지. 집에 한 번도 안 가고 놀러 다닐 건 아니지?"
"..윽."
이건 애초부터 유혜연이 불리한 싸움이라 도저히 주도권을 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얘기가 더 자세히 진행되면 나도 곤란할 테니 슬슬 적당히 끼어들어 중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아직 갈지 안 갈지 제대로 정해놓은 건 아니니까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마. 우리도 이렇게 말만 해놓고 못 갈 수도 있거든."
"그래요..?"
"서연 씨야 너무 기대된다고 벌써 저러는 거고, 나중에 계획이 제대로 잡히면 말해줄 테니까, 같이 가고 싶으면 그때 생각해 봐."
"..그럴게요."
내가 유혜연을 데리고 바다에 갈 일은 없다고 봐도 좋겠지만 어쨌든 밑밥 정도는 뿌려놓은 셈이었다.
그렇게 또 다른 화제로 넘어가서 떠들고 있는 사이 배달이 도착했고, 내가 직접 음식을 받아 와 테이블 위에 늘어놨다.
"뭐야, 술도 시켰어?"
"그럼. 성인 셋이서 먹는 건데. 술 정도는 마셔도 괜찮잖아. 어차피 내일도 주말이고."
"하여간.. 조금만 마셔."
"자기나 적당히 마셔. 난 자기 술마시는 거 볼 때마다 불안해 죽겠으니까."
"......"
내가 가볍게 주의를 주자마자 유서연이 한탄하듯 반박했고, 동시에 유혜연의 어깨가 흠칫 떨려오며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애 같은 반응이었지만 유혜연 같은 경우에는 어린애들처럼 그냥 혼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 몇 배는 더 불안하리라.
"정 걱정되면 안 마실게."
"됐어, 됐어. 내 앞에서는 마셔도 괜찮으니까 마셔요. 혜연이도 뭐.. 나중에 가족 될 건데 괜찮겠지."
도발인지 허락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말에 유혜연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졌다.
두 사람 간의 은근한 신경전. 사실상 유서연이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을 뿐이긴 했지만 분위기가 굳어지는 걸 느끼면서 테이블 위에 요리를 늘어놓고 포장을 뜯었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하자. 나도 슬슬 배고프네."
미묘하게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내가 먼저 나서서 젓가락을 들자 그제서야 두 사람도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유서연이 주방에서 술잔이 없다며 유리컵을 가져와 술을 따랐고, 식사 시간이 순식간에 술판으로 넘어갔다.
"으.."
제일 먼저 취했다는 신호가 오는 건 당연히 유혜연이다.
나와 유서연은 솔직히 여기서 얼마나 더 마셔야 취할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라 취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는 상태였다.
"벌써 취했어?"
"..안 취했거든?"
이전에 셋이 식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풀어지려는 발음을 조금 느릿하게, 애써 또박또박 발음하며 대답하는 유혜연의 모습에 유서연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 모습에 유혜연은 살짝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유서연이 컵에 따른 술을 마시는 순간 지지 않겠다는 듯 거기에 맞춰 자기도 벌컥벌컥 술을 목으로 넘겼다.
"둘 다 천천히 마셔. 그러다 내일 고생한다."
"알았으니까 민석 씨도 빨리 마셔요. 왜 혼자만 반도 안 마셨어?"
그렇게 말하면서, 유서연이 내 컵에다 술을 가득 채워 넣었다.
"빨리! 빨리!"
"하아.."
이것 역시 미리 약속해둔 흐름이긴 했지만 최대한 지친 표정을 지으면서 유서연의 재촉에 따라 컵에 가득 따라진 술을 한입에 전부 넘겨버렸다.
그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며, 유혜연의 눈빛이 복잡한 기색을 띠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세 사람이 모두 모여 있고 누구 하나 자리를 뜰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병 반. 모두가 그 정도를 마시고 나서야 식사가 일단락됐고, 내가 먼저 나서서 쓰레기를 치우고 온 사이에.
"......"
유서연이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옅게 숨을 흘리며 잠들어 있었다.
"..그새 잠들었네."
"깨울까요?"
세상모르고 잠든. 정확히는 잠든 척을 하고 있는 유서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자 아직 잠들지 않고 앉아 있던 유혜연이 살짝 풀린 눈으로 물었다.
"아니, 뭐. 어차피 차 끌고 왔으니까 차까지만 업어가면 되긴 하는데.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해서 조금 그렇네. 이럴 때마다 대리 부르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럼.."
"혜연아."
"..네?"
"미안한데, 오늘 하루만 자고 가도 괜찮을까?"
"자, 자고 간다고요..?"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동요하며 되묻는 유서연의 표정을 보며 이번에는 내 쪽에서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괜찮아. 아무리 가족끼리라도 이렇게 뜬금없이 자고 간다고 하면 싫을 수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집에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점점 얼굴이 붉어지며 말끝을 흐리는 유혜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나야 소파에서 자면 괜찮으니까, 서연 씨랑 둘이서 침대에서 자."
"불편하실 텐데.."
"그래도 집주인한테 소파에서 자라고 할 수는 없잖아. 예전에 친구 집에서 몇 번 소파에서 자 봐서 익숙하니까 신경 쓰지 마."
"..알았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기대는 사라지고,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유혜연을 보며 가볍게 웃어주고는 열심히 잠든 연기를 하는 유서연을 업어 침실로 들어가 눕혔다.
미안한 일이지만, 유혜연은 오늘 밤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