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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시스템-299화 (299/775)

< 299화 > 오랜만인데 진짜로 안 해? (1)

평소라면 학원이 끝나고 곧장 에스테틱으로 향했을 텐데.

오늘은 에스테틱이 아닌 처음 가보는 오피스텔의 주소를 찍고 차를 몰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차를 몰아서 5분. 이 정도 거리면 그냥 걷는 게 더 편할 정도로 가까운 위치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벨을 누르자 곧바로 안에서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왔어?"

철컥, 문이 열리는 동시에 외출복 차림의 김민아가 반갑게 웃으며 맞이해왔다.

"집은 좀 어때?"

"어떻긴, 좋지. 들어와서 한 번 봐."

담담한 듯하면서도 기분이 좋다는 게 은근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한 김민아가 홱 돌아 현관 안으로 들어갔고, 김민아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와.. 이게 오피스텔이라고?"

"장난 아니지?"

고시원에서 한창 지내고 있을 때.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오피스텔로 이사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알아봤던 오피스텔들은 깔끔하긴 하지만 공간 자체는 그냥저냥 좁은 원룸 수준에 불과했고, 서울이라 그런지 가격대는 더럽게 비싸기만 해서 포기했었는데.

이쪽은 아예 아파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넓다.

거실도 탁 트인 데다가 욕실 겸 화장실을 제외해도 방이 세 개나 됐다.

"이럴 거면 그냥 우리 아파트로 들어오는 게 낫지 않나?"

"아파트보다는 싸니까. 고시원에서는 너무 바글바글 모여서 지냈으니까 조용히 혼자 살아보고 싶기도 했고. 같은 단지에서 살면 그냥 옆집 사는 기분이잖아."

하기야, 내 경우에는 고시원에서 지낼 때도 충분히 혼자 산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자기 방을 제외하면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복도나 주방을 공유하면서 지내야 했으니 무시할 수 없는 차이이기는 했다.

거기에 김민아는 자기 방이 아닌 총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으니 더더욱 혼자 산다는 느낌이 없었으리라.

"몰래 다른 남자 들이는 거 아니지?"

"뭐래. 미쳤어?"

"응?"

그냥 가볍게 농담 한 번 던져봤을 뿐인데.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리 약간의 불쾌함과 함께 정색하는 반응이 돌아와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봐?"

"기특해서."

혹시 농담이라도 다른 남자랑 만나는 건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저렇게 반응하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김민아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는지 살짝 뺨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자기는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드리고 다니면서. 뻔뻔하게."

질책하듯이 말하는 것 치고는 말투나 표정에 불쾌한 기색이 없다. 그냥 부끄러운 걸 아닌 척하려고 튕기는 것이리라.

다른 여자도 아니고, 내 노예가 될 정도로 몸을 섞은 사이라 그런지 그냥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침실은 어느 방이야?"

"오, 오늘은 안 할 거야. 이따 방송할 거란 말이야. 첫날이니까 제대로 해야 돼."

"그냥 물어보는 건데?"

"..그냥이 아닌 게 뻔히 보이니까 그렇지. 됐으니까, 따라와."

내가 김민아를 잘 아는 만큼 김민아도 날 잘 안다.

농담처럼 말하기는 했어도 침실까지 갔으면 분명 어떻게든 밀어붙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물론 이렇게 한 번 쳐낸다고 포기할 생각도 없었지만..

"오오..?"

김민아가 들어간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온 순간.

대충 보기만 해도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방 안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내 방에 있는 책상보다도 길고 넓은 책상과 받침대 위에 나란히 자리 잡은 두 개의 모니터.

그리고 그 옆으로 조금은 정신 사납게 배치된 커다란 방송용 마이크도 보였다.

천천히 둘러보니 사방에 벽면도 거실이랑은 다르게 생겼고.

"이게 방음 부스야?"

"방음 부스.. 라기보다는 방음 방이지. 방 하나를 통째로 방음이 되도록 해놨거든."

"돈 좀 썼겠네."

이런 쪽으로는 전혀 지식이 없어 잘 모르지만 아마 그럴 것이다. 김민아 역시 딱히 부정할 생각은 없는 듯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서연 언니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썼지."

"나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서연 언니한테 할 거야. 자기가 뭘 했다고, 뻔뻔하게."

"그거야.."

없다.

유서연의 돈이 내 돈이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깔고 들어가고 있긴 하지만 결국 출처는 유서연의 집안이었으니까.

"그래도 내 덕분 아니야?"

"나, 최면 깨졌을 때 화장실 뛰어 들어가서 토 쏟았던 거 기억하지?"

이걸 또 이렇게 반박하네.

억지를 쓰려면 못 쓸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쓰레기라고 내 얼굴에 침 뱉는 일밖에 되지 않을 테니 굳이 자존심 세울 필요는 없었다.

"할 말 없게 만드네."

"흥. 누가 억지 부리래?"

유서연이나 임예진이었다면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알아서 맞추고 들어왔을 텐데.

김민아는 명목상 노예가 아닌 친구 관계다 보니 마냥 굽히고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불쾌할 것도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런 관계도 하나쯤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다른 방은?"

"하나는 침실 겸 내 방으로 쓸 거고, 다른 하나는 일단 짐만 좀 내려놨는데.. 옷도 옷장 하나만 있으면 다 채울 수 있는 수준이라 애매하더라. 한동안은 그냥 그렇게 두려고."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진짜."

"그러게."

고시원 단칸방에서 지내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에 낄낄 웃으며 말하자 김민아도 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번엔 침실도 가보자."

"아, 좀! 안 할 거라고!"

"알아, 알아. 그래도 모처럼 구경 왔는데 어떻게 생겼는지는 봐야지. 나 앞으로 침실에 안 들일 거야?"

"그.. 건 아니지."

지금도 아닌 척 빼고는 있지만 김민아도 섹스를 좋아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당당하게 안 들일 거라고 말하기는 조금 그랬는지, 기세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나도 저녁에 약속 있어. 걱정하지 마."

"약속? 누구랑?"

"서연이 동생."

"아.."

김민아에게는 한 번도 유혜연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들었다.

나, 유서연, 임예진, 김민아. 이렇게 넷이 쓰는 단톡방 외에도 여자들끼리만 모인 단톡방이 따로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평소에는 개인적인 연락용으로만 쓰고, 뭔가 다 같이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 때만 단톡방을 쓰고 있으니까.

여자들끼리만 모인 단톡방?

거기서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굳이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싶지는 않았다.

"얼굴이야 뭐, 예쁠 테고. 성격은 어때? 언니랑 별로 안 친하던데."

"딱 서연이한테만 날이 서 있는 거지 나쁜 성격은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착하다고 하기에는 또 애매했지만.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데?"

"입술 뽀뽀랑 끌어안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데까지?"

"...?"

너무 예상 밖의 대답이었던 걸까. 김민아의 표정이 순간 벙 쪘다.

"그게 뭐야?"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가 술만 먹으면 뭐든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고 기억도 못 한다고 믿게 해놨는데.. 걔가 그 이상 진도 나갈 생각을 안 해."

유혜연을 만난 게 5월 초. 지금은 6월이다. 그동안 유서연을 뺀 데이트를 세 번이나 했는데도 유혜연은 그 이상 진도를 나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뭔가 조금.. 서연 언니 동생 맞아?"

"생긴 것만 보면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걸?"

"..신기하네."

"나도 처음엔 신기해서 재밌었는데. 이젠 슬슬 답답하더라고."

자매가 꼭 닮으리란 법은 없지만 유서연의 동생치고는 너무 갑갑한 성격이다.

나도 이제 더는 기다려주기 귀찮아서, 오늘은 조금 다른 방법을 써볼 생각이었다.

유혜연에 대한 얘기를 몇 마디 더 주고받고, 방에서 나와 이번에는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좋은데? 침대는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고, 컴퓨터는 왜 또 있어?"

"이건 평소에 쓰는 컴퓨터지. 저쪽 방에 있는 건 방송용이고."

"별걸 다 나눠놨네."

김민아의 설명을 들으면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침대맡에 풀썩 걸터앉았다.

"하여튼 좋은데 사네. 부모님은?"

"조만간 복권이라도 됐다고 해서 이사시켜 드리려고. 이번 달에는 집이고 컴퓨터고 언니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올해 말쯤에 하려고."

"효녀네, 효녀야."

"남의 돈으로 하는 효도긴 하지만."

나름 부족함 없이 자란 유서연이나 임예진과는 달리 김민아와는 이 흙수저 감성을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어 더 편안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을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던 김민아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걸음을 뚝 멈추고는 갑자기 시선을 똑바로 맞춰왔다.

"맞다. 야."

"응?"

"왜 나는 그거 안 해줘?"

"그거? 뜬금없이 그거라고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냐?"

"내가 꼭 말로 해야 돼?"

"음.. 말로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잠깐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뭔가 해주기로 한 게 있었나? 애널 조교는 자기 쪽에서 싫다고 미루고 있는 건데. 사실은 해줬으면 하고 있었나?

"씨.. 치사한 놈. 그거 말이야! 언니들한테 해준 반지랑 목걸이! 왜 난 안 해주냐고!"

"아."

"아!? 너 진짜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아니, 뭐.."

안 하고 있었다.

유서연과 임예진한테 줬던 건 나름대로 생일 이벤트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고, 그때는 아직 김민아가 합류하지 않았던 때라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고 해도 좋았다.

"갖고 싶었어?"

"이게 진짜.."

"까먹어서 미안해. 딱히 무슨 의미를 갖고 준 건 아니라 완전히 잊고 있었네."

내가 잘못한 일인가 생각해보면 살짝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럴 때는 그냥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게 해답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길게 끌지 않고 곧바로 사과했다.

"씨.. 난 언제 주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예 몸까지 반대로 돌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번엔 확실히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진짜 미안해. 내가 워낙 눈치가 없어서 그랬어."

침대에서 일어나 김민아의 뒤로 다가가서, 그대로 뒤에서 끌어안으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미안하지는 않다.

그래도, 여자를 만난 경험이 꽤 많아져서 그런지 이런 거짓말도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응? 앞으로는 안 그럴게. 기분 풀어."

그렇게 말하면서, 김민아의 뺨에 쪽, 하고 소리 내며 가볍게 입을 맞추고, 살짝 힘이 빠진 몸을 품으로 끌어당겨, 그대로 침대 위로 함께 올라와 눕혔다.

분위기가 조금 요상해지긴 했지만 목표했던대로 함께 침대에 올라오는 것까지는 성공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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