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오빠 술 못 마셔요? (6)
유서연은 최민석의 주사를 비밀로 하고 싶었던 걸까.
기어코 자기 주사를 스스로 밝힌 최민석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보다가, 결국은 짧게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하아.. 못 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아예 거절할 생각 자체를 안 한다니까?"
"뭐가 달라?"
"당연히 다르지. 못 하는 건 싫은데 억지로 한다는 거잖아. 애기는 취하면 아예 싫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시키는 대로 한단 말이야."
"아.."
확실히 다르긴 하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술버릇인데, 싫다는 제스처마저도 없다면 유서연이 저렇게 걱정할 만도 했다.
하지만 최민석이 반응한 건 유혜연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애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안 돼. 나도 애기가 싫어하니까 이렇게 안 부르려고 했는데, 오늘은 멋대로 술버릇 밝혔으니까 애기라고 부를 거야."
"하아.."
저번부터 최민석을 애기라고 부르는 게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저 호칭을 싫어하는 건 최민석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것도 최민석의 편을 들어서 뭐라고 한마디 해주거나,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최민석의 주사에 관한 얘기가 더 신경 쓰였다.
"그런데, 취해서 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술버릇이면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 거 아니야?"
별다른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최대한 표정과 목소리를 관리하며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니까, 서연 씨가 착각한 거라니까."
미안하기는 하지만 최민석의 말은 잠시 흘려듣고, 유서연에게 살짝 시선을 보내며 설명을 요구했다.
"몰라."
"응?"
"애초에 민석 씨는 술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술 마시는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더라고. 군대 가기 전에 친구들이랑 한두 번 마시고, 전역한 뒤에는 나랑 마신 게 처음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지."
"으음.."
민석 오빠는 술도 잘 안 마시는구나. 저번에 보니까 담배도 안 피우는 것 같던데. 뭔가 금욕적인 이미지라 그런지 마음속에서 호감도가 조금 더 오르는 게 느껴졌다.
유혜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유서연은 쌓인 감정이 꽤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그거 말고는 취했다는 티도 전혀 안 나. 얼굴도 안 빨개지고, 몸도 멀쩡하고, 혀도 안 풀리고, 말도 안 꼬이고, 생각이나 말하는 것도 평소랑 똑같으니까. 그냥 딱 뭘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만 못 해."
그런 술버릇이 있나?
술버릇이야 사람마다 제각각이니 별의별 타입이 다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민석의 경우는 너무 특이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서연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제대로 알아둬야 자신의 일이 수월해질 거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표정을 관리하며 유서연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오빠는 왜 몰라? 그냥 오빠가 원래 거절을 잘 안 하는 성격인데 언니가 착각한 거 아니야?"
"내가 애기랑 동거한 것도 이제 1년이 넘어가는데, 그런 것도 모르겠니?"
유서연의 태도는 여전히 거리낄 것 없이 당당했다.
최민석과의 동거는 1년째. 알고 싶지 않은 정보도 같이 들어버린 탓에 기분이 조금 씁쓸했지만 지금은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성격 자체가 워낙 순해서 거절을 잘 안 하는 건 맞는데, 아니다 싶은 건 확실하게 거절하는 성격이야. 그런데 술만 마시면 그게 안 돼."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확인하냐고? 그냥 평소처럼 거절 안 한 거 아니냐고? 그랬으면 내가 지금 애기랑 사귀고 있겠니?"
"그게 무슨.."
아.
본래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불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성욕에 눈을 뜬 지금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여자마저도 움찔할 정도로 은은하게 색기 어린 웃음을 본 순간 사건의 전말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더러운 년!'
최근 들어 상당히 가라앉아 있던 유서연에 대한 혐오감이 순식간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일방적인 사내 괴롭힘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어떻게 술자리 한 번에 연인까지 이어졌나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방법을 유서연이 먼저 써먹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있던 비어있던 퍼즐 조각이 완벽하게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네?"
갑작스럽게 대화에 끼어든 최민석의 진지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분한 마음에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가 그날은 취해서 실수를 좀 하긴 했는데, 술버릇 때문은 아니라고."
"그럼.."
"어머. 민석 씨는 나랑 사귀게 된 게 실수였어?"
최민석의 진지한 반론은 유서연의 짧은 말 몇 마디에 순식간에 격추당했다.
살짝 장난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 때문에 장난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몰라. 알아도 상처받는 말이었어. 민석 씨는 그날 일이 실수였다는 거지? 실수 때문에 나랑 사귀고 있는 거고?"
"그런 건 아니지. 아무리 실수였어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랑 계속 사귀고 있겠어?"
"그럼 나 좋아해?"
"지금 혜연이도 보고 있는데.."
"혜연이는 어차피 우리 사귀고 있는 거 아는데, 그게 중요해? 나 좋아해? 대답 안 해주면 진짜 삐질 거야?"
"..알았어. 우리 서연 씨 당연히 좋아하지. 뭘 그런 걸 물어봐."
"사랑해?"
"사랑해."
"그럼 안아줘."
"하아.."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벼운 분위기에서 갈비나 구워 먹고, 술버릇 얘기만 하고 있지 않았었나?
내가 왜 눈앞에서 커플이 닭살 돋게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봐야 하지?
그리고, 분명 예전에는 비슷했던 것 같은데, 최민석의 몸에 눌리는 유서연의 가슴은 왜 저렇게 커 보이지?
역시 착각이 아니었나? 무슨 수술이라도 했나? 거기서 더 커져서 뭘 어쩌려고? 저 정도면 무거워서 처지지는 않나?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고 열 받으면 머릿속이 이런 식으로 뒤죽박죽이 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쨌든, 최민석은 어린애처럼 팔 벌려 안아달라는 유서연을 품에 끌어안고는 정말 어린애를 다루는 것처럼 머리까지 천천히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미안해. 서연 씨가 가끔 이렇게 애처럼 굴 때가 있어서.."
"나한테 집중."
"..알았어."
이제는 머리만 쓰다듬는 게 아니라 등도 토닥여준다. 최민석의 품에 완전히 고개를 파묻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숨소리나 미세한 몸의 떨림만으로도 유서연이 행복에 절어있다 못해 녹아내리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속에서 오만가지 감정이 올라와서, 마셔본 적도 없는 소주병을 따서 잔에 따라 한 번에 원샷하고는 씁쓸한 맛에 눈살을 찌푸리며 타지 않도록 올려둔 갈비도 집어 먹었다.
갈비는 맛있지만, 술은 쓰고 맛없기만 하다. 도대체 왜 이런 걸 먹나 싶었다.
최민석은 유서연을 품에 안고 쓰다듬고 토닥여주며 눈짓으로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맛대가리 없는 쓴맛이 다시 땡겨서, 다시 한번 잔에 술을 따르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쓴맛에 눈살을 찌푸리고, 급하게 갈비를 입에 집어넣고 쩝쩝 먹어 맛을 중화시켰다.
"이제 괜찮지?"
"응."
그렇게 2분 정도를 최민석에 품에서 안겨 있고 나서야, 등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몸을 떨어뜨렸다.
무슨 표정이 저렇게 개운하고 행복해 보이는지. 술의 쓴맛으로 간신히 가라앉힌 짜증이 다시 한번 울컥 올라올 정도였다.
"..애도 아니고."
"응? 난 우리 애기랑 있으면 나도 애기 해도 상관없는데? 볼래?"
"뭐, 뭐..?"
유서연의 애정행각이 너무 눈꼴 시려서 한마디 했더니, 유서연은 오히려 더 신이 났는지 다시 한번 최민석의 품에 달려들어 가슴팍에 뺨을 부벼댔다.
예전의 유서연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체면이고 뭐고 없는 행동에 이제는 혐오감보다도 당황스러운 기분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만하고 밥 먹어야지."
"히히."
역시 삐진 척 장난했던 걸까. 이번에는 오래 끌지도 않고 최민석이 밀어내는 대로 가볍게 밀려나며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리고는 원래 자세로 고쳐 앉았다.
"냠."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새하얀 흰쌀밥 위에 갈비를 올려 입에 집어넣고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우물거렸다.
"에휴."
최민석 역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금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쉬고는 다시 식사로 돌아왔다.
예전엔 연기로라도 저런 짓은 못 할 인간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변화를 겪으면 저렇게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인간.. 아니, 언니. 자주 이래요?"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은 것 같네."
확실히. 최민석도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자주 이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자, 아아."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쌈을 싸서 유서연의 입에 넣어준다.
유서연은 그걸 또 행복한 표정으로 받아먹고. 그러면서도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고 귀가 빨개진 걸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닌 것 같고, 어지간히 부끄러운 것 같은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술은 나 혼자 마셔?"
"그래, 그래. 언니도 마실게."
한 입 먹을 때마다 쓸쓸한 맛에 눈살을 찌푸리는 유혜연과는 달리 유서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에 따른 술을 쭈욱 마시고는 입가심도 하지 않는다.
"오빠는 안 마셔요?"
"나야 뭐,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서연 씨가 싫다는데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으니까."
"맞아, 맞아. 우리 애기는 나랑 있을 때만 마시기로 했어."
"그랬어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어지간하면 안 마시기로 했지."
"그럼 오늘 정도는 괜찮잖아. 내가 오빠한테 뭐 시킬 것도 아니고."
"흐음.."
결국 최민석에게 술을 마시게 하려면 유서연의 허락이 필요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마시게 하려고 그래? 그냥 나랑 마시면 되지."
"치, 친해지려면 같이 술 마시는 게 좋다잖아. 나도 민석 오빠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친해지고 싶어서.."
유서연이야 그냥 별생각 없이 물어봤을 뿐이겠지만, 순간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잘 대답한 것 같았다.
"그럼.. 뭐, 오늘만이다?"
다행히도 유서연은 더 깊게 캐묻지 않고 깔끔하게 최민석의 음주를 허락했다.
그만큼 날 믿는 건가? 아니면 자기가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뭐가 됐든, 쿨한 표정으로 최민석의 잔에 술을 따라 건네는 유서연은 지금 스스로가 얼마나 큰 빈틈을 드러낸 건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