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오빠 술 못 마셔요? (5)
'..다들 이런 가게는 잘도 찾아내네.'
최민석의 차를 타고 도착한 가게는 평범한 고깃집과는 달리 고풍스러운 한옥 같은 외관에 시끌시끌한 소음 없이 조용했다.
어려서부터 가족이 외식을 할 때는 주로 이런 가게를 이용했기 때문에 어색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최민석에게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가격일 텐데.
유서연이 사는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메뉴와 가게를 정한 게 최민석이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았다.
최민석이 조금 신경 쓰여서, 괜찮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게 오히려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용히 뒤를 따라 가게에 들어왔다.
"저번에 서연 씨랑 왔었던 곳인데, 맛이 괜찮아서 또 오고 싶었거든."
"그러면 또 오자고 하지 그랬어?"
"그만큼 비싸잖아. 나중에 날 잡아서 또 오려고 했지."
"하여간.."
조용히 대화를 듣기만 해도 두 사람의 경제관념이 어긋나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런 가게면 고기만 시켜도 1인분에 10만 원 씩은 나올 테니 보통은 부담스럽게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데. 유서연은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저기, 제 건 제가 낼 수 있어요."
"응?"
최민석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비싼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얻어먹을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최민석이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픽 하고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렇게까지 비싼 데는 아니니까."
"아, 네.."
뭐였지?
분명 자기 몫은 스스로 계산하려고 제대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최민석이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면서 말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해버렸다.
'바보 같아..'
이렇게 쉽게 알겠다고 할 거면 말이나 하질 말던가. 이러면 괜히 생색만 내려고 말한 것 같지 않은가.
입구에서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가게 자체가 홀에는 테이블이 없고 모든 손님들이 방에서 식사를 하는 구조였기에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가 앉았다.
유서연과 최민석이 나란히 앉고, 맞은 편에 혼자 앉아서 조금 거리가 가까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보자고 했어?"
"내가 아니라 민석 씨가 부르자고 했어. 모처럼 가까운 데로 이사도 왔으니까 셋이서 밥이라도 먹자고."
"아.."
하기야, 유서연으로서는 굳이 자신의 과거나 본래 성격을 알고 있는 이런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긴 했다.
그래도 유서연이 아니라 최민석이 불러줬다고 하니 기분은 좋아졌다. 아주 잠시 동안만.
"나중에 자주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미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유서연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최민석에게 돌리자 멋쩍은 웃음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서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며 표정에 엷게 웃음기가 맴돌았다.
"벌써 가족한테 점수 따 놓으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니까 조금 그렇긴 하네."
"하여간. 부지런하다니까."
뭐지? 별다른 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이 순식간에 커플 간의 염장질이 돼서 돌아왔다.
최민석 쪽이야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뿐이겠지만, 유서연은 대놓고 꽁냥거리는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탓에 누가 보더라도 사이좋은 커플로만 보일 정도라 짜증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점원이 숯불을 올리고, 갈비와 함께 반찬들을 하나하나 식탁에 올려놓자 최민석이 점원에게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고기는 저희가 구울게요."
왜? 가게에서 구워주는 게 굽기도 잘 굽고 편하지 않나?
"점원이 옆에서 하나하나 구워주면 불편해서 밥이 잘 안 넘어간대. 그냥 자기가 굽는 게 편하다더라. 별나지?"
마치 보자마자 생각을 읽은 것처럼. 옆에 앉은 유서연이 놀리듯 웃으며 설명했다.
"아는 사람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보고 있으면 먹기 불편할 수도 있지."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최민석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지?"
자신이 편 들어주자 최민석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하고는 집게를 들어 갈비를 불판에 올렸다.
치이익- 하고 고기 익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열기에 살짝 일렁이는,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최민석의 얼굴이 너무 보기 좋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자, 먹어."
"오, 오빠도 드세요."
익은 갈비를 능숙하게 잘라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주는 최민석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도 구우면서 먹어야지. 자, 서연 씨도."
"흐흥. 잠깐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최민석이 그릇에 갈비를 한 조각 올려주자 유서연은 다시 한번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더니 그대로 받은 갈비로 쌈을 싸서 최민석의 입으로 살짝 들이밀었다.
"자, 아아."
"음.. 아아."
유서연의 재촉에 살짝 곤란한 듯 유혜연을 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핀 최민석은 결국 마지못해 입을 벌려 쌈을 입으로 받아먹고는 우물우물 씹었다.
"맛있어?"
대놓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묻는 유서연의 질문에 최민석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이것도, 사이 좋은 커플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오그라드는 애정 행각이다.
이 둘이야 실제로 커플이니 이상할 게 없는 행동이었지만, 사람을 불러다 놓고는 자기들끼리 이렇게 꽁냥대는 것도 매너 없는 짓 아닌가?
물론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던 최민석이 아닌 유서연에게만 해당하는 짜증이었다.
"적당히 좀 해. 사람 불러놓고 오글거리게 뭐 하는 거야?"
"뭐 어때. 사귀는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할 수도 있는 거지. 너도 싸 줄까?"
"..됐거든?"
원래는 이렇게까지 틱틱거릴 만한 일은 아닌데. 최민석과 당당하게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유서연을 보고 있자니 울컥 짜증이 올라와 자기도 모르게 말투와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나왔다.
"서연 씨가 워낙 장난기가 많잖아. 조금만 이해해 줘."
"..네에."
뭐라고 할까. 유서연이 잘못했다고는 하는데 결국 감싸주는 대상도 유서연이라 기분이 복잡했다.
"고기도 다 익었으니까.."
"아, 혜연이 너."
"응?"
적당히 분위기를 중재시키려던 최민석의 말을 끊고,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유서연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술은 마실 줄 아니?"
"술..? 그야.."
마셔본 적도 없다.
그런데 왜 최민석한테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땐 워낙 감정에 휩쓸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기도 했고, 그 뒤에는 유서연에 대한 질투, 비참함, 갑작스럽게 올라온 성욕으로 인해 컨디션이 나빠져 계획을 검토해볼 생각조차 안 했던 탓에 이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던 계획의 맹점이었다.
"딱 보니까 마셔본 적도 없구나? 그러면 안 되지. 이제 너도 성인인데. 대학에서는 술 마실 일 없었어?"
"..아직은."
MT 때는 술 파티가 있긴 했지만 딱 잘라 마실 줄 모른다고 하니 집요하게 권유하는 사람도 없었고, 흑기사니 뭐니 나서서 자기가 마셔주겠다며 난리를 피웠던 남자들도 있어 곤란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주량 정도는 확실히 알아둬야지. 그래야 나중에 술 마실 일 있을 때 제대로 조심할 수 있는 거야."
"으음.."
평소라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 같은 말로 딱 잘라냈을 텐데.
지금은 최민석이 옆에 있어서 그럴 수도 없고, 유서연의 말이 마냥 틀린 말도 아니라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잘 됐네. 이번에 같이 마시면서 주량 파악 좀 해보자. 원래 술은 가족이나 어른한테 배우는 거잖니."
"언니는.."
대학에서 혼자 마시고 다니고, 클럽에서도 멋대로 마시고 다녔잖아.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면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타이밍이었지만 그렇게 분위기를 나쁘기 만들기엔 최민석과 그럴듯한 친분도 만들어두지 못했으니 아직은 조심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지금 마시자고?"
"그래야지."
유서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는 그대로 호출 벨을 눌러 점원을 불러 술을 주문했다.
"오빠도 마셔요?"
"나야.."
"당연히 안되지. 차 끌고 왔는데. 음주 운전이라도 시키려고?"
"그거야.."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다. 애초에 오늘은 최민석에게 술을 먹여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었으니 괜찮았지만, 다음에는 차 문제도 감안해서 계획을 짜야 할 것 같았다.
"뭐 어때. 대리 부르면 되지. 나도 같이 마실게."
유서연의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듣고 보니 대리만 부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유서연은 여전히 단호한 태도였다.
"안돼. 마시지 마."
"뭐야. 오빠가 마시겠다는데. 왜 못 마시게 해?"
오늘 굳이 마시게 할 필요는 없지만, 기왕 마신다면 최민석과 함께 마시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유서연에게 따지고 들자 유서연은 입을 다물고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버릇이 나빠서 그래."
"아, 무슨 술버릇이야. 나 그런 거 없다니까."
이번에는 최민석 쪽에서. 유서연의 말에 약간의 짜증.. 이라기보다는 답답함을 담아 대답했다.
"없긴 뭘 없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면 남들 앞에서는 술 마시지 마. 마실 거면 나랑 둘이 있을 때만 마셔."
"하아.."
여태까지는 한 번도 최민석에게 이런 태도를 보였던 적이 없던 유서연이 이상하리만치 단호한 태도로 말하자 최민석도 더는 따지지 못하고 짧게 한숨만 쉬었다.
'..도대체 뭐길래?'
궁금하다.
MT 때만 해도 목소리가 커지고, 같은 말만 계속해서 떠들어대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토하고.. 별의별 주사를 다 봤지만 저렇게 정색할 만한 주사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물며, 술이라면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마셨을 유서연이 저렇게까지 정색하면서 못 마시게 한다니.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궁금했다.
"오빠 주사가 뭔데요? 오빠 술 못 마셔요?"
"아니, 애초에 거의 취하지도 않는데.."
"안 취하긴 뭘 안 취해. 한 병이면 취하면서."
뭐지? 두 사람의 주장이 계속해서 엇나간다. 둘 다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더 혼란스러웠다.
아까는 최민석이 욱해서 다시 말해주길 바래서 최민석에게 물어봤으니, 이번에는 유서연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오빠 주사가 뭔데 그렇게 못 마시게 해?"
"..비밀이야. 아무튼 마시게 하지 마."
유서연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기분이 언짢다는 증거였다.
그 눈빛에 살짝 흠칫하면서도, 궁금증이 한층 더 커져서 반사적으로 최민석에게 도움을 구하듯이 힐끔 시선을 보냈다.
"아니, 뭐. 내가 술만 마시면 남이 말하는 걸 거절을 못 한다나? 그냥 서연 씨가 착각해서 이러는 거야."
본인은 정말로 아니라는 것처럼 답답한 말투였지만, 유혜연은 충격적인 주사의 내용이 온 신경이 팔려 최민석의 답답함은 이미 안중에도 없어진 상태였다.
평소라면 유서연의 말은 믿지 않고, 최민석의 말을 더 신뢰했을 텐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더 들어볼 것도 없이 유서연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