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291화 (291/775)

< 291화 > 오빠 술 못 마셔요? (4)

시끄럽게 울리는 멜로디가 잠을 깨운다.

"아으으.."

노래 자체는 선명하고 듣기 좋은 밝은 노래였지만 며칠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쪽잠만 자며 보냈던 유혜연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소음에 불과했다.

원래라면 알람이 울리는 일 없이, 알아서 잠에서 깰 때까지 원 없이 자려고 했지만 유서연에게 최민석과 함께 저녁을 먹자는 메세지를 받은 탓에 알람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았을 텐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기회에 눈이 돌아가 생각도 없이 오늘 바로 만나자고 했던 게 실수였다.

"..하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도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래도 다섯 시간 정도는 잤는데. 몸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다.

이대로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잠들고 싶었지만 자기 쪽에서 오늘 만나자고 해놓고 약속을 미룬다면 최민석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그것만큼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 이유 덕분에,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욕실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지느라 갈아입지도 않은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욕실에 들어와 벽에 걸린 샤워기 앞에 멍하니 섰다.

자고 싶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어떤지도 확인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안돼."

다시 한번 최민석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이를 꽉 깨물고는 그대로 샤워의 온도를 가장 차갑게 맞춘 뒤에 물을 틀었다.

쏴아아-!

"꺄으윽!!"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차가운 물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자 자신도 모르기 한껏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그래도 잠은 확 깨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애써 괜찮은 척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실제로도 정신이 번쩍 깨면서 무겁던 몸도 조금은 괜찮아지고, 뿌옇던 시야도 깨끗해졌다.

"으, 으읏..!"

그래도 너무 차가웠나? 몸을 움츠린 자세 그대로 어깨를 덜덜 떨면서 찬물을 맞다가,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수도를 끄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움츠러들었던 몸을 풀었다.

"하아.."

물을 끄기는 했지만 여전히 몸은 싸늘하게 식어 조금 춥기까지 하다.

그래도 잠은 깼으니까. 그렇게 위안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거울 안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

얼굴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아래. 지나칠 정도로 크게 굴곡져 있는 가슴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혜연도 여자인 만큼 몸매가 좋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은 너무 과하게 크다.

유일한 콤플렉스라고 해도 좋을 작은 키와 맞물려서, 몸매의 밸런스가 너무 나빠져 이렇게 자신의 몸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가슴이 아니라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 팔다리도 조금 더 시원스럽게 뻗고, 딱 '가슴이 크다'라고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키를 원했다.

이를테면, 언니인 유서연처럼..

"윽..!"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부분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혜연은 곧장 잡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붕붕 휘저어댔다.

아무리 그래도 유서연을 부러워한다니. 여태껏 쌓아온 유서연에 대한 악감정과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안 져."

유서연은 예쁘다. 키도 큰 편이고. 몸매도 자신보다 낫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했다.

하지만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당장 외모만 치더라도 유서연에게 크게 뒤진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성격이라면 자신이 유서연보다 훨씬 낫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흥."

결국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도 최민석을 유혹할 기회만 있다면, 유서연의 본성을 까발릴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지 상황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정신부터 가다듬는 것처럼. 구태여 차가운 물로 끝까지 몸을 씻어 의식을 빠릿빠릿하게 깨워놓고.

욕실에서 나와 물기를 말리고 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키도 작고, 가슴도 지나치게 크다 보니 어울리는 옷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겨울에는 그냥 적당히 달라붙는 스웨터에 아무 외투나 걸치면 그럭저럭 모양이 나왔지만, 전체적으로 옷이 헐렁해지고 노출 면적이 넓어지는 여름에는 아무래도..

"으으으..!"

입을 옷이 없다.

옷을 살 때는 고민을 많이 했어도 나갈 때 입을 옷을 고르면서는 그다지 고민하는 일이 없었는데.

어떻게든 최민석에게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드는 옷이 하나도 안 보였다.

"..좀 많이 가져올 걸 그랬어."

대학에 꾸미러 다니냐고, 짐이 많아지는 것도 싫어 적당히 마음에 드는 옷 몇 벌만 골라서 챙겨온 게 잘못이었다.

"시간도 없는데.."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20분. 화장이야 원래 간단하게 하는 편이었으니 10분이면 충분하겠지만 옷을 고르기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이걸로.. 할까..?"

가슴을 강조시키는, 뚱뚱해 보이는 옷은 절대 안 된다.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너무 싸 보이는 옷도 싫다.

결국, 이래저래 고민하다 보니 마지막에 남은 건 조금 헐렁한 하얀 셔츠에 허리에 딱 달라붙은 하이 웨스트 스커트였다.

옷은 예쁘긴 한데, 허벅지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짧은 탓에 시선이 부담스러워 몇 번 입고 말았던 옷이었지만 보여줄 상대가 최민석이라고 생각하니 썩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옷은 이걸로 됐어."

마지막으로 확인 차 거울을 봤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이 웨스트 스커트에 오피스 룩을 차려 입고 있던 유서연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시간이 없어 일단 타협하고 넘어갔다.

느낌이 비슷할 뿐이지 이쪽은 오피스 룩도 아니었고, 치마도 자신 쪽이 더 길었다.

다행히도 옷에 대한 미련을 지워버리니 화장을 끝마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 역시 뭔가 조금 불만스러워 조금 더 진하게 화장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괜히 익숙하지 않은 화장으로 실패할 가능성을 만드느니 그냥 평소처럼 하는 게 낫겠다 싶어 마찬가지로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화장까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침대 위에 던져놨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왔어?"

[응. 지금 오피스텔 앞에 차 세워뒀으니까 내려와.]

"..알았어."

최민석이라면 모를까. 유서연과는 별로 길게 대화할 내용도 없었기에 짧게 용건만 주고받고 전화를 끊었다.

"으음.."

현관 앞에 서서. 평소처럼 운동화를 신을까 하다가 모처럼 꾸몄으니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 몇 번 신지 않았던 구두까지 꺼내 신고 집을 나섰다.

외출 한번 하면서 이렇게 옷차림에 신경을 써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전에 탔던 최민석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차에는 별로 관심도 없어서 검은색인지 흰색이지만 뺀다면 뭐가 무슨 차인지 구분도 못하고 살았었는데. 최민석의 차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 타고 뭐해?"

"..이 차가 맞나 헷갈렸어."

차 앞에 서서, 뒷문을 벌컥 열고 말을 거는 유서연의 말에 대답하며 뒷좌석에 탔다.

썬팅이 너무 짙어서 앞자리가 비어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가능하면 최민석의 옆에 앉고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손수 문까지 열어줬는데 무시하고 앞자리에 타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응. 오랜만이네. 아, 말 놓기로 했으니까 편하게 해도 괜찮지?"

"네, 네. 괜찮아요."

운전석에서 살짝 고개를 돌린 최민석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역시 사랑이다. 한동안 성욕에 시달리며 고민하고 있던 감정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아직 메뉴는 안 정했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조금 정도는 여운에 젖게 해줘도 괜찮을 텐데. 옆에서 들려온 유서연의 목소리에 둥실둥실 기분 좋게 떠 있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나는 별로.."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하려다가.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남자들을 제일 곤란하게 하는 말이 '아무거나'라는 말이 떠올라 말을 멈추고 짧게 숨을 삼켰다.

'..뭐가 좋지?'

무난하게 치킨이면 되려나? 아니면 고기라도 먹자고 할까? 그래도 너무 기름진 걸로 고르면 몸 관리 안 한다고 생각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너무 맛없는 걸로 고르면 입맛이 안 맞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간단한 메뉴 선택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망설이게 된다. 새삼 남자들이 왜 '아무거나'를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따로 생각나는 거 없으면, 갈비는 어때요? 근처에 맛있게 하는 집 있던데."

"조, 좋아요!"

꼭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나서서 메뉴를 정해주는 최민석의 모습에 반색하며 대답했다.

"서연 씨는요?"

"저도 좋아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시원스럽게 메뉴가 정해졌고, 네비에 주소를 입력한 최민석이 차를 몰기 시작하면서 다시 차 안이 조용해졌다.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서연 쪽이었다.

"대학 생활은 어때? 남자들이 귀찮게 굴지는 않아?"

"아, 응. 귀찮게 구는 선배가 한 명 있긴 한데.."

골라도 하필 왜 이런 화제를 골라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최민석에게는 자신이 남자와 조금도 엮이지 않은, 깨끗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여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었는데.

자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주변에 남자가 꼬였다는 말을 해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없다고 하면, 뭔가 인기가 없는 사람처럼 생각될 것 같아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흐응.. 그래? 어떻게 귀찮게 구는데? 나도 대학 다닐 때 귀찮게 굴었던 남자애들이 꽤 있었거든."

그러시겠지. 그런 주제에 연애 같은 건 하지도 않고, 아예 선을 넘어서 문란하게 몸을 굴리고 다녔다는 쏙 빼놓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냥.. 거절해도 매번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하고, 영화 보러 가자고 하고.. 그러더라고."

"그냥 평범하게 너 좋다고 꼬시는 거네. 잘생겼어?"

"..별로. 그냥 평범해."

한동훈은 학과에서는 나름 인기가 많은 편이었지만 유혜연이 보기에는 딱 그 정도 평가밖에 해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얼굴도, 체격도, 성격도, 재력도. 어느것 하나 잘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냥 솔직한 평가였다.

"조금 의외네. 혜연이 너 정도면 남자들도 많이 꼬일 것 같았는데. 그래도 한 명 밖에 없으면 크게 피곤하지는 않겠다."

"......"

뭔가.. 기분이 나쁘다.

분명 가볍게 나누는 대화 같은데. 어째서인지 유서연의 말이 '나는 인기 많았는데, 너는 아니네?' 라고 말하는 것 같아 괜히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유독 귀찮게 구는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다는 거지. 다른 선배들도 한 번씩 뭐 하자고 와서 피곤해 죽겠어."

거짓말은 아니다.

여태껏 유혜연에게 먼저 다가와 이름을 물어보고, 번호도 달라고 하고, 대놓고 사귀자고 했던 남자만 대여섯은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들 적당히 거절하니 귀찮게 굴지는 않았는데. 유독 거절하기 애매한 방향으로 다가와서 귀찮게 구는 게 한동훈 하나일 뿐이었다.

"하긴, 혜연이도 서연 씨 닮아서 워낙 예쁘니까 남자들이 그냥 안 두긴 하겠다. 피곤하겠네."

"아하하.."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유서연을 칭찬하는 건지 모를 애매한 말에 살짝 곤란한 척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나같이 귀찮고 관심도 없는 남자들일 뿐인데. 다른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생각된다고 생각하니 어째서인지 불안하고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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