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화 > 오빠 술 못 마셔요? (1)
수업이 끝나고. 시끌시끌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 소음이 잦아들 때까지.
유혜연은 영혼 없는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하아아.."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온 건 어느 정도 사람이 빠져나가고, 다음 수업 때까지 시간 보낼 곳도 없는지 자신처럼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들만 남아 조용해진 뒤였다.
운 좋게도. 다음 수업이 갑작스럽게 휴강으로 바뀌면서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났다.
간만에 오전 수업만 받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늑장을 부리는 이유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보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인파에 치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클 정도로 지쳐 있는 탓이었다.
"혜연아."
'하아..'
그러지 말걸. 잠시 멍하니 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속으로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한동훈. 같은 학과에 한 학년 위의 선배. 그 외에는 모르고, 관심도 없는 인간이다.
"요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그냥 잠을 잘 못 자서요."
이런 인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났구나. 불편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대답하며 속으로 한탄했다.
최근에 잠을 못 자는 이유는.. 하루가 멀다하고, 매일 밤마다 자위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는 남에게는 말 못 할 이유였다.
매일 오늘은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욕구를 참지 못하고 이불 속에 틀어박혀 수십 분에서 몇 시간을 지칠 때까지 자위만 해댔다.
평생 더럽다고, 추잡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했던 행위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느껴져 피로에 이어 자괴감까지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원래 잘 못 자는 편이야?"
별 알멩이도 없는 시답잖은 질문이다.
뭐라고 할까. 그냥 딱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해 대충 내뱉는 말 같아서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귀찮기만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잠자리가 익숙하질 않은 것 같아요. 금방 괜찮아지겠죠."
"그런 거면 다행이고. 아, 밥은 먹었어? 입맛 없다고 거르면 안 되는데."
"잘 먹고 있어요."
신경 쓰지 말라고 적당히 괜찮다고 말했건만. 질리지도 않고 또 쓸데없는 질문이다.
이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는 뻔하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이렇게 대화를 유도하는 것도 짜증 났다.
"그래도 오늘은 아직 점심 안 먹었지? 같이 뭐라도 먹으러 갈래? 내가 살게."
귀찮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매일..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삼일에 한 번씩, 혹은 교양 수업이 겹칠 때마다 밥이니 영화니 드라이브니 권해오는 탓에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짜증만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성질대로 쏘아붙이고 딱 잘라 끊어내고 싶은데. 마냥 그럴 수도 없다는 게 사회생활이다.
이 인간 하나한테 밉보인다고 해서 대학 생활이 곤란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 이유도 없다.
'다들 눈이 삐었지.'
한동훈은.. 얼굴도 그럭저럭 괜찮게 생겼고,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 보인다. 거기에 집도 잘 사는 편인지 대학생 주제에 외제차도 끌고 다니며 동기나 후배들한테 밥도 잘 사준다.
거기에 성격도 시원스럽고 나름 배려심이 있는 편인 탓에 당장 자신의 동기 중에서도 한동훈에게 호감을 가진 애들이 꽤 있었다.
유혜연은.. 그냥 귀찮고 짜증 났다.
한동훈은 결국 부모한테 물려받은 돈을 물 쓰듯이 낭비하며 자랑하고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 부분에서는 자신도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알바 한 번 안 해봤을 인간이 돈으로 인간관계의 중심에 서서 자연스럽게 중심에 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자신은 저렇게 남에게 티 내고 다니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당당한 부분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오고, 급이 비슷한 집안의 아이들을 여럿 보며 자라온 유혜연은 한동훈이 아닌 척하면서도 제 잘난 맛에 취해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게 훤히 보였다.
겉으로는 매너 있는 척하면서, 항상 자신의 가슴으로 시선이 향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남자라면, 아니 같은 여자라도 자신의 가슴에 한두 번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건 이미 이해하고 있었지만 한동훈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가끔씩은 제대로 조절조차 하지 못하고 기분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 기분 나쁜 눈빛이 보일 때도 있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강의가 빨리 끝나서 언니랑 만나서 먹기로 했거든요."
카페에서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유서연과 만남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대학에서는 주에 한두 번씩은 언니와 만나 놀러 다니는 사이 좋은 동생을 연기하고 있었다.
전부 귀찮게 구는 남자들을 쳐내기 위한 설정이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밥은 다음에 먹자."
꼴에 매너 있는 척. 여유롭게 웃으며 질척대지 않는 것도 짜증 난다.
자신에게 질척대지 않는 게? 아니다. 저렇게 여유를 부리고, 다음에 또 찾아와 귀찮게 군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아무리 그래도 권해오는 걸 전부 거절할 수는 없어서 자신 말고도 여럿이 가는 자리에, 그 외에도 한두 번 같이 밥 좀 먹어줬다고 포기하질 않는 게 짜증 난단 말이다.
"네. 다음에 먹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부 다 거절하는 건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번에도 적당히 웃어주며 대화를 마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간만에 오전 수업으로 일정이 끝났으니, 지금 바로 집에 간다면 꽤 오래 잘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아, 나도 나가는 길이니까 같이 나가자."
빠직. 실제로는 들리지 않은 소리였지만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것처럼 짜증이 확 올라온다.
그래도 짜증을 내색하지 않는 건 그만큼 피곤한 와중에도 열심히 멘탈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네. 같이 가요."
열심히 만들어낸 웃음으로 대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나섰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반 발짝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같이 걷고 있는 한동훈은 별 관심도 없는 쓸데없는 얘기를 주절대느라 바쁘다.
근처 카페에 나온 이달의 메뉴가 맛있고, 무슨 감독의 새로 나온 영화가 기대되고, 곧 여름이라 바다에 한 번 놀러 가면 좋을 것 같다고 하고.. 전부 속 보이는 얘기다.
애초에 본인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꼬시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한동훈의 주변 인물들은 그가 유혜연에게 관심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고, 유혜연의 대학 친구들 역시 한동훈이 대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인식 자체가 그가 만들어낸 분위기였다.
유혜연은 인간관계를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주변 분위기가 한동훈의 귀찮은 권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때쯤에는 정색하면서 한동훈을 쳐내기엔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질 것 같은 상태였다.
네, 네. 아. 그렇구나. 그렇네요. 너무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화제를 전환하며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는 한동훈의 주절거림에 적당히 웃어주며 대답했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 택시를 잡은 뒤에야 그 귀찮은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아아.."
도대체 이걸로 몇 번째 한숨인지 모르겠다.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데. 한동훈 그 인간 때문에 더 지쳐서 한숨을 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오빠 보고 싶다..'
유서연에게서 최민석을 빼앗겠노라고 마음은 먹었지만 한 달 가까이 얼굴을 보기는커녕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다.
불러내려고 해도 뭔가 불러낼 만한 이유가 있어야 불러낼 것 아닌가.
친구들과는 별 의미도 없는 시답잖은 메세지도 잘 주고받았는데, 상대가 최민석이라고 생각하니 도무지 아무 메세지나 보낼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의미도 없는 메세지를 보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귀찮다고 생각하면? 여기서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건데?
최민석에게 보낼 만한 메세지를 하나 떠오를 때마다 꼼꼼하게 검수라도 하는 것처럼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유만 줄줄이 떠올랐다.
삐비빅-!
택시에서 내리고, 오피스텔에 돌아와 문을 닫아 삐빅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최민석에 대한 생각만 떠올렸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둘걸.'
겨우 하루 본 게 전부라 이대로 가면 최민석의 얼굴도 잊어버릴 것 같다.
아마 틈날 때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최민석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진작 잊어버렸을 것이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상상만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질 않는다. 직접 눈으로 선명하게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최민석은 프로필 사진마저 파란 배경의 기본 프로필이었고, 유서연도 연인이라고 한 주제에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이 왠 이상한 목걸이를 들고 있는 걸 프로필 사진으로 해놨다.
"......"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돈이라면 썩어나고, 비싸 보이는 악세사리도 여럿 끼고 다녔던 유서연이 그렇게 비싸보이지도 않는, 심플한 디자인의 목걸이와 반지를 프로필로 해둔 이유쯤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씨이.."
괜히 또 서러운 기분이 올라와 가방을 대충 현관 옆에 던져 놓고 터덜터덜 침실로 들어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눕고 이불을 덮어썼다.
이제 첫날 처럼 서럽게 울어댈 정도는 아니다.
이미 목걸이에 대한 생각도 몇 번씩 떠올리며 비참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사라진 비참한 부분까지 전부 다 성욕으로 옮겨진 것 같다.
"하아아.."
입 안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습하고 뜨겁다. 이불을 덮어쓰고 있어서? 아직 이불 안으로 들어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애초에 뜨거운 건 숨결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그랬다.
마치 감기라도 나는 것처럼 덥고 뜨겁다. 동시에 가슴이 아닌 배 안쪽에 심장이 생긴 것처럼 쿵쿵 울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제는 이 뜨거운 열기가 자신의 성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하지만 최민석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평생 자위를 해본 횟수가 단 한 번에 불과했던 유혜연으로서는 아무리 겪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냥 무시하기에는 아무리 참아도 이 펄펄 끓는 듯한 열기가 가라앉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최장 한 시간 반. 어떻게든 의식을 다른 데로 돌리고, 찬물을 맞으며 샤워까지 해가며 참아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성욕에 져버린 뒤로는 유혜연의 의지도 한풀 꺾여 이전보다 더 참아내는 게 힘들어졌다.
'..그래도 잘 시간은 충분하니까.'
점심도 먹지 않고 집에 돌아온 덕분에 평소보다 네다섯 시간은 더 여유가 있다.
성욕이 가라앉을 때까지 자위한 뒤에도 푹 잘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적당히 핑곗거리를 떠올리며 치마와 함께 속옷을 벗어버리려는 순간.
까똑!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려오는 알림음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켜 이불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 하아.."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옆에 던져뒀던 핸드폰을 확인했고.
"어..?"
'유서연'이라는 세 글자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