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 여동생은 언니를 이길 수 없다 (2)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너 말이야. 예전 같았으면 그냥 앞뒤 안 가리고 이르고 봤을 텐데. 못 본 사이에 변했나 싶어서."
아니다.
지금도 최민석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아버지한테 연락해 유서연의 잘못을 일러바쳤을 것이다. 물론, 유서연에게는 밝힐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했잖아. 아버지랑 어머니가 걱정돼서.."
"그게 변했다는 거지. 예전에는 그런 거 신경도 안 썼잖아. 어머니가 말리시는데도 계속 나한테 막 신경질 내고 그랬었으니까."
"그런.. 가..?"
얼핏 들으면 칭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부모님 심정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는 망나니였다는 말이라 괜히 입맛이 썼다.
분명 표정이나 말투로 봐서는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인데, 어째서인지 그 한마디 한마디가 신경을 긁어댔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도 예전에는 속 좀 썩여서 할 말 없는 입장이잖아.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되는 거지."
"으응.. 그렇지."
도대체 얼마나 뻔뻔해야 저렇게 태연스러운 얼굴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듣고 보니 자신도 분명 부모님 눈치 안 보고 유서연에게 시비를 걸어대며 속을 썩이긴 했지만 유서연은 아예 정도가 다르지 않은가.
여러모로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유서연을 조금이라도 안심시켜놔야 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아무튼, 네가 비밀로 해준다니까 나도 안심이 되네. 사실 조금 걱정하고 있었거든. 고마워."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살면서 유서연이라는 인간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나? 잠시 고민해봤지만 떠오르지 않는다.
유서연 입장에서는 고마워해야 할 일이 맞았으니 감사 인사를 했을 뿐이지만, 왠지 놀림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 있어? 용돈이라도 줄까?"
"..됐어."
용돈은 무슨.
생활비는 집에서 부족하지 않게 보내주기로 했으니 괜히 유서연에게 뭔가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뭐.. 더 용건 없으면 난 가볼게."
"어, 어?"
"어차피 별로 할 얘기도 없잖아? 나도 빨리 들어가고 싶기도 하고."
"아니, 잠깐만!"
"응?"
아무 미련 없는 표정으로 의자를 뒤로 빼는 유서연을 다급하게 붙잡아 세웠다.
아직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는데 벌써 보낼 수는 없다.
유서연이 내숭을 그만두고 원래 성격을 드러내거나 자기 과거를 스스로 입에 담게 하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 나온 말들은 전부 트집 잡을 거리가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부모님에게 최민석을 제대로 소개하고 설득하겠다거나 잘생기고 착하다는 칭찬까지 해댔으니 유서연의 이미지만 좋아질 만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뭐라도 얻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붙잡아 세우기는 했는데, 막상 붙잡을 만한 거리를 떠올릴 수가..
"..민석 오빠 얘기 좀 더 해줘."
왜? 모르겠다.
그냥 갑자기 떠오른 말을 아무런 사고도 거치지 않고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래..?"
그래도 유서연이 일어나지 못하게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뒤로 빼내던 의자를 다시 당겨 앉은 유서연이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유혜연과 눈을 마주쳤다.
"애기.. 아니, 민석 씨한테는 별로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 뭐.. 그냥 궁금해서. 언니.. 가 이렇게 제대로 사귀겠다고 한 사람은 처음이잖아."
아직도 유서연을 언니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다. 거기다 이렇게 유서연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것도 조금 짜증 났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 나도 솔직히 내가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 우리 얘기는 어디까지 들었어?"
"직장에서 언니한테 괴롭힘당하다가 어찌어찌 사귀게 됐다고만.."
"진짜 최소한으로 설명했네. 애기답긴 하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제는 이 기분 나쁜 감정이 질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별거 아니야. 나도 한창 스트레스받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때 애기가 신입으로 들어왔었고, 나야 만만한 상대가 생겼다 싶어서 쉬지도 못하게 일을 엄청 떠넘기면서 괴롭혔었지."
당시에 유서연이 아예 괴롭힐 상대를 골라서 뽑고 퇴사할 때까지 괴롭히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일은 유혜연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일인가? 하고 잠시 잊고 있었던 유서연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애기도 엄청 미련해서 그걸 말 한마디 없이 시키는 대로 다 하더라고. 분명 부당한 일인 건 자기도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 최민석의 가정 사정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없이 가족과 연락을 끊고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으니 돈 때문이라도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괜히 짜증만 났었는데. 보다 보니까 점점 신기하고 신경 쓰이더라고. 그래도 이만하면 화낼 만하지 않나? 아직도 화 안 내나? 하면서 점점 심하게 괴롭히다가.."
"......"
아직 몇 마디 듣지도 않았는데.
유서연의 인성과는 별개로 뒷이야기가 궁금해져 말없이 이야기에 집중했다.
"내가 먼저 화를 냈지. 시간상 더 일을 시킬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까지 해도 화를 안 내니까 화내는 모습은 어떻게 한번 보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어서 그냥 휴게실에 불러다가 별 의미도 없는 얘기로 막 갈궈댔어."
그런데 왜 사귀게 됐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는 최민석이 유서연을 혐오하면 했지, 좋아하고 사귀게 될 이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도 별 반응이 없다 보니까 너무 열이 올라서 뭐라고 했는지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지쳐서 헉헉대고 얼굴도 빨개져 있으니까 갑자기 괜찮냐고 물어보고는 종이컵에 얼음물 한 잔 따라서 가져다주더라고. 거기서 내가 완전히 항복해버렸지."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처음에 최민석을 괴롭혔다는 것과 어디까지 가나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점점 심하게 괴롭혔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부 유서연이 대충 지어낸 얘기에 불과했지만 유혜연이 가지고 있는 최민석의 착하고 성실한 성격과 너무 어울리는 이야기라 의심보다는 흥미가 더 동했다.
"..거기서 반했다는 거야?"
"아마 그럴걸?"
"뭐야, 왜 말이 애매해?"
"원래 사랑이 다 그런 거란다."
마치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듯 가볍게 말하는 태도에 다시 한번 짜증이 울컥 올라왔지만 곧바로 유서연의 말이 이어지자 반사적으로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 뒤에는 뭐.. 내 쪽에서 퇴근하고 술이나 하자고 꼬시니까 그것도 거절 안 하고 따라오더라고. 괴롭히는 건 진작에 그만뒀고,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사과도 했고. 그렇게 몇 번 더 술 마시다가.. 뭐.."
"또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애들한테 들려주기엔 조금 그런 부분이거든."
"윽..!"
같은 여자임에도 야하다고 느껴지는 은근한 눈빛과 함께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이듯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순간 유혜연의 얼굴이 확 달아올라 새빨갛게 물들었다.
"더, 더럽게 진짜..!"
"얘는. 더럽긴 뭐가 더럽니? 사귀는 사이에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 너도 애인 생기면 다 할 일인데. 아직은 너무 일렀니?"
"이익..! 난 결혼하기 전엔 안 할 거거든!?"
유서연이 계속해서 자신을 애 취급하는 탓에 자기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고 급하게 떠올린 반박을 내뱉었다.
하지만 유서연은 그마저도 가볍게 받아넘겼다.
"아아. 혼전순결? 남친 될 사람 누군지는 몰라도 많이 힘들겠네."
"뭐, 뭐가 힘들어!?"
발끈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앞서가는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유서연을 밀어내고 최민석과 사귀게 된다면. 최소한 유서연보다 못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힘들지. 여자친구가 혼전순결이라면서 한 번도 안 해주면 얼마나 힘들겠니? 보통은 힘든 걸로 안 끝나고 정떨어져서 헤어지거나 바람피거나 둘 중 하나일걸?"
"흥. 난 또 뭐라고. 난 그런 남자는.."
"안 만날 거라고? 하아. 동생아. 언니가 진짜 걱정돼서 해주는 충고니까 잘 들으렴. 성욕이 적은 남자는 있어도 없는 남자는 없어. 괜히 성욕이 식욕, 수면 욕구랑 같이 삼대 욕구로 불리는 게 아니거든."
"......"
이번에는 아까 이상으로 더 노골적으로 어린애 취급하는 말투였지만, 어째서인지 유서연에게서 느껴지는 정체 모를 분위기에 압도당해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말을 경청했다.
"성욕은 네가 생각하는 더럽고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생물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본능이야. 성욕이 없는 남자? 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우린 그걸 비정상이라고 불러. 왜? 사람이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욕구가 없으니까."
"그, 그래도..!"
"그래도 사랑만 있으면 결혼은 할 수 있지. 그런데, 성욕이 없던 남자가 결혼만 하면 없던 성욕이 생길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지. 결혼하고 나서도 그 사람은 너랑 뭘 해볼 마음이 없겠지. 너한테 성욕을 못 느끼니까. 네가 하자고 하면 남편이니까 어쩔 수 없이,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이 해주긴 하겠지.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니?"
"......"
유서연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늘어놓는 말들. 그 한마디 한마디가 유혜연으로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들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애초에 연애, 결혼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성욕은 그냥 더러운 욕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상대가 생긴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착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네가 좋아하게 될 상대도 너랑 똑같은 생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진심으로 하는 충고야.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이 있고, 그걸 드러내지 않는 건 그냥 상대를 배려하고 있을 뿐이니까."
"..오빠도."
"응?"
"민석 오빠도 그래..?"
네가 좋아하게 될 상대. 그 말을 들은 순간 도저히 이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매 사이라고는 해도 묻기에는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유서연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오히려.. 내색만 안 할 뿐이지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더한 편이지."
"어, 어떤데..?"
유혜연이 마지막 선을 넘은 순간. 유서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며 엷은 웃음을 지어냈고. 자연스럽게 웃음기를 이어 나가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