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화 > 여동생은 언니를 이길 수 없다 (1)
이번 설에는 해외여행 때문에 보지 못했고, 저번 추석, 설, 저저번 추석 때는 유서연 쪽에서 집에 오지 않아 마주칠 일이 없었다.
덕분에 서로 얼굴을 보는 것도 2년 만에 있는 일이었지만 기대된다거나 하는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사이좋은 자매 관계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민석 오빠만 아니었으면..'
유서연 같은 인간. 2년이 아니라 평생을 안 봐도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더러운 연기에 완전히 넘어간 최민석을 돕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다.
약속 장소인 아파트 단지 앞 카페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준비해 놓고 말없이 카페 입구를 노려봤다.
유서연이 내숭 떨고 있다는 증거를 만들어내도 이미지 문제상 이걸 최민석에게 직접 전달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얘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뭐가 됐든 쓸 수 있는 수단은 많을수록 좋았다.
'잘 될까?'
마음은 먹었지만, 이런 일을 해보는 건 처음인 탓에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자신이 아니면 최민석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본래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유서연이 차지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떻게든 빼앗겠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교묘하게 최민석을 위해서라고 합리화를 마쳐둔 상태였기에 스스로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다.
딸랑-.
깨끗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리고, 눈에 확 띄는 흑백의 오피스 정장 차림의 미인이 안으로 들어온 순간 유혜연의 눈썹이 희미하게 치켜 올라갔다.
'..마음에 안 들어.'
평균보다 작은 키가 콤플렉스인 유혜연이었기에 유서연의 큰 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170이 넘는 여자들도 많아지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아직 유서연 정도의 키면 여자들 사이에서는 큰 편에 속했다.
원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최민석을 사이에 두고 경쟁해야 하는 사이가 된 탓에 예전 이상으로 마음에 들지 않게 됐다.
하지만 유서연의 키에 대한 질투심을 떠올린 것도 잠시. 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문제를 발견한 유혜연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카페로 들어와 내부를 휙 둘러보는 유서연과 눈이 마주쳤다.
유혜연을 발견한 유혜연은 가벼운 걸음으로 유혜연을 향해 걸어온다. 그럴 때마다.
타이트하게 조인 정장 위로도 압도적인 불륨감이 느껴지는 커다란 가슴이 걸음에 맞춰 작게 흔들리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원래부터 저렇게 컸었나? 아니다. 분명 유서연의 가슴은 자신과 비슷한 정도에 불과했고, 내심 체구가 작은 만큼 컵 사이즈로 따진다면 자신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착각할 리가 없었다.
그럼, 이미 가진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보정 속옷이라도 입은 걸까? 아니면 수술이라도 했나?
'더러워 진짜..'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쁜 건 마찬가지다.
저 쓸데없이 가슴이 눈에 띄는 옷차림으로 최민석을 유혹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미칠 것 같았다.
"후우.."
'진정하자.'
짧게 한숨을 쉬며 속에서 끓어올라 머리 위로 올라오는 열기를 내보내고, 마음을 다잡으며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러 주머니에 넣었다.
그사이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유서연이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오랜만이네. 오래 기다렸어?"
"읏..!?"
맞은편에 앉은 유서연과 제대로 눈을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흠칫 움츠렸다.
'무슨 눈이..!'
분명 같은 여자끼리인데.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을 마주친 순간 어째서인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버렸다.
뭔가.. 최민석과 비슷한 느낌의 빠져들 것 같은 눈빛. 그렇게 생각해버린 순간 유혜연은 이를 꽉 다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덕분에 그런 자신을 잠시 훑어보다가, 살짝 비웃듯 웃음을 흘린 유서연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얼마 안 기다렸어."
"그럼 다행이네. 오는 길에 차가 조금 막혔거든. 그래서,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유서연은 근황을 묻는다던가 하는 사소한 잡담조차 없이 용건부터 물었다.
서로 길게 얘기해봤자 좋게 분위기가 좋아질 일은 없으니까. 자신이 유서연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한 뒤부터 유서연은 항상 이런 태도를 고수해왔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하나라도 더 말을 많이 꺼내게 하고 싶었기에 이마저도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 친구랑 동거하고 있다면서?"
"응. 그런데?"
"..하."
그런데?
그렇게 크게 잘못을 저지르고,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사고를 쳐서 이렇게 타지까지 와서 지내게 된 주제에 이 당당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반성하는 모습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눈치껏 얌전히 지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인간을 믿고 또 속아 기회를 준 아버지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아버지랑 어머니는 아셔?"
"아직 모르셔. 조만간 제대로 소개시켜 드리려야지."
"뭐..?"
마음을 다잡은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유서연의 당당한 대답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기가 여기서 몰래 남자 친구를 사귀고, 동거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걸까?
생각 없이 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멍청하기까지 했나?
'아니, 그것보다..'
안 된다.
유서연의 동거 사실이 알려져서 부모님에 혼이 나든 의절을 당하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유서연과 동거 중인 애인이 최민석이라는 걸 알려지는 건 곤란했다.
유혜연의 목표는 단순히 유서연과 최민석을 헤어지게 만드는 게 아닌 유서연에게 최민석을 빼앗아 자신과 사귀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새로 남자 친구를, 결혼 상대를 구해 부모님에게 소개시켜 드렸는데 그 상대가 언니의 헤어진 전 남자 친구라면?
유혜연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테고, 가족 관계를 알면서도 자매와 쌍으로 사귄 최민석 역시 절대 좋은 시선을 받지 못 할 것이다.
낮에 최민석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 문제였다.
"미쳤어?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는 절대 그냥 안 넘어가실 텐데."
"감수해야지. 어떻게든 설득도 해 보고. 그래도 우리 애기 덕분에 정신 차렸다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도 마냥 무시 못 하실 거야."
"하..?"
방금 뭐라고 그랬지? 애기?
지금 유서연이 내뱉은 말도 자신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보다 유서연이 최민석을 부르는 호칭 쪽이 거슬려 그쪽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애기?"
"아,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한가? 민석이 말이야. 나보다 어리기도 하고, 귀여워서 가끔 나도 모르게 애기라고 부르거든."
최민석이 들었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발언이었지만 지금 듣는 사람은 유혜연 한 명뿐이었기에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반대로, 유혜연에게는 아주 효과가 확실한 도발이었다.
"......"
"어머.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안 좋니?"
화는 나는데 어지간하게 이성이 남아 화도 못 내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가장 이상적으로 열 받는 상태가 돼버린 유혜연의 어깨가 분노와 질투로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러는 와중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안색을 살피며 걱정하는 유서연의 태도에 분노의 불길이 한층 더 거세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빠득. 유서연에게 들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껏 이를 간 부글부글 끓는 속을 최대한 억누르고,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며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그보다, 아버지랑 어머니한테 알리는 건 조금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왜?"
"그야.. 아직 어떻게 반응하실지 모르잖아. 이왕 정신 차렸다고 설득할 거면, 제대로 아버지한테 보여드릴 만한 결과는 내놓고 이 사람 덕분에 정신 차리고 열심히 했다는 식으로 말씀드리는 게 낫잖아."
확실히 그게 훨씬 나은 방법이다.
문제가 있다면 유혜연 자신이 아닌 유서연에게 훨씬 나은 방법이라는 거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유서연을 말려야 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그래도 지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
"무슨, 아니, 왜?"
지금 본인과 최민석의 관계를 부모님한테 알려서 득 될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나? 아무리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봐도 유서연에게 좋은 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거야.. 혜연이 네가 알았잖아. 어차피 알게 되실 텐데. 내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밝히고 진심으로 설득해보는 게 나을 것 같거든."
"......"
논리적으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으니 자연스럽게 입이 다물어진다.
자신은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자신의 속내를 모르는 유서연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확실히 자기 쪽에서 직접 밝히고 제대로 설득하는 게 제일 좋은 행동이었다.
분명 분하고 화는 나는데, 그걸 표출하는 순간 지는 게 된다. 유서연에게도 항상 일방적으로 욕하기만 했지, 평생 남과 싸울 일 자체가 거의 없던 유혜연은 이런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속이 터질 것 같은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내야 했다.
"..아니야. 말 안 할게."
"뭐? 괜찮겠어? 너까지 아버지 어머니한테 거짓말하게 되는 건데."
"그냥..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지금 알게 되시면 얼마나 속상해하시겠어. 그럴 거면 아예 언니가 정말로 변했다는 거랑 민석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제대로 보여드리는 게 낫지."
"..오빠?"
이번에는 유서연 쪽에서 유혜연이 부르는 호칭에 반응했다.
"아, 응. 아까 낮에 만났을 때 같이 밥도 먹었거든. 먹으면서 이것저것 얘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기로 하면서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어."
"흐응.."
나름대로 억눌려 있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오늘 낮에 있었던 최민석과의 일화를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유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화내는 건가..?'
화낸다기 보다는 뭔가가 살짝 걸린다는 듯한 미묘한 반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곧바로 유서연의 표정이 풀어지며 기분 좋은 웃음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니 다행이네. 적어도 네 마음에는 들었다는 거지? 하긴, 우리 애기 인상이 보통 좋아야지. 얼굴도 엄청 잘생겼고, 성격도 조금 답답하긴 해도 착하잖아. 그렇지?"
"어, 응.. 그렇.. 더라.."
잠시 좋아졌던 기분 이상으로 질투와 분노가 빠르게 끓어올라 뭐라도 집어 던지고, 빽빽 소리지르며 오만가지 욕을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
평생 이렇게 화가 났던 적이 있었던가?
갑작스럽게 다니는 학원이 늘어나고, 주말마저도 빼앗기며 힘든 일상을 보내게 되면서 유서연을 원망했던 때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유서연의 염장질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