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 완전 꼬마 유서연인데? (5)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세요?"
"지금도 언니랑 일하고 있는 거예요?"
"대학은.."
유혜연은 마치 면접이라도 보는 것처럼 최민석의 신상 명세를 줄줄이 캐물었지만, 최민석은 조금의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유혜연의 질문에 대답했다.
언니의 동생이니까.
여자 친구의 가족이 남자 친구의 신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 아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유서연의 동생임을 이용해 편의를 얻고 있다는 상황 역시, 최민석을 돕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불쾌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학대나 다름없을 정도로 부모에게 방치당하며 살았고, 군대에서 전역한 뒤에는 부모와 완전히 연락을 끊고 혼자 산다는 최민석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월세 보증금을 낼 돈도 없어서 좁은 고시원 단칸방에서 지냈고, 지금은 조금 넓어진 오피스텔에서 지내게 됐지만 일을 하다 발목을 다쳐 일을 그만두게 됐고, 최근에야 몸이 다 나아서 다시 일자리를 찾는 중이라는 얘기까지 들은 유혜연은 미안한 마음에 축 처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아니야.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냥 내 개인적인 얘긴데."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얼굴로 자신의 사과를 받아넘기는 최민석의 모습에 다시 한번 두근거린다.
최민석이 가족 관계가 나쁘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데다가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 그런 건 유혜연에게 있어 아무런 감점 요소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키워온 언니에 대한 반감 탓에 괜히 돈 많고 잘 산다고 거들먹대는 사람보다는 저렇게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모습이 더 좋게 느껴졌다.
"그럼 혹시, 언니한테 도움을.."
"그런 건 아니야."
최민석의 사연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입에 담은 순간. 최민석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서연 씨랑은 정말 순수하게 사귀는 사이야."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얼핏 보면 화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단호한 최민석의 태도에 유혜연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유혜연의 모습에 굳어있던 최민석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래도.. 그런 얘기가 없던 건 아니야."
"네..?"
"서연 씨도 내 사정은 다 알고 있으니까.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조금 그렇잖아. 내가 돈 때문에 서연 씨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 스스로한테는 떳떳하고 싶었거든."
"아.."
"그래서 잘 들어가지도 않는 오피스텔 월세도 계속 내는 거고, 지금 타고 온 차도 서연 씨랑 데이트할 때만 타고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최민석이 즉석에서 지어낸 얘기에 불과했지만, 최민석이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유혜연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최민석의 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였다.
"죄송해요. 제가 잘 모르고.."
"괜찮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얘기였으니까."
최민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을 때는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는데. 다시 가볍게 웃어주니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쿵 뛰어댔다.
첫눈에 반한 상대가 이렇게 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하다니.
유서연과 사귀는 사이만 아니었다면, 나와 먼저 만나서, 나와 먼저 사귀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꺼먼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요리가 나온 뒤에는 좋아하는 음식이나 재밌게 봤던 영화 같은 가벼운 주제로 얘기를 주고받았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바래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최민석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하아아.."
스스로도 도저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짜증 나.."
왜.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서연이란 말인가.
유서연의 얘기를 하면서 즐거운 듯이 웃는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짜증과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다.
이건 질투다. 자신이 유서연 따위에게 질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존심 상했지만 그 외에는 이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안 되겠어."
이미 마음속으로 반쯤 결심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유서연과 최민석을 헤어지게 만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생각하며 최민석의 연락처가 등록된 핸드폰을 켜고, 최민석이 아닌 다른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가 연결됐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친언니. 유서연의 것이었다.
지난 설을 제외하면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눴던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상대답게 안부 인사도 없이 대뜸 용건부터 묻는다.
"오늘 이쪽으로 이사 와서. 아버지가 인사는 해두라고 하셨거든."
[그래? 알았어. 아버지한테는 잘 말해둘게. 그럼 끊는다?]
유서연 역시 자신이 아버지만 시킨 일만 아니었다면 근처가 아니라 옆집으로 이사를 왔어도 인사 같은 걸 하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덕분에 길게 말하지 않고 짧게 끝내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오늘은 그래서는 곤란했다.
"잠깐만."
[왜? 또 무슨 일 있어?]
"직접 만나서 얘기 좀 해."
[..평소에는 통화하는 것도 싫어하더니. 정말 무슨 일 있니?]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걱정이 아닌 가벼운 놀라움이었다.
스스로가 말하면서도 어색하고 불편해 죽겠을 지경이었으니 유서연이 이렇게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됐으니까, 만나서 얘기해. 언제 시간 돼?"
[..지금 바로는 무리고, 저녁에 일 끝나고 부를 테니까 그때 나와.]
"..알았어."
언제, 어디로. 그런 얘기는 오가지도 않았지만 이건 약속도 없이 갑자기 만나자고 억지를 부린 자신이 원인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지고 노는 거기만 해봐."
유혜연은 상대가 유서연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혹시 모를 마지막 가능성을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
통화가 끊긴 걸 확인한 유서연은 동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동생이, 유혜연이 갑자기 자신의 집에 찾아온 이유는 알았다.
이사야 뭐, 대학이 이 근처라고 했으니 대학 통학 문제 때문에 오게 된 걸 테고. 뜬금없이 인사를 하러 온 건 아버지나 어머니가 시켜서 억지로 하러 온 거겠지.
하지만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이유는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아니, 짚이는 건 있지만 그게 왜 자신과 이어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주인님을 위한 선물. 고급 마사지 샵의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직원들은 다른 가게를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직접 엄선해 최면을 걸어 섭외를 끝마쳤고, 그들이 관리하는 손님들에게도 넌지시 소식을 전하도록 해놨다.
건물 인테리어도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조만간 손님을 받게 될 예정이었기에 직원들과 세부적인 계약을 조정해나가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걸어둔 최면을 보강하고 관리하는 중이라 대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유혜연의 행동이 최민석과 관계가 있을 게 뻔했으니 최민석에게 제대로 확인받는 게 먼저였지만.
[유서연 : 주인님.]
[최민석 : 어. 왜?]
[유서연 : 혜연이랑 무슨 일 있으셨나요? 평소면 절대 저랑 만나려고 안 하는 앤데 갑자기 저한테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최민석 : 그래? 별건 아니고. 걔가 나한테 반한 것 같더라고.]
"음..?"
유혜연이야 자신을 닮아서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으니 최민석이 관심을 가질 거라는 것 정도는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대답이 나오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고.
"..아아."
이어지는 최민석의 설명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납득했다.
이지은이라고 했었던가. 실제로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상대였지만 최근에 그런 경우가 있었던 걸 알고 있었기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다음에 이어진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최민석 : 그래서 상황을 좀 지켜봤더니, 너한테 날 뺏어갈 생각인가 보더라고.]
"..하?"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유혜연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자신에게서 최민석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는걸.
애초에 자신이 최민석의 소유물이었으니 빼앗는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뭐가 됐든 간에 유혜연이 노예가 되면 됐지, 최민석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들지 않는 거다.
스스로 벌인 일들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피해를 봤다는 것 역시 이해하고 있기에 동생이 자신을 혐오하는 태도에는 불만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마음대로 하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과, 자신에게 피해를 주려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최민석을, 주인님을 빼앗아 가겠다?
아무리 현실성 없는 일이라고 해도 불쾌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유서연 :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우선은, 최민석의 의사를 먼저 확인했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도, 최민석이 동생과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다면 다 참고 그렇게 해야 했으니까.
다행히도, 최민석은 유서연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최민석 : 걔는 지금 내가 너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어. 네가 원래 성격을 숨기고 엄청 내숭 떨어서 내가 반한 거라고 최면을 걸어놨거든. 지금 우리 둘이 동거 중이라고 알고 있고. 그러니까 적당히 질투심에 부채질만 해놔. 그럼 자기 쪽에서 뭐라도 하겠지.]
[유서연 : 그렇게 할게요]
"..아하하."
최민석의 메세지를 읽고, 답장을 하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최민석과 함께 보내는 생활은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물류팀에 갇혀 지낼 때를 생각하면 스스로 최민석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며 예전보다 생기 있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임예진이나 김민아처럼 같은 처지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공유할 수 있는 친한 이들도 생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감히 언니의 것을 뺏으려 드는 동생을 혼내줄 생각에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