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2화 > 완전 꼬마 유서연인데? (4)
유서연의 집에서 나와 최민석과 차를 타고 단지를 나섰다.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는 심장이 아플 정도로 쿵쿵 뛰어대서 미치는 줄 알았고,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이상해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민석이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덕분에 그 옆모습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어떡해.. 너무 잘생겼어..'
유혜연이라고 잘생긴 남자와 연이 없던 건 아니다.
미성년자일 때는 여중, 여고를 나와 남자와 엮일 일은 없었지만 대학에 들어온 뒤로는 잘생긴 남자들에게 대쉬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유서연이 그랬듯이, 유혜연 역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혜연은 언니의 영향으로 가벼운 연애 관계에 대해 혐오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다가오는 남자들은 전부 철벽 수준으로 밀어내 연락처 교환 한 번 해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얘기까지 꺼낼 필요도 없이 TV만 틀면, 핸드폰으로 유튜브만 들어가도 잘생긴 남자가 화면에 나오는 세상이 아닌가.
하지만 최민석의 외모는 유혜연이 봐온 그 어떤 남자들보다도 매혹적이었다.
정말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잘생겼냐고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어째서인지 눈만 마주쳐도,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쿵쿵 뛰어대게 만드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빛.. 눈빛이 뭔가 너무..'
섹시하다.
이런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 아니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그 외에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 외에도 훤칠하니 넓게 벌어진 어깨와 큰 키는 남자답고 듬직해 보였고, 피부도 잡티 하나 없이 희고 깨끗하고.. 그냥 눈에 보이는 최민석의 모든 것이 자신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쾌하기도 했다.
유서연.
말이 언니일 뿐이지, 유혜연은 예전부터 유서연을 가족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문란하고 생각 없는 여자를 왜 존중해줘야 한단 말인가. 가감 없이 말하자면, 유서연이 자신이 언니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짜 증났다.
대학 때문에 근처에 이사 오게 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인사는 하고 오라는 부모님의 말이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 웃기는 소리지.'
어떻게 아버지를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뒤에서 몰래 남자나 만나고 있는 것부터가 유서연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런 주제에 보는 눈은 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민석이 유서연과 사귀고 있다는 것도, 자신과 유서연의 남자 보는 눈이 비슷하다는 것도 말이다.
'거기다 동거라니..'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남녀의 동거가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거기에 유서연의 문란한 성격을 생각하면 확실하다고 해도 좋겠지만.. 그 뒤는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빼앗겼다.
앞뒤 상황만 놓고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논리가 아닌 유서연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 탓에 자꾸 유서연에게 최민석을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어 더더욱 불쾌했다.
아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 최민석이 있긴 했지만 무조건 두 사람이 동거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지 않은가.
"저기.."
"네?"
"언니랑은.. 같이 살고 있는 건가요?"
"아.. 네. 원래는 제대로 허락받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따로 살려고 했었는데, 서연 씨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했고, 여자 혼자 살다 보니 무서울 때도 있어서 같이 지내 달라고 했거든요. 제집이 따로 있기는 한데, 사실 같이 사는 거나 다름없죠."
"그렇구나.."
혹시 모른다는 희망은 멋쩍은 듯 변명처럼 돌아온 대답에 무참히 짓밟혔다.
최민석이 운전하느라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보기 좋은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망할 년. 걸레 같은 년. 콱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더는 나빠질 수 없을 줄 알았던 유서연에 대한 감정이 더 나빠졌다.
그리고 동시에 유서연에게서 최민석을 빼앗고 싶다는 욕심이 더욱 커져갔다.
도대체 어떻게 내숭을 떨었는지는 몰라도 최민석은 유서연에게 완전히 속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착실하고 예의 바른 태도의 남자가 유서연 같은 여자랑 사귈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내숭 떨고 있다는 것만 다 까발려도 쉬운 일인데..'
유서연의 과거를 다 알고도 유서연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기본적인 상식만 있어도 유서연을 더럽다고 여길 것이고, 조금 더 심하면 속았다고 유서연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유서연의 내숭을 까발리는 과정이었다.
'일단 내 입으로 얘기하는 건 절대 안 돼.'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가족의 안 좋은 과거를 함부로 까발리는 여자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거기에 딱히 증거랄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 유서연이 오해라고, 동생이 자기를 싫어해서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유혜연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일이었으니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도 안돼.'
뭐가 됐든 부모님을 움직이는 것 역시 자신의 개입이 필요한 일이었고, 가족의 안 좋은 과거를 까발리는 일에 동의하실 리도 없었다.
물론 유서연이 몰래 남자와 동거까지 하고 있다는 건 큰일이었으니 밝히면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민석과 그러지 않기로 약속까지 한 시점에서 몰래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전달한다면 의심받는 건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뭐가 됐든, 증거가 필요해.'
유서연의 과거를 밝힐 수 있는 증거. 아니면, 최소한 유서연이 본래 성격을 감추고 내숭을 떨고 있다는 증거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최민석의 콩깍지를 벗겨낼 수 없다.
'아니면..'
아예 정공법으로 뺏어버릴 수는 없을까?
솔직히 말하면 외모에는 자신 있다. 여태는 남자들의 시선 탓에 불쾌하기만 했던 커다란 가슴은 유서연에게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평균보다 확실하게 작은 키는 유혜연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지만 유서연의 귀여운 면.. 에 빠진 최민석의 취향을 생각한다면 작은 키 역시 무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빠가 바람을 필 것 같지는 않지만..'
오늘 처음 만난, 그것도 잠깐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무례하게 굴고 짜증까지 낸 나이까지 어린 상대에게 아직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며 예의를 차리고 있는 남자가 바람 같은 걸 필까?
그것도 사소한 얘기조차도 애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라며 함부로 얘기하지 않으려는 남자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유혜연은 그 예의 바르고 고지식한 면이 더더욱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으니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세상일이 전부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같이 술이라도 먹다가 실수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유서연 몰래 최민석과 술을 마실 수 있나?
불러낼 구실 정도는 얼마든지 있다.
오늘 막 이쪽으로 이사 와서 아는 사람도 없고,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집으로 부르거나, 고민 좀 들어줄 수 있냐며 불러낸다면 이 착한 남자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나와줄 것이다.
유서연에게는 비밀로.. 아마 언니한테 말하기는 조금 창피하다는 이유를 덧붙인다면 보안 문제 역시 쉽게 해결되겠지.
'어차피 오빠는 그 인간한테 속고 있는 거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최민석을 도와준다고 생각해도 좋을 일이었다.
최민석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냉면집으로 차를 몰고 가는 사이, 유혜연은 유서연에게서 최민석을 빼앗기 위한 계획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
냉면집에 도착하고, 최민석이 주문을 넣은 뒤에 유혜연은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오빠."
"네?"
"말.. 편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나이도 제가 어린데 존댓말 들으려니까 뭔가 어색해서요."
먼저 다른 얘기를 꺼내려다가, 최민석의 존댓말이 거슬리게 느껴져 살짝 방향을 틀었다.
"그래도 처음 만난 사이에 바로 말을 놓는 건 조금.."
"어차피 언니 남자 친구면 저랑도 가족 같은 사이인데요. 뭘. 언니랑 결혼한 뒤에도 저한테 존댓말 쓸 거예요?"
"그러는 게 맞지 않을까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고, 처가 사람한테 어리다고 함부로 말 놓고 그럴 순 없잖아요."
"어..?"
속에서 열불이 나는 걸 참아가며 유서연의 남자 친구라고, 결혼까지 할 거 아니냐고 말하면서 밑밥을 깔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최민석의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실제로 최민석은 그냥 유혜연의 반응이 재밌어서 가볍게 장난만 쳤을 뿐이었지만 우선 거리감부터 좁히겠다는 첫 계획부터 틀어막힌 유혜연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요. 오빠 쪽에서 멋대로 말을 놓는 것도 아니고, 제가 편하게 해달라고 하는 건데 괜찮잖아요. 가족끼리 꼬박꼬박 존댓말 쓰는 것도 너무 거리 두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요."
"으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짜낸 대답에 최민석이 살짝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았다.
"그냥 말 편하게 해주세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네?"
"그럼.. 그럴까..?"
"아.."
기분 좋다.
그냥 존댓말이 반말로 바뀌었을 뿐인데. 최민석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네. 편하게 해주세요. 아, 번호도 알려주실래요?"
이번에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잠금을 푼 핸드폰을 최민석에게 내밀며 말했다.
"번호?"
"네. 오늘 이사 와서 근처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거든요. 근처에 아는 사람 연락처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언니 남자 친구 분이면 믿을 수 있기도 하고요."
"그럼 뭐.."
애초에 최민석이 핸드폰을 받아든 시점에서 번호 정도는 등록해줬겠지만 나중을 위해 미리 이유를 덧붙였다.
핸드폰을 받아든 최민석이 화면을 터치해 번호를 눌렀고, 통화 버튼을 눌러 자기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가 끊었다.
최민석 역시 자신의 번호를 등록한 것이다.
"네 번호도 등록해 뒀으니까 곤란한 일 있으면 연락해."
"히히. 그럴게요. 고마워요. 오빠."
자신과는 달리 아무런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히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최민석과 또다시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진정하자.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일단 말도 놓고 번호도 교환했으니 남보다는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최민석을 공략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