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완전 꼬마 유서연인데? (3)
'이것 봐라?'
분명히 최면은 깔끔하게 들어갔는데, 소모된 정기의 양이 유서연이 내숭을 부리고 있다는 최면을 걸었을 때보다도 적었다.
'이 정도면 이미 그 비슷한 생각은 하고 있었다는 건데. 진짜 골 때리네.'
그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잠깐 사이에 유서연과 내 사이를 흔들어놓고 아예 날 뺏어버릴 생각까지 했다니.
예전 유서연도 성질 더럽기로는 어디서 밀리지 않을 정도는 됐는데, 유혜연은 그보다도 더 뒤틀려있었다.
"그런데.."
애초에 최면에 걸렸다고 할 것도 없는 상태인 탓인지, 이번에는 유혜연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스무 살 이에요."
"스물넷입니다."
"스물넷.. 언니랑은 차이가 꽤 있으신데,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한 번 눈에 밟히기 시작하니 하는 말 하나하나에서 의도가 느껴진다. 지금도 유서연과 내 나이 차이를 자연스럽게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에서 만났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인데, 직장에서 서연 씨한테 괴롭힘을 조금 당하다가.. 어찌어찌 잘 해결하면서 사귀게 됐습니다."
"괴롭힘이요..? 하긴, 언니 성격이 조금.. 아니, 그보다 괴롭힘을 당하다 사귀게 됐다고요? 어떻게.."
"으음.. 그 부분은 서연 씨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어서 제가 말하기에는 조금 그렇네요. 나중에 서연 씨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이번에도 은근히 유서연의 성격을 까내리는 유혜연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면서, 숨겨야 할 질문은 부드러운 말투를 유지하면서도 딱 잘라 거절했다.
유혜연은 내가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해버리자 살짝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관리하며 호의 가득한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언니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그냥 프라이버시 문제죠. 서연 씨 입장에서는 어떻게 어떻게 사귀게 됐다는 걸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숨긴 걸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래도 가족한테는.."
"가족이라서 더 부끄러울 수도 있는 거니까요.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네.."
한 번 거절했음에도 더 집요하게 물어보는 탓에 내 쪽에서 아예 말까지 잘라가면서 더 확실하게 의사를 밝히고 나서야 유혜연도 아쉬운 척 가라앉은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럼.. 언니 얘기는 말고, 민석 오빠.. 아, 오빠라고 불러도 괜찮나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불러주세요. 서연 씨 동생인데요."
"..아하하. 그럼 오빠라고 부를게요."
사이가 나쁘다고는 듣긴 했지만 유서연의 동생이라고 말했을 뿐인데도 표정이 살짝 굳을 정도라면 확실히 흔히 볼 수 있는 형제 관계처럼 조금 사이가 나쁜.. 그런 정도가 아닌 모양이다.
"그럼 오빠는.. 언니의 어떤 점이 좋아서 사귀는 거예요?"
유서연 쪽은 안 되니까 내 쪽부터 어떻게 알아보겠다는 심산인지, 질문의 방향이 유서연이 아닌 내 이야기로 넘어왔다.
여전히 유서연에 관한 내용이 조금 걸쳐있기는 해도 이 정도는 대답 못 해줄 것도 없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히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말하려니까 저도 조금 부끄럽기는 한데.. 서연 씨가 조금 고압적이고 까칠해 보이는 면이 있기는 해도, 알고 보니까 은근히 부끄러움도 많이 타고 순수하고 귀여운 면이 많더라고요. 그 갭에 제대로 반했죠."
"아.. 네에.."
이번 대답만큼은 어떻게 표정 관리조차 어려울 정도로 어이가 없었던 걸가.
살짝살짝 표정이 굳어지기는 했어도 나름대로 웃는 얼굴을 잘 유지하고 있던 유혜연의 표정에 금이 가고 황당해하는 기색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그래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데 말이야.'
유서연은 아직까지도 내가 분위기를 바꿔 연인처럼 다정하게 대해줄 때면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곤 할 정도였으니까.
처음보다는 나아지기는 했어도, 섹스가 아닌 단순한 연애 쪽에는 내성 자체가 없는 수준이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순수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귀엽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올랐으니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유혜연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괴리감이 큰 얘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얘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서연이한테 불만이 가겠지.'
내가 유서연의 내숭에 끔뻑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도대체 어떻게 내숭을 떨었길래 이렇게 제대로 넘어간 걸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언니가요..?"
이렇게 한 번에 믿지 못하고 황당해하며 되묻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한참 나를 굴려댈 때의 유서연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이쪽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예. 조금 기가 센 면이 있기는 해도 본심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요. 혜연 씨도 이해하시죠?"
"......"
왠지 모르게 곧바로 '아니요'라고 대답이 들려온 것 같은데. 정작 그렇게 대답했어야 할 유혜연은 끝끝내 할 말을 잃어버렸는지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어버렸다.
사실, 유혜연에게 있어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유서연의 성격이 전부 내숭이라고 까발리는 거겠지만 그건 자신에게 있어서도 위험 부담이 큰 방법이라 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내가 서연이한테 제대로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막말로, 유서연이 옛날에 아무한테나 대주고 다니는 걸레였고, 마약까지 했다고 밝힌다고 쳐도 증거 같은 게 하나도 없는 이상 그냥 유서연 쪽에서 동생이 자길 싫어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억울하다고 하면 자기 이미지만 나빠지고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부모님까지 끼워서 증언해달라고 하는 것도 일만 키우는 데다가 마찬가지로 자기 이미지를 망가뜨릴 가능성이 크니 마찬가지로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애초에 내가 모든 진실을 알고도 유서연을 받아들인 시점에서 이건 유혜연이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정작 그 지고 들어가는 게임의 피해자인 유혜연은 그 사실도 모르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그럼 언니는요? 언니는 오빠의 어떤 면이 좋아서 사귀는 거래요?"
확실히 독기가 있다고 해야 할까. 자기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마음을 다잡고 다음 질문을 꺼내는 속도가 빨랐다.
"그냥 잘생겨서 반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첫눈에 보고 반했는데, 여태 그랬던 적이 없어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만 심하게 했다고 사과하더라고요. 그렇게 쩔쩔매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그게 참 귀엽더라고요."
"아, 네.."
이번에도 웃는 표정이 희미하게 흐트러지는 게 보였다.
맞는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짓말이긴 했지만 그걸 유혜연이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본인이 그렇게 싫어하는 언니와 남자 취향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까지 겹쳤다는 사실이 기분 좋게 느껴질 리가 없겠지.
'이런 거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걸 보면 정말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은데. 대단하긴 하네.'
유혜연이 유서연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미 유서연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원래 둘의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자매라고는 해도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났으니 나이가 비슷한 형제들처럼 티격태격할 일도 없었고, 집안도 부유해서 더더욱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그만큼 가깝게 지낼 일도 없어서 크게 친밀한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특별히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가족 관계 정도는 됐다고 한다.
문제는 유서연이 대학에 가서 몸을 막 굴리고, 마약에까지 손을 대면서 생겼다.
갑작스럽게 막 나가버린 유서연에 대한 인간적인 혐오?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유서연 역시 그 부분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따로 있었다.
집에 장남이 없는 탓에 유서연이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아 관리하고, 유혜연은 언니에게 적당히 묻어가며 땅이나 건물만 상속받아 편하게 살 예정이었지만 유서연이 크게 사고를 치면서 상황이 바뀐 것이다.
장녀가 사고를 쳤으니 차녀라도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부모님의 생각에 널널하던 생활이 갑작스럽게 빡빡한 사교육으로 가득 찬 생활이 돼버렸다.
유서연이야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았으니 익숙한 일이었지만 언니와 달리 편안하게 놀고 싶은 대로 놀며 자랐던 유혜연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힘들어진 생활의 원인이 누구인지는 뻔하고, 거기에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같은 여자로서, 사람으로서 혐오할 만한 이유까지 준비되어 있었으니 관계가 순식간에 틀어졌다고 한다.
'배가 불렀지.'
그게 그렇게까지 원망할 만한 일인가?
힘들긴 했겠지만, 남들은 받고 싶어도 못 받는 사교육을 넘치도록 받고, 지금이 힘들기는 해도 물려받을 재산도 짱짱했으니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자기 처지를 조금이라도 남과 비교해봤다면 자기가 얼마나 복 받았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신기하게도 유혜연은 '편하던 생활이 힘들어졌다.' 그 사실 하나에만 집중했다.
아무리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부분이 다르다지만 흙수저 인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원망할 필요가 있나?' 싶은 사고방식이었다.
"혜연 씨."
"아, 네?"
"모처럼 오셨는데 그냥 얘기만 하다 보내는 것도 조금 그렇고, 아직 아침 안 드셨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아..! 그, 그럴까요!?"
가볍게 분위기나 환기시킬 겸 꺼낸 얘기에 유혜연은 데이트 신청이라도 받은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도 수줍게 반응했다.
'자매가 이런 것까지 똑같네.'
그렇게 기가 세고 독기가 넘치는데, 연애 쪽에는 영 젬병인지 우스울 정도로 알기 쉬운 반응까지 똑같았다.
"그럼 바로 가죠. 아, 혹시 따로 드시고 싶은 건.."
"저,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오늘 이사 와서 근처에 아는 곳도 없고.. 오빠가 드시고 싶은 데로 가요."
유서연 얘기가 나올 때와는 달리 정말 순수하게 수줍어하는 표정은 정말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메뉴를 물어봤더니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 것만 봐도 연애에 서투르다는 게 느껴지기도 했고.
물론 여자가 우위에 선 관계라면 아무거나라고 말해도 남자 쪽에서 찰떡같이 여자가 원하는 메뉴를 찾아줘야겠지만, 내게 점수를 따고 싶은 상황에서 저렇게 말했다는 것 자체가 경험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그럼.. 냉면 괜찮아요?"
"아, 괜찮아요!"
나 역시, 내가 갑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불렀고, 유혜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고른 메뉴에 동의했다.
이 독기만 가득 찬 순수한 여동생은, 내 머릿속에서 이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