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1)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차에서 내린 김민아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 불안해 죽겠네. 진짜."
"불안하면 굳이 얼굴 안 봐도 괜찮다니까."
이걸로 같은 소리만 세 번째였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라 나 역시 같은 말로 짜증 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야. 그래도 얼굴 정도는 알고 지내야지."
"마음대로 해. 애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모르겠으니까."
욕조 안에서 두 번, 침대 위에서 다시 실신할 때까지 세 번, 샤워하러 들어가서 나가기 전에 다시 두 번. 아주 제대로 뽕을 뽑을 때까지 즐긴 김민아는 개운해진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갑작스럽게 유서연과 임예진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관계가 어떻게 됐든 간에 그 둘이 날 좋아하고 있는 거고, 자기는 그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입장이었으니 최소한 인사라도 해두고 싶다나.
어차피 당장 김민아를 집에 데려와서 살게 할 생각도 없었기에 불편하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했지만 김민아의 태도는 완고했고, 결국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사람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지?"
"계속 옆에 있었으면서 뭘 물어보냐? 그냥 한 명 데려간다고만 했잖아."
"..그렇지."
김민아가 원했다면 적당히 중재 정도는 했겠지만 김민아 본인이 그마저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여자 한 명 데려간다는 식으로 말만 전해놓은 상태였다.
[17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안내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김민아는 중앙 현관을 조금 놀란 눈으로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더니."
"어쩔 수 없잖냐. 너 나가자마자 이런 데로 이사 왔다고 어떻게 설명하냐? 코인이라도 했다고 그래?"
"..흥."
짜증은 내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걸음 걸어 문 앞에 도착하자 다시 표정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졌다.
"들어간다?"
"으, 응."
김민아의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삑, 삑, 삑, 삑 하고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오셨어요.""
동시에 들려오는 두 사람의 익숙한 인사가 들려왔다.
"다녀왔어. 그리고.. 이쪽이 아까 얘기했던 김민아."
"아, 안녕하세요."
두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김민아를 소개하자 김민아는 곧바로 꽃혀드는 두 개의 시선에 어깨를 흠칫 움츠리면서도 곧장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어서 오세요."
유서연과 임예진 역시 일단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김민아의 인사를 받았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어쩌다 보니까 밥도 안 먹고 왔는데. 밥도 좀 시키고."
"뭘로 시킬까요?"
"적당히 밥류로 시켜. 민아도 같이 굶었으니까 얘 것도 같이 시키고."
"그럴게요."
식사 주문은 항상 유서연이 담당하고 있었기에 적당히 메뉴 선정을 떠넘기고 현관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로 들어왔다.
김민아는 긴장해서 쭈뼛거리는 와중에도 복도나 거실 내부를 힐끔힐끔 살피는 모습이 꼭 도망갈 장소를 찾아두는 모습 같아서 조금 웃겼다.
"일단 밥은 알아서 시켜두고. 민아가 너희들이랑 얘기 좀 해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온 거거든? 어떻게 할까. 나도 같이 얘기해?"
"아, 아니야. 일단은 셋이서만.."
"그럼 뭐.. 난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셋이서 얘기하고 있어. 밥 오면 부르고."
마지막으로 적당히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이라도 할까 하다가, 필요하면 김민아 쪽에서 부탁했겠거니 하고 적당히 관심을 끊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쨌든 내가 데려온 손님인 만큼 두 사람도 김민아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최민석이 방에 들어가고. 김민아는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실 한가운데서 콩닥콩닥 뛰어대는 심장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다, 다시 인사드릴게요. 김민아라고 해요."
"유서연이에요."
"임예진이에요."
잔뜩 긴장한 자신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이름을 밝히는 두 사람.
유서연과 임예진.. 사진으로 봤을 때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장난 아니게 예쁘다.
오히려 사진이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눈앞의 두 사람에게서는 단순히 예쁜 외모 이상으로 말로 하기 어려운 야릇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외모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이런 두 사람을 두고 굳이 왜 나까지?'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아, 네, 네."
먼저 분위기를 주도한 건 가슴이 큰 쪽. 유서연이었다.
눈치가 없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지만 아무래도 남의 감정을 읽는 건 서투른 탓에 저 차분한 표정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유서연과 임예진이 같은 소파에 앉고, 맞은편 소파에 앉은 김민아는 꿀꺽 침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일단.. 두 분은.. 그.. 몽마.. 시죠?"
"맞아요."
어렵게 꺼낸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시원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몽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겪은 일이 있어 부정할 수도 없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유서연 역시 당연하다는 듯 수긍하는 탓에 더더욱 이 상황이 현실이라고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게.. 민석이랑 친구.. 였거든요..? 근데 알고 보니까 최면에 걸려서 이용만 당했던.. 그런 관계였더라고요.. 그, 두 분은 혹시 어떻게 민석이랑 엮였는지 들어보고 싶어서.."
긴장한 탓에 횡설수설 떠들어대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전해졌다.
유서연과 임예진.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더니 유서연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주인님이랑 처음 만난 건 직장에서였고.."
최민석을 자연스럽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에 살짝 움찔했지만 일단은 얌전히 유서연의 말을 경청했다.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최민석에게 들었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유서연의 시점에서 들어보니 확실히 이해가 갔다.
'걔는 진짜 변태라.. 너도 그냥 만나보면 알걸.'
최민석이 했던 말은 그냥 사실이었다.
유서연은 전후 관계가 어떻게 됐든, 최민석과의 관계가 너무 좋아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만족하기 위해 노예를 자처한 것이다.
유서연의 이야기가 끝나고, 임예진이 바통을 이어받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좀 예전 얘기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제 경우엔 불감증 체질이었던 게 시작이었거든요."
불감증. 이것 역시 최민석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일치한다.
임예진. 그녀 같은 경우에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성적 쾌감을 줄 수 있는 상대가 최민석밖에 없었기에 조금은 억지로 노예가 된 케이스였다.
유서연의 사연에 비하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그래도 마냥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애매한 느낌이었다.
"그럼.. 두 분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노예.. 잖아요."
"노예라고 해도 결국은 같이 살면서 섹스하는 것뿐이니까요. 좋으면 좋았지, 불편하거나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주인님은 워낙 욕심이 없는 편이기도 하고."
"욕심이, 없는 편이라고요?"
"당연히 그렇죠. 보통 사람이 최면 능력을 얻었으면, 당장 돈부터 확 벌어서 사치란 사치는 다 부리고, 매일 다른 여자로 갈아 치우면서 지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요. 최면에 제약이 있다고는 해도 주인님 정도면 진짜 검소하게 지내시는 편이죠."
그런가? 유서연은 정말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김민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김민아가 머릿속으로 최대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사이 임예진도 끼어들었다.
"전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평생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거니까. 사실 나만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그랬다간 몸이 못 버틸걸요. 민아.. 씨라고 했죠?"
"아, 네."
"민아 씨도 주인님이랑 해보셨으면 아시잖아요. 주인님이랑 단둘이서 매일 밤, 매일 아침, 원하시는 대로 욕구를 다 받아들인다고 생각해보세요. 일상생활이 가능할 것 같아요?"
"......"
그런 생각은 안 해봤었는데. 새삼 생각해보니 절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입으로 잔뜩 뽑았을 때 힘들어했었는데, 오늘은 진짜 지치지도 않고 미친 듯이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았던가.
본인 역시 예전보다 정력이 더 강해졌다고 인정했으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오늘처럼 당한다고 생각해보면, 정말 몸이든 정신이든 못 버틸 게 분명했다.
"저는 지금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밤에는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성욕이랑 일상생활이랑 밸런스가 맞는다고 해야 하나? 이건 언니 덕분이긴 하지만 오히려 몽마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겼고,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됐으니까."
"아.."
최민석이 자신에게 말했던 금전적 지원. 임예진 역시 그러한 혜택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원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었다.
"민아 씨."
"아, 네."
이번에는 유서연 쪽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김민아를 불렀다.
"일단 제 입장에서는 주인님이 단순히 몸만 섞는 상대가 아니라 완전히 자기 걸로 만드는.. 몽마가 늘어나는 건 반가운 일이 아니에요. 예진이는 괜찮다고 했지만 저는 정말 주인님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도 있거든요. 그래도.."
유서연은 잠시 말끝을 흐리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고, 주인님이 원하시는 이상 결정은 민아 씨가 하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민아 씨한테 나쁜 감정은 없으니까 솔직하게 조언 정도는 해드릴게요."
"언니!?"
유서연의 말에 임예진이 깜짝 놀란 듯 당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해줬잖아! 막 살벌하게 쳐다보고, 엄청 눈치 주고 그랬으면서!"
"..그땐 지금처럼 관계가 확실하질 않았잖아. 지금 얘기하는 중이니까 가만히 있어 봐."
"치이.."
처음 봤을 때부터 유서연이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역시 나름대로 위아래가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민아 씨한테 얻은 정기로 저한테 최면을 거신 거니까요. 혹시라도 다른 여자를 먼저 건드려서 저한테 관심을 끄게 됐거나, 지금이랑은 다른 관계가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도 조금은 있거든요."
최민석의 노예라는 위치에 정말로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