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아직 화 풀린 거 아니거든!? (1)
정말로 칼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살벌하던 김민아의 태도가 왜 갑자기 풀어졌는지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감정이 풀린 것도 아니고, 정말 싫은데 어쩔 수 없다는 듯 짜증을 감추지 않으면서 억지로 맞춰주는 듯한 조금 인위적인 태도였다.
"미친, 두 명이나 있다고?"
"둘밖에 없는 거지. 진짜 막 나가는 놈이 나처럼 최면 쓸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봐. 겨우 두 명으로 끝났겠어?"
이 부분에서는 나도 나름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당장 최면이 없이도 양다리, 세 다리씩 걸치고 당당히 쓰레기 짓을 하는 인간들이 있는 판에 나는 최면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서도 두 명. 이제 고작해야 세 명째지 않은가.
물론 최면을 이용해서 손을 댄 여자는 더 많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여자들 후리고 다니는 인싸 놈들에 비하면 그리 많은 인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민아는 이런 내 생각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모양인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흘겨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 그래서, 어떤 사람들인데?"
"어떻냐니.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건데?"
"얼굴..이야 당연히 예쁘겠지. 사진 있어?"
"사진이.. 잠깐 기다려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갤러리를 열어봤지만 두 사람의 사진은 없었다.
예전에 임예진에게 보여주기 위해 유서연과의 관계를 찍었던 영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삭제해버렸고, 둘 다 프로필 사진마저도 셀카가 아닌 탓에 사진을 구할 곳이 없었다.
[최민석 : 얘들아. 셀카 한 장씩만 찍어서 올려봐.]
[유서연 : 지금 찍어서 올릴게요.]
[임예진 : 저도 지금 찍을게요!]
"뭐야.. 답장 엄청 빠르네. 유서연, 임예진.. 이 둘이야?"
단톡방에 메세지를 올리고 10초도 지나지 않아서 답장이 올라오자 옆에서 같이 화면을 보고 있던 김민아가 투덜거리듯 물었다.
"맞아."
"사진이야 금방 올라오겠고, 뭐 하는 사람들인데? 나이는 몇이고?"
"서연이는 스물아홉에 사업 하나 한다고 준비 중이고, 예진이는 스물다섯에 일자리 구하는 중."
"......"
"..왜 그렇게 보는데."
지금 대답에서 뭔가 김민아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내용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하지만 이쪽을 흘겨보는 눈빛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짜증이 섞여 있었다.
"됐어. 그래서, 어디서 뭐 하다 만난 건데? 맨날 일 갔다 와서 집에서 게임만 했었으면서. 어떻게 죄다 연상으로만 꼬셔놨네."
"서연이는.. 너도 알걸? 가끔 얘기했었잖아. 직장에서 맨날 나 괴롭히던 팀장."
"..설마."
"그 설마지. 처음에는 쌓인 감정도 있겠다 복수나 할 겸 건드렸던 건데, 자기 쪽에서 좋다고 달라붙었어."
"뭘 어떻게 했길래.."
"날 괴롭혔던 것만 봐도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서 그런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냥 날 볼 때마다 조금씩 성욕이 차게 만들었지. 그 뒤에 자위할 때는 내 생각만 나게 만들었고."
그 외에 신고하지 못하게 하는 최면도 걸긴 했지만 그건 아마 유서연의 감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김민아는 그냥 이해가 안 가서 중얼거렸을 뿐인 것 같았지만 이왕 털어놓기로 한 거 유서연을 길들였던 과정을 전부 털어놨다.
어차피 나중에 두 사람과 마주치면 다 들을 얘기기도 했으니 굳이 숨길만 한 일도 아니었다.
"..미친. 그럼 강간당했는데 너무 기분 좋았어서 자기 쪽에서 먼저 더해달라고 매달린 거라고?"
"진짜야. 걔는 진짜 변태라.. 너도 그냥 만나보면 알걸."
임예진은 나름 불감증이라는 체질에서 생겨난 집착 비슷한 이유라도 있었지. 유서연은 그냥 단순히 섹스가 좋아서, 싫어하지도 않고 자발적으로 내게 매달린 케이스라 도저히 변호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예진이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긴 해."
유서연에 비하면 오히려 이해가 간다고 할까. 불감증이라는 체질만 아니었다면 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컸기에 임예진에 관한 얘기는 유서연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내 노예 하기로 한 거지."
과연 이번에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생각하며 말을 끝맺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싸늘한 시선이 꽂혀 들었다.
"하.. 결국 성매매도 했다는 소리네?"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되게 찝찝하잖냐. 오히려 최면도 안 걸고 합의 하에 돈 주고 깔끔하게 해결한 건데. 차라리 이게 낫지 않냐?"
"..합의고 뭐고 일단 불법이잖아."
"어쨌든 최면으로 꼬셔서 한 것보단 낫잖아."
"..자랑이다. 나쁜 새끼."
애초에 내가 의도하고 반쯤 즐겼던 정혜수 때와 달리 내 ‘진짜’ 행동에 대한 비난이 마구 날아들고 있으니 확실히 얼마 있지도 않은 양심이 푹푹 찔리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다고. 아, 사진 올라왔다. 자, 봐."
먼저 올라온 건 임예진의 셀카였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딘지 모를 건물 화장실 거울 앞. 4월이 되고 날이 풀리면서 전체적으로 얇아진 옷차림 덕분에 얇게 겉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길게 뻗은 신장과 몽마가 되면서 커진 D컵 가슴의 라인이 잘 드러나는 사진이었다.
그냥 메세지 받은 자리에서 셀카 모드로 찍으면 될 걸 이렇게 정성껏 찍었으니 사진이 오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
김민아는 전체 화면으로 사진을 띄워놓은 화면을 잠시 훑어보더니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 이 사람이라고?"
"맞아. 아, 사진만 보면 누군지 모르겠네. 얘가 예진이야."
"......"
까똑!
"아, 서연이도 보냈나 보다."
화면 위쪽에 유서연의 이름과 함께 [사진]이라고 알림이 뜬 덕분에 누가 보낸 메세지인지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김민아는 말없이 임예진의 사진을 조금 더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확대를 취소하고 새로 올라온 유서연의 사진을 확대시켰다.
둘이 짜기라도 한 듯 유서연도 어딘가의 화장실 거울 앞에서 전신 셀카를 찍어서 보냈다.
오늘은 일 때문에 외출한 모양인지 익숙한 하얀 셔츠에 까만 정장. 옅은 검은색 스타킹의 오피스룩 차림이었다.
이것저것 신경 써서 코디한 티가 나는 임예진의 옷차림에 비하면 흔하다면 흔한 차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옷 자체에서 오는 매력은 물론이고, 본인의 몸매가 워낙 폭력적인지라 얼굴까지 볼 필요도 없이 몸매만으로도 섹시하다 못해 음란한 분위기가 풍길 지경이었다.
"뭐, 뭐야.."
임예진까지는 어떻게 넘어갔지만 유서연의 저 반칙이나 다름없는 가슴만큼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거, 맞아? 진짜야? 안에 뭐 넣은 거 아니야?"
"당연히 진짜지. 확실해."
뭐가 진짜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기에 구태여 덧붙이지 않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유서연의 가슴이 아무런 수술이나 보정도 없는 진짜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었다.
"이건 너무하잖아.."
아무래도 같은 여자다 보니 임예진처럼 유서연의 가슴에서 박탈감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굉장히 허탈한 목소리였다.
"그냥 크기만 한 것도 아니고.."
다시 한번 억울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목소리.
크기만 한 것도 아니고 모양도 예쁘다. 굳이 가슴 얘기가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비율도 훌륭한 편이고, 얼굴도 예쁘다.
특히, 평소에는 고압적이고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내 앞에서는 항상 지금 보낸 사진처럼 꿀이 뚝뚝 흘러내릴 정도로 애정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데서 오는 갭이 장난이 아니었다.
"진짜 이 두 사람이 다 니가 좋아서 노예처럼 지내고 있다고..?"
"말이 노예지, 그냥 같이 살면서 섹스만 하는 정도라니까. 진짜 뭐 이상한 거 시키고 하는 건 없어."
그나마 걸리는 게 있다면 목욕 시중 정도일 텐데. 그냥 일상적으로 같이 씻는 김에 하는 일이기도 하고, 시중 자체도 내가 시킨 게 아니라 그쪽에서 자발적으로 해주는 일일 뿐이다.
그러는 와중에 몸을 섞는 것 역시 오히려 이쪽이 유혹당했다고 하는 게 맞을 정도로 오히려 그 둘 쪽에서 더 원하는 일이었다.
"진짜 배가 불렀네. 여기서 나까지 갖고 싶어서 그렇게까지 욕을 처먹었냐? 이 둘로는 만족이 안 돼?"
원래 그렇긴 했지만 뭔가 조금 더 공격적이고 까칠한 말투로 핀잔이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힐끔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 바라는 대답이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뭘 바라는지 모른다는 거네.’
여자가 익숙하다고 해서 여심까지 익숙해지는 건 아니다.
인싸들 조차도 제대로 답을 내지 못하고 실수를 남발하는 게 여심 맞추기였고 의미심장한 질문에 원하는 대답을 내놓는 일이었다.
그저 잘생기고 돈이 많을수록 점수가 조금씩 까일 뿐이었다.
‘평소 하던 대로 그냥 무작정 좋은 말만 하는 건..’
왠지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티가 나서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오늘은 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으니까, 이번 질문 역시 솔직하게만 대답하면 중간은 가지 않을까.
"당연히 갖고 싶지. 저 둘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난 너까지 확실하게 내 껄로 하고 싶어. 예전이었으면 몰라도, 이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기로 했거든."
"......"
돌아오는 눈빛이 싸늘하다. 절반은커녕 점수가 팍 깎였다는 게 훤히 보이는 눈빛이였다.
이게 아니었나?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쓰레기 같은 발언이긴 했지만 그건 이미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상황이었으니까.. 모르겠다.
"하아. 그래. 쓰레기인 건 이미 밝혔으니까 당당하다 이거지?"
읽혔다.
진짜로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대신. 확실하게 약속해. 나도 내 멋대로 할 거니까, 괜히 이상한 거 시키거나 하지 말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겠다고."
"우리 애들한테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 그리고..! 애초에 그게 목적이니까 해달라고하면 해주긴 하겠지만 나, 나도 내가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할 거야. 알았어?"
김민아가 말하는 ‘그게’ 뭔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서로 이미 볼 장 다 봤음에도 부끄러워하고 얼굴을 붉히는 건 서로 숨기는 것 없이 가까웠던 거리감이 다시 멀어졌다는 뜻이리라.
"그거야 당연히 환영이지. 다른 일 없으면 언제든지 해줄 테니까 편하게 말해."
"아니지! 다른 일 있어도 해달라고 하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누가 노예인 건데? 나도 애들 뭐 하고 있으면 억지로 안 시키는데."
"그, 그래..? 그냥 아 무때나 니가 하라고 하면 무조건 다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몇 번이나 그렇다고 말했는데도 새삼 놀라고 있다는 건 결국 내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결국은 다 내가 자초한 업보인지라 뭐라고 한마디 하기에도 애매하다는 게 더 답답했다.
"계속 그렇다고 말했잖냐. 자세한 건 나중에 애들 만나면 직접 들어. 나도 사실 걔들이 기준을 어떻게 두고 행동하는 건지 모르니까."
"..알았어. 그, 그리고.."
"또 뭔데?"
"..지금은 바쁜 거 아니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지..?"
"......?"
얘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흐르지? 지나치게 뜬금없는 대화의 흐름에 벙 찐 사이, 김민아는 들고 있던 내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밀착시켜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