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큐버스 시스템-227화 (227/775)

< 227화 >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 (8)

최민석이 몽마니 뭐니 떠들어댔을 때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지만 그의 말 몇 마디에 의식 아래 묻혀있던 '진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미친 듯이 올라오는 어지러움과 역겨운 감각에 그대로 변기까지 뛰어가 고개를 처박고 한참 동안 속을 게워냈다.

"하아.. 하아.."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진 상태에서 헛구역질을 몇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도대체..'

머리가 어지럽다.

자신과 최민석의 관계가 최면으로 만들어진 가짜이며 자신이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해했다고 해서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감정마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시작은 짜증스러운 상대였지만 몇 번 얼굴을 마주치게 되면서 친해졌다.

친구들은 다 대학에 가고 바쁘게 생활하는데, 혼자만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다시 합격한다는 확신도 없이 재수를 준비 중이라는 상황에 불안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와중에 생겨난 관계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최민석과 함께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굉장히 많은 편안함과 위로를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친구로서의 친밀감과 도움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 그 모든 게 가짜로 만들어진 관계였다는 데에서 오는 치가 떨릴 정도의 배신감이 부조화를 이뤄 계속해서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쁜 새끼.. 왜 하필 나한테..'

최민석이 원망스럽다. 이치적으로도 자신은 그를 원망할 자격이 있었고, 그의 말대로 칼로 찔려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뿌리 깊게 박힌 감정이 계속해서 분노에 브레이크를 걸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어떡하지..?'

이성과 감정이 뒤엉키는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김민아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저 자신을 가지고 놀려고 했다면 계속해서 최면을 유지하고 즐기기만 하면 됐을 텐데. 도대체 왜 사실을 밝혀서 일을 이렇게 만든 걸까.

이제 와서라도 자신과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아니, 그건 너무 감정에 치우친 생각이다. 추측이라기보다는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최면을 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역시 가장 처음 떠올렸던, 지금이라도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그게 정답인 걸까? 그런 게 아니라면 최면을 풀어서 최민석이 얻을 수 있는 이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자.'

'왜 그랬는가'를 알 수 없다면 적어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도는 정해둬야 한다.

최면.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 어떻게 걸렸는지조차 알 수 없다. 지금도 최민석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려고 든다면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도망.. 도망쳐서 해결될 일도 아니야.'

최민석이 자신을 놔 줄 생각이 없다면 이미 집 주소까지 들통난 판에 고시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모르게 최면을 걸려고 드는 순간 그걸로 끝이니까.

그럼, 지금의 자신은 최면에 걸려있지 않은 걸까?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게 김민아의 마음을 한층 무겁게 만들었다.

'뭐가 됐든 여기서 해결을 봐야 해.'

여기서 무사히 도망치고, 최면에 걸리지 않을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민석과는 제대로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어울린 기간은 짧았지만 절친이라고 굳게 믿었던 친구에 대한 배신감을 평생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그를 변호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어떻게 똥 한번 밟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더라도 이 들끓는 감정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이상 원망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테니까.

뭐가 됐든 간에 최민석과는 한 번 제대로 대화를 나눠서 속내를 알아내고, 이 감정을 제대로 정의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대략적으로나마 시간을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상태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아.."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김민아는 속을 전부 게워낸 탓에 신내 가득한 한숨에 눈살을 찌푸렸고, 곧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한참을 입을 헹궜다.

그리고, 감정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로 욕실을 나와 다시 최민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최민석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감정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최면을 푼 이유는 자신을 완전히 가지고 싶어서. 자신을 완전히 소유하는 방법이 자신을 몽마로 만드는 것이며, 몽마끼리는 최면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최면을 풀고 감정을 풀기로 했다는 것이다.

최민석이 자신에게 소유욕을 드러냈다는 부분에 관해서는 조금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말들은 그저 김민아를 불쾌하게 만들 뿐이었다.

최면 능력, 건강, 외모 돈.. 자신과 타협하고 몽마가 되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을 때마다 정체 모를 짜증이 끓어오른다.

조건 하나하나를 놓고 본다면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들. 정말 인간을 그만두고 노예 취급을 받더라도 받아들일 사람이 있겠다 싶을 정도로 좋았지만 자신이 원한 대답은 저런 조건들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린 채로 감정을 추스르고 있던 김민아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원하는 대답이 있다면 자신의 본심은 뭘까. 도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지?

모르겠다. 스스로의 감정에 답을 내리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내뱉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나한테 집착하는 이유가 뭔데? 내가 얼굴이 예뻐서? 솔직히 나보다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 정돈 세상에 널렸잖아. 정말로 그냥 갖고 싶어서?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성이 풀려서? 그런 이유야?"

스스로의 외모에 대한 자각 정도는 있다.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의 외모는 자신감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최민석이 소유욕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당장 지금만 해도 분위기가 싸늘해져서 한참을 욕만 처먹었는데. 최면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그럴 필요가 있나?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자신만큼 예쁜, 혹은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굳이 자신에게만 소유욕을 드러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늘 가볍고, 장난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마주친 최민석은 아주 잠깐 말을 정리하는 듯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갖고 싶어서. 정말로 그게 전부야. 네 말대로 찾아보면 예쁜 여자들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건 다른 여자가 아니라 너야."

얼핏 들어보면 프로포즈 같은 대사였지만 속사정을 이해하고 보면 결국 스스로가 쓰레기임을 인정하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가족이랑도 연을 끊어서 기댈 곳도 없고, 타지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직장이랑 집만 왔다 갔다 하면서 죽은 사람처럼 지냈지. 분명 최면으로 시작한 관계였고,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즐겁고 편안했어. 그런 상대는 너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꼭 널 갖고 싶은 거야."

"......"

말은 그럴듯했지만 결국 일방적으로,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관계일 뿐이다.

'그런데 왜..'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쿵쿵 뛰어대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분명 나쁜 놈인데. 내 몸을 가지고 멋대로 성욕을 푼 쓰레기인데. 머리로는 밉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말에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간질간질한 기분이 차올랐다.

'미쳤어 진짜..'

아니면 이미 새로운 최면에 걸린 걸지도 모르고. 어쨌든 지금의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미 반했던 거야.'

최면에 걸린 동안 했던 생각일 뿐이었지만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욕구의 해소를 위해 몸을 섞을 뿐인 조금 특별한 친구라고.

한 번도 그 이상의 관계를 떠올려 본 적은 없었는데.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실은 이미 완전히 반해 있었던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최민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날은 두근거려서 제대로 잠도 자기 힘들었다. 만난 뒤에는 너무 기분이 좋고,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진짜 쓰레기 새끼.."

분한 마음에 최대한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최민석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TV에서나 봤던, 쓰레기 같은 남자들한테 잘못 걸려 고생하면서도 차마 떠나지는 못하는 여자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왜 좋은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얼굴이 잘생겨서, 몸이 좋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자지가 커서, 정력이 강해서, 섹스를 잘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문란하고 속물적인 기준이었지만 성적인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록 최면으로 조작된 관계더라도 힘들 때 함께 있어 줬으니까. 힘들었던 마음이 편해지고, 가끔은 즐겁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게 쌓인 감정이 이렇게 애정으로 변해버린 것이리라.

"그딴 걸 말이라고 해..? 최소한 좋아한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미 지은 죄가 있는데 또 속일 수는 없잖아."

이 망할 새끼는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가끔은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듣고 싶은 말이 있는 법인데 말이다.

"그럼 처음부터 그러질 말던가.. 어중간하게 양심 있는 척하면 좋냐? 쓰레기 짓 하는 와중에 양심이 좀 챙겨지는 기분이야?"

"......"

괜히 열 받아서 다시 한번 쏘아붙이자 자기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야."

"어, 왜?"

"뭐, 몽마로 만든다는 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니 껄로 만든다는 거 보면 진짜 막 노예 계약 같은 거 아니야? 니가 죽으라면 진짜 죽어야 하는 그런 거 아니냐고."

"맞긴 한데.. 네가 싫어할 만한 일은 절대 안 시킬게. 약속할 수 있어."

"약속은 무슨.. 결국 나중에 가서 철판 깔고 싫은 거 시키면 항의도 못 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아무튼 약속할게."

"내가 진짜.. 돈만 많았으면 고민도 안 하고 차 버리는 건데.."

아까는 아무래도 좋다고, 짜증까지 내가며 무시했던 돈 얘기를 들먹이며 적당히 받아들이겠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생각해보니 니가 좋아서. 아무리 밉고 화가 나도 같이 있고 싶어서. 그렇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핑계였다.

"지금 바로는 안 할 거야.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다 들어보고 결정할 거라고."

굳이 몽마가 되지 않더라도 최민석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 관계를 다시 맺는다면 조금 더 끈끈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조금이라도 속이기만 해봐. 진짜 칼이라도 꽃아줄 테니까.'

내심 최민석이 들었다면 오싹해 할 만한 다짐을 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바로 직전에 거짓말로라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속으로 불평했었지만 김민아 스스로는 자신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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