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 (7)
서큐버스 시스템을 얻은 뒤로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렸던 생각이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마음대로'가 무작정 쓰레기 같은 방향으로 행동하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
내가 정말 쓰레기같이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최면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김민아를 가지고 놀거나, 일단 몽마로 만든 뒤에 계속 따먹으면서 복종시키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여태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몽마가 되면서 나와 노예 계약을 맺게 되면 주인의 권리를 이용한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게 되니까.
어떠한 형태라도 내 정체에 대해 남에게 전달하지 않을 것. 평소에도 내가 하는 말을 순순히 따를 것.
이 두 가지만 명령해도 강제 계약이고 뭐고 김민아는 내 장난감이 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쓰레기같이 행동하면서도 남에게 원망받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따지면 내 마음에 든 상대에게는 원망받고 싶지 않다. 거기까지가 딱 내가 정해둔 마지노선이었다.
그리고 김민아는 안타깝게도 이미 내 마음에 든 상대였다. 그게 가짜로나마 친구로 지내며 생겼던 친밀감이건, 단순한 소유욕이건 간에.
"그래서.. 여태 사람 잘 갖고 놀았으면 됐지, 왜 갑자기 사실대로 밝혀서 이 지랄인 건데? 갖고 놀다 보니까 질렸냐?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가지고 놀려고?"
한참을 알맹이 없는 욕설만 내뱉던 김민아의 입에서 드디어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질문이 나왔다.
지금까지도 진심이었지만 이젠 더 진심으로 속내를 드러내야 할 때였다.
"갖고 싶어서."
"뭐..?"
"갖고 싶어서 그렇다고. 그동안 여기저기서 정기 모으다 보니까 할 수 있는 게 좀 늘었는데, 이제 이것저것 조건이 붙어있긴 해도 다른 사람도 몽마로 만들 수 있게 됐거든."
"..진짜 어질어질하네."
"......"
"계속해. 어차피 니 맘대로 할 거잖아."
나름 지금 상황을 받아들였음에도 다시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김민아의 목소리에 잠깐 말을 멈췄지만 곧장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며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몽마끼리는 최면이 안 통해. 최면을 건 상태로 널 몽마로 만들 수는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그동안 너한테 걸었던 최면을 다 알게 되겠지. 그 전에 푼다고 해도 최면이 사라졌으니 이상하다는 건 다 알게 될 테고."
"그래서?"
"그렇게 되면 몽마가 된 뒤에 지금이랑 똑같이 반응했을 거 아냐. 모처럼 내 껄로 만들었는데, 미움받긴 싫으니까 지금 확실히 해두려고 한 거지."
"뭔......"
김민아의 표정이 분노를 넘어서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당황한 기색으로 가득 찼다.
"아니, 씨, 무슨..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당연히 안 되지."
"그치. 그렇지. 안 되지. 사람 하나를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서 가지고 놀았는데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냐고!!"
결국은 자기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지른다.
너무 맞는 말이라 도저히 반박할 만한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지만 화를 내지 않는 것과 화를 푸는 건 다른 문제였다.
"화를 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좋으니까 풀어달라는 거야."
"진짜 씨.. 개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결국은 이제 한계라는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내가 김만아의 입장이라도 저런 반응이 나왔겠지. 계속해서 말이 안 되는 소리만 하면서 자기 좋은 얘기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일단 들어봐. 나도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네가 화를 풀고, 아니 조금씩이라도 풀어주기로 하고 몽마가 되면 얻을 수 있는 걸 알려줄게."
"..떠들어봐."
당장 덤벼들거나 뛰쳐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김민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린 상태였지만 개의치 았고 생각해둔 조건을 천천히 나열했다.
"우선 몽마가 되면 너도 나처럼 최면을 쓸 수 있게 돼. 나야 정기가 필요하고 그 외엔 별 관심이 없어서 성적인 일에만 썼지만 그게 얼마나 좋은 능력인지는 알지?"
"..알지. 사람 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병신 만들 수 있는 능력이잖아."
"......"
나름대로 굉장히 혹할 만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싸늘하고 냉소적인 반응만 돌아왔다.
"그다음은.. 몸이 건강해지고 몸매나 얼굴도 더 예뻐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최면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아직 울음기가 남아있는 눈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조금 말이 많아질 만한 내용이긴 한데. 몽마는 단순히 상대한테 정기를 뺏어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넣어줄 수도 있어. 몽마한테 정기를 빼앗기면 몸에 있던 정기가 빠져나가면서 잠깐 피곤해지지만 깨끗한 정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더 건강해지는 거지. 거기에 내 정기까지 받게 되면 피곤한 것도 없이 깨끗한 정기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게 되는 거고."
이건 향설에게 들었던 설명을 나름대로 풀어서 정리한 내용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몸에 고여있던 나쁜 피가 빠져나가고 신선한 피를 만들게 된다고 생각하면 돼. 그렇게 되면서 몸이 건강해지니까 체력도 늘어나고, 병에도 잘 안 걸리게 되거나 피부도 깨끗해지는 거야."
"..피부가 깨끗해지니까 예뻐진다는 거고? 장난해?"
"당연히 아니지. 예뻐지는ㅈ건 몽마가 되면서 생기는 변화야. 살이 조금 더 빠질 수도 있고, 키가 크거나 가슴이 더 커지기도 해. 당연히 모양도 예쁜 상태로 변하게 되고. 성형이랑은 달리 어색한 부분이나 후유증 같은 것도 전혀 없고."
뭔가 사이비 약장수 같은 설명조였지만 이건 이미 유서연과 임예진의 케이스를 보고 난 뒤라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건강하고 예뻐지는 대신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노예로 살라고?"
이것도 안먹힌다. 그나마 관심이라도 가져주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돈도 줄 수 있어. 공무원 생활 힘들지? 그거 당장 때려 쳐도 돼. 일 안 하고 먹고 놀고 싶으면 그렇게 해주고, 하고 싶은 일 있으면 어지간한 건 다 하게 해줄 수도 있어."
"하, 무슨 수로? 그 잘난 최면으로 뭐라도 해주려고?"
이번에는 명백하게 경멸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최면, 돈.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했는데. 먹히기는커녕 짜증과 경멸만 돌아오는 탓에 조금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그렇게 해줄 수도 있긴 한데, 그럴 필요도 없어. 내가 몽마로 만든 애 하나가 엄청 부자거든. 걔한테 말만 하면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을걸."
"하. 결국 여자한테 돈 뜯어먹는단 소리 아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걔는 절대, 절대 억지로 몽마가 된 건 아니야. 확실하게 자기도 좋다고 동의받고 몽마로 만든 거야. 돈도 내가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자기가 먼저 주겠다고 나선 거고."
"미친.. 그래서, 그렇게 먹여 살려주겠다? 그 인간이 얼마나 부자길래?"
"음.."
유서연이 얼마나 부자인가. 솔직히 말하면 그 부분은 아직 나도 제대로 체감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유선에게 차를 살 때 너무 비싼 걸 산 게 아니냐고 물었다가 들은 얘기는 있었다.
"일단,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하는데?"
"......"
나도 유서연에게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김민아처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었기에 김민아의 침묵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1억? 2억?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지. 우리야 통장에 1, 2억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사실 그 돈으로 서울에 제대로 된 전세 하나 구하기도 힘들잖아. 비싼 외제차 같은 것도 당연히 힘들고."
통장에 억이라는 액수가 들어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실감하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납득 못 할 내용이 아니기도 했다.
"그럼 10억? 20억? 그쯤 되면 좀 산다고 할 수는 있지. 진짜 비싼 건 아니어도 아파트 한두 채씩 살 수도 있는 액수니까. 근데 그렇다고 해서 1, 2억씩 되는 돈을 휙휙 쓰기엔 여전히 부담되는 수준이잖아?"
"......"
유서연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떠들고 있을 뿐이었지만 김민아는 어느새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아무리 싫다 싫다 해도 현대 사회에서 돈만큼 필수적이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걔네 부모님이 내가 일하던 백화점 이사라는데, 당연히 월급으로 쌓은 돈은 아니고, 여기저기 있는 인맥들 통해서 얻은 정보로 이것저것 투자하면서 불린 돈이라더라."
백화점 경영진, 이사라는 직책은 단순히 인맥을 넓히기 위한 자리에 불과하다.
유서연의 아버지 역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자라며 인맥도 쌓고 기본적으로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었다.
"그 왜, 핸드폰 게임에 막 달에 몇천씩 쓰는 사람들 있잖아. 그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수준? 진짜 최상위권 부자는 아니어도 어디 가서 당당하게 돈 많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더라"
그나마 이게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예시였다.
"네가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고, 어디 카페 같은 거 차려서 느긋하게 사장 생활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줄 수 있을 정도는 돼."
"하.."
내 설명이 끝나자 김민아는 숙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래도 싫다고 하면? 돈 좋고, 최면 좋고, 건강하고, 예쁘고, 돈 많은 것도 좋아. 아주 인생 피겠네. 지금 거절하면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할 것 같고,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에서도 혹할 정도니까. 근데, 지금은 그거 다 준다고 해도 싫어. 그래도 내가 싫다고 하면, 넌 어쩔 건데?"
김민아의 초탈한 듯한 질문에 직감적으로 이번 질문이 김민아를 설득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하는 분수령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행히도 이건 이미 생각해뒀던 질문이라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내가 워낙 쓰레기라 속죄하거나 죽어주거나 그런 건 못 해주는데, 조금 무리해서라도 나랑 있었던 일들 전부 완벽하게 잊어버리게 하고, 다시는 네 앞에 안 나타날 수는 있어. 네가 싫다고 하면 절대 억지로 뭘 하지는 않을 거야. 진심이야."
정기의 소모가 어마어마하게 크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고시원에서의 기억에서 나에 관한 것들을 전부 잊어버리게 만들고, '아무 일 없이 자고 일어나서 공부만 해서 기억나는 것도 없다.'라고 해두면 김민아는 날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
아무리 고시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고 해도 그냥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공부만 했다는 것까지만 떠올리고 생각을 그만둘 테니 최면이 깨질 가능성도 극히 적었고.
"나쁜 새끼.."
내 대답을 들은 김민아는 여전히 울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고는 입을 꾹 다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마음을 결정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새로운 질문을 꺼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나한테 집착하는 이유가 뭔데? 내가 얼굴이 예뻐서? 솔직히 나보다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 정돈 세상에 널렸잖아. 정말로 그냥 갖고 싶어서?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성이 풀려서? 그런 이유야?"
한참을 돌고 돈 끝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 질문이었다.